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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soupe Aug 25. 2021

소리로 오래오래







소매치기와 작약


파리 여행을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소매치기였다.

소매치기 방지용 속 복대를 차고 소매치기 방지용 휴대전화 걸이를 손목에 걸고 지퍼가 꽉 달린 작은 가방을 배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했다. 팔찌를 멋대로 채우고 돈을 요구한다는 사기꾼과 서명운동을 하는 척 호주머니를 노린다는 어린아이들로 구성된 사기꾼, 일부러 새총으로 물감을 쏘고는 닦아주는 척 다가오는 소매치기까지. 밤에는 얻어맞을 수 있으니 돌아다니지 말라하고 인종차별도 너무 쉬우니 대꾸 말고 그러려니 받아들이라고. 프랑스 여행용 휴대전화 안전 걸이에는 혹 당신의 손목과 손가락은 부러질지라도 휴대전화는 안전할 겁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당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프랑스인은 다 사기꾼입니다.라는 반 유머, 혹 소매치기가 휴대전화나 가방을 노려 잡아챌 때 너무 크게 저항하지 마십시오. 이건 대사관의 팝업 문구였다.


아니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그런데도 왜 이렇게 파리에 열광하는가. 알아볼수록 안 그래도 걱정 많은 나는 더 겁을 집어 먹었다. 두 발로 지탱한 채 조금이라도 키를 키워 주변을 정찰하는 미어캣처럼 나는 내내 주위를 살폈다. 외출을 하게 될 때는 내내 긴장을 하고 아이들 손을 꼭 붙잡았다.


길을 걷다가 자전거를 한편에 세워두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은발의 신사를 보았다. 그의 팔에 무심한 듯 끼워진 것은 글쎄 작약 다발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아 그냥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에펠탑 앞에서 벤치에 앉아있는 아가씨 둘에게 스카프를 들이밀며 강매하는 사람을 보긴 했다. 나름의 상도인지. 나와도 눈이 마주쳤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가족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거리에서 꽃을 든 사람을 너무 쉽게 만난다. 귀여운 아이들을 둘셋 안은 아름다운 파리의 엄마들도. 바게트 하나를 손에 든 남자들은 골목마다 있을 정도.


그래. 이곳도 그저 사람 사는 곳.
















손을 꼭 잡았다.


엄마 나는 태오를 잃어버릴까 봐 너무 걱정이 돼. 재희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러 번 한 말이다.

팔랑팔랑 뛰어다니기 좋아하고 겁도 없는 동생을 잃어버릴까 봐 여행 내내 손을 꼭 잡고 있던 형아. 아마 이번 여행에서 엄마 아빠 재희가 제일 많이 한 말은 태오! 였을 거다. 서로의 즐거운 시간들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름과 나이 국적 대사관 긴급 번호와 엄마 아빠 번호 하다못해 인스타그램 아이디까지 적은 작은 메모. 뒷면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혹시라도 이 아이가 혼자 있는 일이 생기면 이 번호로 연락해주세요.라고 프랑스어로 적어 넣었다. 태오 몸에 내내 넣어 두었던 것.






단잠에서 깨나 에펠탑까지 걸었다. 해는 뜨겁고 바람은 차가운 날씨.

시폰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사람부터 트렌치코트나 가죽재킷을 입은 사람까지 이 도시에는 4계절이 다 있는 것만 같다. 막 파리에 도착한 한국인 가족에게는 여름날의 산책 같은 느낌이었다. 





에펠탑을 보고 글쎄 재희가 좀 놀랬단다.

이런 표정이었는 줄 모르고 숙소에 돌아오고 나서 사진을 확인하다가 물었더니 그렇게 대답했다.

너무 크고 높아서 좀 놀랬어.


철골들 사이에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어서 저게 대체 뭐지. 하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건 사람이었다고. 에펠탑을 사진과 모형으로 보고는 그저 철골 구조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에 충분한 공간이 있고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고 엄청 놀랐다고 적었다. 이건 재희가 학교에 제출하는 체험학습 리포트 쓴 것을 읽고 나중에 알았다. 숙소에 돌아온 재희는 에펠탑의 중간 전망대에 오른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에펠탑을 그렸다.


















