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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soupe Sep 23. 2021

가닿은 가장 먼 곳











꽃 아침

 

이 집의 한 가지 아주 중요한 규칙은 방에서 절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 물론 조리도 할 수 없다.

커피를 만들거나 음료를 마시고 싶을 때 1층 주방을 잠깐 빌릴 수 있지만 나는 굳이 이 아름다운 규칙을 깨고 싶지 않았다. 하다 못해 컵 닦을 일조차도 없다니. 이것은 진정한 해방이다.



대신 미리 부탁드리면 이렇게 아침을 차려주신다. 

할아버지의 귀여운 주방. 베이컨으로 감싼 토마토가 오븐에서 익어가는 달큼한 냄새가 난다. 맛있는 빵(진심으로 맛있었다.)과 커피, 정원에서 갓 따온 꽃으로 장식한 접시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식탁에 둘러앉아 꽃 접시에 차려주신 예쁜 아침을 먹었다.




























차이브


식탁에 앉으면 이렇게 아름다운 뒷마당이 보인다. 마당 한편에 할아버지께서 귀여운 텃밭을 가꾸어 놓으셨는데 예쁜 보라꽃이 가득했다. 꽃이 핀 것은 처음 보지만 어 이건 아무래도 차이브 chives인 것 같아 여쭈었더니, 프랑스어로는 치불렛트 ciboulette라고 한다며 영어식 표현을 찾아보고는 차이브가 맞다고 했다. 신기해하는 내게 가위를 주시며 한 가지 꺾어보라 하셨다. 언제 꽃이 핀 차이브 가지를 꺾어 보랴 싶어 감사히 받았는데 아주 상큼한 양파 향기가 났다. 차이브 가지는 수첩 책갈피에 끼워 가져왔다. 그 어떤 것보다도 너무 근사한 수니비어가 되었다. 


금세 접시를 비운 아이들은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옆 마을에 열리는 수요일장을 구경하러 가고 싶다고 했더니

교회 옆 두 번째 골목 덩치가 아주 큰 아저씨가 파는 갈라트를 꼭 먹어보라며 메모에 적어주셨다



















고양이들


살사. 맘보. 쥬크, 춤의 이름과 같다는 고양이들.

이 집에 사는 세 마리의 고양이중 가장 애교가 많던 아이는 살사다. 경계 없이 아이들의 손길을 받아주던 녀석.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는 재희에게 보흐부아 숙소는 정말 꿈의 집이었다.


























몽생미셸



아주아주 먼 옛날 어느 날로 돌아간다. 노르망디 주교 오베르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났다. 그는 이 돌 섬 위에 교회를 지으라는 계시를 남겼다. 그러나 오베르는 썰물에만 건너가 닿을 수 있는 바다 위 척박한 돌섬에 교회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무시하려 했다. 그러자 다시 대천사 미카엘이 꿈에 나와 교회를 지으라 계시했고, 그래도 짓지 않으니 세 번째 꿈에 나타난 미카엘이 오베르 주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마치 인두로 지지는 듯한 괴로움을 느낀 오베르는 결국 계시를 받아들여 교회를 지었다. 후에 오베르가 죽은 뒤 그의 두개골에는 이마를 꾹 누른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성의 가장 높은 탑 위에 금빛의 천사상이 바로 꿈에 나타났다는 미카엘.


몽생미셸은 교회로 쓰이다가 이후 백년전쟁에는 영국군의 대포를 막아낸 요새가 되었고 15세기에는 지형적 특성을 백분 활용해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가늠하기 어려운 아주 긴긴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 지금은 수도원으로 사용하고 있고 소수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입구에서부터 오르는 작은 골목은 식당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이어져있고 수도원에서 운영한다는 객실도 보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혹은 라푼젤의 코로나 왕국. 그 어디 즈음.








몽생미셸까지는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간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면 된다. 10-15분 간격으로 셔틀이 오간다.

버스를 타고 성까지 걸리는 시간도 15분 정도. 성이 보이는 방파제에서 내려준다.











돈 없는 순례자들을 배불리 먹게 하기 위해 달걀물을 수없이 휘저어서 거품을 낸 후 동 팬에 한껏 부풀리듯 구워낸 오믈릿. 몽생미셸의 초입 빨간 어닝을 달고 커다란 동 팬을 내건 이 집이 그 오믈릿의 원조집이라고 한다. 원조집인 만큼 관광객으로 내내 붐볐다.

배곯고 잠 굶으며 어렵고 어렵게 가닿은 순례자가 아닌 한 오믈릿의 맛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후기를 너무 많이 읽은 터라 그냥 지나치기로 했는데 남편은 맛없는 맛으로라도 먹어보고 싶다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맛없는 경험을 사기에 너무 비싼 가격을 보고 돌아섰다.



















