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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soupe Sep 27. 2022

지우는 것도 쓰는 것이라면.


며칠째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다.

여러 일을 하는 틈틈 짬을 내어 고작 하는 일은 써놓은 글을 지우는 것이다. 글을 지울 때마다 지워낸 문장보다 더 많은 문장을 머릿속으로 생각하지만 다시 글로 털어놓지 못한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맥주집 화장실에서 술에 조금 취한 채 손을 닦다가 반지를 잃어버렸다.

헐거운 반지를 손가락 가장 굵은 마디에 의지해 겨우 끼우고 있었는데 흐르는 물과 함께 미끄러지며 물구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순간 놀랐지만 곧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좁고도 더러운 세면대의 물구멍에서 반지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포기를 해버렸다. 생각해보면 뭐 그렇게 비싼 반지도 아니었다. 손가락에도 잘 맞지 않으니 어쩌다가 외출에 한번, 또 눈에 띄지 않는 동안은 잊어버릴 만큼 의미도 없는 물건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일행에게 반지 잃어버린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찾아주겠다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취기가 오른 동료들의 정의감 수치는 갑자기 치솟았고 한 명은 핸드폰 플래시로 컴컴한 구멍을 비추고 한 명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쇠꼬챙이로 구멍을 뒤적이더니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며 역시 또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공구를 들고 와 파이프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화장실 소동을 알아챈 맥주집 알바가 들어와 시큰둥이 묻는데 동료들은 여기 아주 비싼 반지가 들어갔다며 세면대 팝업이 고장 난 것에 대해 항의했다. 반지를 잃어버린 것이 세면대 팝업의 탓은 아니었지만 손님이 세게 나오니 맥주집 알바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하고 싶은 대로 하되 원위치만 시켜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열심히 내 반지를 찾겠다고 애쓰는 것을 모습을 보니 갑자기 반지를 잃어버린 것이 애통해지기 시작했다. 반지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조바심이 들었고 취기와 함께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났다. 플래시를 비추던 동료는 우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주었고 삼십 분 더 씨름을 했지만 반지 비슷한 것도 찾지 못했다. 자리로 돌아온 우리는 식고 김이 빠진 남은 맥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고 잃어버린 혹은 찾지 못한 반지에게 안녕을 고했다.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정의로운 기분으로. 



쓰지 못하고 기껏 써놓은 글을 지우고 있을 때면 헐거운 반지를 끼고 손을 닦다가 반지를 잃어버린 그날이 떠오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해 포기해버린 그 마음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것이 내게 의미 없는 문장들이라는 핑계를 구구절절 찾다가 사실은 눈물이 날만큼 안타깝고 서러운 기분이 되는 것 같다. 그날 반지를 찾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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