이것은 그 이듬해 여행 갔던 일을 떠올리며 입체로 만들어 보는 미술 숙제에서 재희가 만든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입체로 세울 수 있는 부분을 덧대어 자른 뒤 박스에 옮겨 화면처럼 구성했다. 미술 숙제 속에 그날의 우리가 너무 생생히 담겨있어 놀랐다. 


2020. 봄
















어떤 소원

어떤 소원은 <소박하고 근사하게> p256에서 발췌. 


이야기는 2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재희가 학교에서 여자 친구들에게 유행한다는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을 보고 와서는 그게 갖고 싶다고 했다. 딱딱한 양장본이고 자물쇠가 달려 작은 열쇠로 여닫을 수 있는 그런 일기장. 파는 것을 보게 되면 사주마 하고는 얼마 안 지나 문구점에서 발견해 한 권 사주었다.

어느 저녁에 그날도 책상 맡에 노란 스탠드를 켜고 앉아 뭔가 골똘하던 녀석이 저녁 짓고 있는 내게 와서,

엄마. 그냥 별거 없는 이야기인데 일기 같은 건데 그런 걸 써도 책이 라고 할 수 있어요? 하고 물었다. 도마 칼질을 하며 어쩌면 반건성쯤으로 그럼 할 수 있지. 했는데 입술을 꾹 숨기고 다물며 볼 조개를 옴폭 패는 (녀석이 진지할 때 짓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책상 맡에 돌아가 앉았다. 녀석의 진지한 등 뒤로 짤랑짤랑 열쇠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저녁을 짓고 있던 나는 곧 그 대화도 잊어버렸고 그런 채로 시간이 꽤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들 방을 청소하다가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비밀 일기장 열쇠를 누구의 손도 안 닿게 보관하라고 여닫을 수 있는 나무함 하나를 책상 맡에 달아준 것도 나인데 함을 열어보니 아 열쇠가 얌전히 들어있네. 그러면 안 되는 데. 그날 이후로 녀석이 비밀 일기장에 적은 ‘특별하지 않지만 일기 같은 것이지만 책으로 짓고 싶은’ 그 이야기가 무엇일까 갑자기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데 영락없는 도둑의 모양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녀석의 일기장의 자물쇠를 열었다.


'나는 파리에 살고 있다. 오늘도 에펠탑을 보러 갔다.'로 시작하는 녀석의 소설을 읽었다. 언제부터 이 녀석의 마음에 가본 적도 없는 먼 나라 이 도시가 자리 잡게 되었을까. 통의동 골목에 있었던 하얗고 예쁜 가게에서 어른 검지 손가락만 한 작은 에펠탑 모형을 사준 일이 있는데 책상 맡에 두고 보고 또 보며 참 좋아했었다. 그게 시작이라면 시작이었을까. 그때 다짐을 했었다. 녀석에게 꼭 에펠탑을 보여주어야겠다고 꼭 파리에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부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여행이지만 우리의 첫 보물인 재희에게도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행지를 이곳으로 정했다. 마래의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가 녀석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소원을 이뤘어요. 


+

이 글을 책에 실어야겠다고 생각한 오늘 나는 녀석에게 먼저 비밀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일기장을 몰래 읽어 미안했다고 우선 사과부터 해야지. 너무 떨린다. 

덧붙여 적자면, 녀석은 내 사과를 듣자마자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엄마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에펠탑과 두 아이.


멋진 포즈를 잡아 보라 했더니 태오가 형을 뒤로 끌어안았다. 남편은 에펠탑이 나오게 해 주려고 무릎을 접고 앉았다. 그 모습이 예뻐서 나도 이렇게 담아보았지.





남편의 손전화기 속 두 아이는 이렇게.


















재희 손으로 에펠탑 모습을 담아보고 싶다고 해서 카메라를 내어주었다.

녀석이 담은 에펠탑 속에는 예쁜 오후 해가 반짝했네.

