비가 제법 내려 옷과 신이 다 젖어버렸다.

미로 같은 길은 평지가 없이 위로만 뻗어있고 긴 시간 닳아진 돌길은 정말 미끄러웠다. 한 손에는 우산 한 손은 아이를 하나씩 나누어 꼭 잡고 관광객으로 복작거리는 길을 걸었다. 잠깐만 앉아 쉬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 작은 예배당을 발견했다. 비를 그어가자며 들어서니 안에는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일본인 커플의 웨딩촬영이 한창이었다. 그 모습을 관광객들도 아주 흥미롭게 구경했다. 몽생미셸에서 웨딩촬영이라니 멋지다 싶으면서도 날이 너무 궂어 고생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옮겨갔다. 다행히 더 깊은 생각에 빠지기 전에 커플은 철수했고 사람들은 금세 다른 곳으로 관심을 옮겨 더 머물거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경 이야기를 조금 더 잘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스테인드글라스로 아름답게 장식된 창을 가리키며 태오가 의미를 물었을 때. 저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름답게 투영되던 빛을 같이 바라보며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도 참 좋았다.









교회의 뒤쪽 작은 문으로 나가보니 잘 가꾸어진 아담한 묘지가 있었다.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을까. 정말 아름다웠던 묘지.


작가 김영하 선생님은 여행을 가면 일부러 그 나라의 묘지를 찾아가 본다고 얘기하신 것을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보았다. 남의 묘지를 가본다니 이것이 웬 말인가. 싶었지만 정성스럽게 잘 가꾸어진 공원묘지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공간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




























아주 천천히


분명 저렇게 눈앞에 있는데 내가 정말 보고 있는 것이 맞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달의 힘은 말없이 위대하여 바다를 밀었다가 다시 쓸어내기를 반복한다. 그 바다에 아주 오랜 시간 깊고 깊은 사연을 담은 섬. 그 자체가 성인 몽생미셸. 

각 나라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셔틀버스를 타고 새로 난 길을 따라 쉽게 도달하는 것과 달리, 달의 힘이 쓸어낸 자리 축축한 땅이 드러나면 신을 벗고 다리를 걷어올린 순례자들이 묵묵히 그곳을 길이라 여기며 성을 향해 걷는다. 성의 높은 턱에 올라 거리를 차마 가늠키도 어려운 드넓은 갯벌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점처럼 서있는 것이 무얼까 남편에게 물었더니 아주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성에서 내려와 점들이 나와 같은 크기가 되고 나서는 더 놀랐다. 그 점들은 모두 중학생이 채 못 되는 아이들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몽생미셸을 대하는 마음은 이런 것. 


몽생미셸이 들어있는 아주 작은 스노볼을 기념품으로 데려왔다.

밤 열 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해가 질 줄 모르는 이곳.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를 이상하고도 내내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스노볼을 자꾸만 기우뚱거려 눈을 나리 게 했다.


























부부의 십 주년

<소박하고 근사하게> p261에서 발췌.


부부로 열 해를 함께 했다.
남편이 십 년에 한 번은 비행기 태워줄게 라고 (실은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내게 약속을 했던 모양이다. 반년도 더 전에 남편은 프랑스로 떠나는 비행기표를 사놓았다. 남편은 출장이 잦아 그렇지 않지만 나는 신혼여행 다녀온 지 꼭 십 년 만에 여권을 갱신했다. 그러니까 신혼여행 말고 내게 첫 외국여행인 셈이다. 

참 촌스러운 사람. 집 좋아하고 움직이는 기계 타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 그게 나인데. 멀 것만 같던 여행의 날이 다가오자 나는 좀 겁이 났다고 고백한다. 이 여행은 선물이고 우리는 선물을 받아도 좋을 만큼 열심히 살았으니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오자 했다. 


십 년이 시간 뜻처럼 정말 십 년 같았던가 돌이켜보면 이렇게나 지난 줄 몰랐는데 하고 머리를 긁적일 만큼 금방이었다. 두 아이를 낳아 키우고 살림 이만큼 꾸리는 동안 분명 힘들고 아픈 일도 벅차고 고단한 일도 있었을 텐데 돌이켜보면 어떤 것이든 다 괜찮았다. 힘들고 아픈 것은 같이 보듬었기에 견딜만했다. 벅찰 때는 짐을 나누었고 많이 고단할 때는 등에 어깨에 마음에 서로 파스를 붙여주다가 그 꼴마저 우습다며 낄낄거렸다. 그렇게 웃고 나면 또 버틸만했다. 좋은 것은 같이여서 더 좋았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어 더 맛있었다. 또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십 년이 다시 갔구나 할까.


다음 십 년도 또 그다음 십 년도 제일 친한 친구로 오래오래 잘 지냈으면 좋겠다. 


프랑스 노르망디 섬, 몽생미셸에서.