거리의 작은 과일 상점 앞에는 꼭 이런 것이 있었다. 병의 크기를 고르면 즉석에서 오렌지를 짜내 주스를 담아주는 귀여운 기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뛰어다녀서 볼이 발갛게 익은 태오가 음료수를 찾았다. 신기해하는 아이들과 그런 우리를 더 신기하게 보던 상점 아저씨. 눈빛은 호기심이었지만 끝까지 친절하셨다. 병가 득 채워주신 주스는 생각보다 더 달콤하고 진한 맛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집 앞의 골목을 돌며 장보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귀여운 과일가게가 보여서 사과 두 알과  딸기를 조금 샀다. 크기가 다른 종이봉투가 있고 사고 싶은 것을 담아서 가져가면 계산을 해준다. 여행자에게는 과일 한 바구니도 버거운 양일 때가 있는데 이렇게 사니 조금씩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걷다가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던 로스트 가게에서 잘 구워진 통닭도 홀린 듯 한 마리 사들었다. 곁들일 구운 감자도 있었는데 양이 많을까 걱정해서 안 사 온 것을 나중에 후회할 정도로 맛이 좋았다. 




사과가 너무 맛있어서 행복하다는 태오.















골목에서 만난 귀여운 카페. 

문의 색과 손잡이. 메뉴가 걸린 나무액자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가구들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가볼 생각으로 찜해두었다가 커피 마시고 싶은 시간에 찾았더니 문은 닫혀있고 손 쪽지가 붙어있다. 글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사정이 생긴 거겠죠.















이 예쁜 벽은 초등학교의 담.

막 쉬는 시간이 되었는지 담 안에는 아이들 떠들고 뛰어노는 소리가 났다. 두 녀석이 담을 기웃거리다가 뭐가 떠올랐는지 단짝 친구 누구는 잘 있을까. 지금 몇 교시쯤 되었어요? 하는 것을 묻더니 이내 우리는 안 가서 좋다를 외쳤다. 브라우니와 마카롱을 사들고 쇼콜라 집을 막 나왔을 때 바닥에 흩뿌리기 시작하던 빗방울은 그치지 않고 점점 굵어졌다. 반바지에 반팔티를 입어도 걷다 보면 이마에 땀이 맺히던 어제는 그렇게 다시 거짓말이 되었다.



















저녁의 소리


파리의 저녁은 소리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베이커리나 카페는 저녁이 채 되기도 전에 문을 닫는다. 그러기는 흔하디 흔한 동네슈퍼마켓인 까르푸나 모노 프리도 마찬가지. 모두 이렇게 일찍 퇴근하고 뭘 하려나 싶었는데 그저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차리고 천천히 즐기는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파리의 아파트들의 창은 크고 건물의 사이도 가까워 앞 집은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아도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만화나 영화에서 처럼 창문을 열어놓고 긴 대화도 가능할 것만 같다.

접시를 나무 식탁에 내려놓거나 그릇끼리 부딪는 소리. 포크와 스푼이 경쾌하게 만나는 소리.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알 것만 같은 대화들. 어느 동네나 한분씩 계시는 술 아저씨의 술 소리와 그걸 말리는 누군가의 높은 소리. 틀어 놓은 티브이에서 나오는 소리. 와인잔 부딪는 소리들. 참 기분 좋은 허밍 같은 것들. 열어놓은 창으로 집집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마치 아름다운 음악 같았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은 윗옷을 벗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앞 집이 너무 훤히 보이는 것을 깨닫고 내내 힘들어했다. 그러다가 앞집 아저씨가 맥주병을 들고 창가에서 너무 편안히 바람 쐬는 모습을 보더니 그냥 훌렁하고 옷을 벗어던졌다. 나는 프랑스 마담처럼 부엌 창을 열어놓고 괜히 몇 개 안 되는 설거지가 하고 싶어졌다. 파리의 이 아름다운 저녁. 사소한 소음들이 모여 만든 아름다운 음악에 내가 만든 소리 하나를 얹고 싶어진 것. 피곤하지 않다던 아이들은 초저녁부터 잠이 달고 나와 남편은 자다가 깨기를 반복하는 시차의 밤을 보냈다.










Paris France. 19. juin

소리로 오래오래. 


글과 사진pomme soupe. 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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