2019년 6월


















가닿은 가장 먼 곳.


몽생미셸이 잘 보인다는 비밀 스폿을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다. 숙소에서 차로 5분 정도. 차를 한쪽에 세워두고 막아놓은 커다란 나무 빗장을 풀고 들어서면 둘러보아도 아무 거스를 것이 없는 끝없는 평지가 나타난다. 


분명 몽생미셸이 저렇게 닿을 듯 보이는 데, 차와는 자꾸만 멀어지는데 걸어도 걸어도 성이 가까워지지 않는다. 체감한 적 없는 물리적 거리와 시야. 꿈을 꾸는 것처럼 걷고 또 걷다가 어쩐지 겁이 덜컥 나 차로 되돌아왔다. 망망 대지. 둘러보니 신기루 같은 성과 내가 놓여있다. 오로지 '나'가 이 멀고 먼 나라 낯선 땅에서 내가 명확히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이었다. 아마 이 이상한 느낌이 내가 알고 있는 감정 중에 겁에 가장 가까웠던가보다. 내가 가닿은 가장 먼 곳. 그곳에서 가장 또렷해진 나를 마주한 기분은.


비를 맞고 오래 걷느라 고생한 아이들이 차에서 잠이 들어서 남편은 차에 머물렀는데 혼자라도 걸어보겠다고 나선 내가 금방 차로 되돌아온 것을 보고 남편이 왜 그냥 돌아왔느냐 물었다. 겁이 났다고 솔직하게 말하기가 어쩐지 쑥스러워서 해가 지고 나서 다시 오고 싶어서 라고 했다.
















1. 태오는 깜빡깜빡 그 어떤 전초 신호도 없이 그야말로 제로로 방전해버렸다. 평소에도 오래 걷는 것을 힘들어하는데 비까지 맞으며 참 많이 애썼구나 싶었다. 버스를 타고 몽생미셸에서 내려와 보니 저녁을 먹으려던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아버렸다.(식당이 이른 저녁이면 문을 닫는 줄은 알았지만 정말 이렇게 빨리.) 애매하게 저녁 먹을 시간을 놓쳐버린 것. 다행히 구글맵에서 맥도널드를 발견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것은 흔한 프랑스 시골 맥도널드의 뷰.  

끊임없이 BTS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매장에 앉아있으니 절로 어깨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두유노우 비티에스 아무나 잡고 묻고 싶더라. 커다란 햄버거로 든든한 저녁을 먹었다. 


2. 낡은 인형과 장난감들이 놓인 2층 아이들 방은 참 귀여웠는데, 첫날과 달리 비가 내리자 재희가 괜히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며 무서워했다. 아이들과 방을 바꾸어 잠이 들었는데 혹시 밤에 깨난 아이들이 엄마에게 오고 싶을까 걱정이 되어서 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3. 새벽녘 열린 문 틈 사이로 무언가 스륵하고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 바로 고양이. 남편 곁에 맘보가 아옹 아옹 다가오더니 침대에 팔락 올라앉았다가 나갔다. 털이 하얗고 푸른 눈을 가진 쥬크는 유일하게 만지지 않도록 주의를 받은 예민한 여자아이인데 그마저도 이틀 내 딱 한번 만났다. 남편 말이 내 잠이 아주 단 첫새벽에 쥬크가 방에 들어와 한번 만져봐도 돼 하는 표정으로 머물렀었다고. 

아무래도 밤을 새운 것 같다. 휴가인 사람한테 회사에서 전화가 너무 많이 왔다. 휴가이니 좀 모르는 척 하래도 착해빠진 사람은 거절을 못했다. 재희가 그랬지 아빠가 없었으면 우리 이렇게 멀리 여행 못 왔을 것 같다고. 제일 고생했다. 당신이. 비가 그친 아침 멍하게 누워있던 당신을 본 이 순간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더 없을.


백야, 해가 참 더디 지는 이곳.

해가 지는 것을 기다리다가 글쎄 밤 열한 시가 되어버렸다. 수녀님이 촛대를 들고 다니며 방마다 하나씩 하나씩 불을 밝힌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차차히 불 켜진 창이 늘어나는 것을 꼭 보고 싶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마을. 해가 지운 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인데 그 반대쪽은 아직도 노을이 붉다.


엷게 흩뿌리던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하니 바람마저 시큰하다가 매워졌다. 성 쪽으로 조금 걷다가 아이들 얇은 옷이 걱정되어서 그만두고 차로 돌아왔다. 곧 성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막 탄성을 질렀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나서 이번에는 남편이 가까이 까지 걸어가 보겠다고 나섰다. 사진은 남편이 담아준 것. 아 다시 더 없을 아름다움은 이런 것이구나. 내가 또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Paris France. 19. juin

가닿은 가장 먼 곳


글과 사진pomme soupe. 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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