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즐겨찾기 Nov 01. 2020

<고리오 영감> - 좋은 삶의 조건

발자크

두 번째 책으로는 큰 고민 없이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정했다. 흥미로운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예전부터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예상했던 것과 달랐고,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프랑스 문학의 대표작가로 불리는 발자크의 명성에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고리오 영감은 파리의 어느 비루한 하숙집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다. 하숙집 사람들은 고리오 영감을 놀림감 삼기를 즐기는데, 아무리 놀려도 사람 좋게 웃거나 적당히 투정부리기 때문이다. - 한 마디로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 고리오 영감은 한 때 부유했던 상인이었으나 대부분의 재산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럼에도 자족한 인생을 사는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받는다.     


그런 그에게는 감춰진 비밀이 있다. 그것은 귀족 집안에 시집간 아름다운 두 명의 딸이 있다는 사실이다. 고리오 영감은 두 딸의 행복을 위해 평생 모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결혼 지참금으로 주었다. 상인 계급의 여자가 귀족 집안에 시집가고 파리 사교계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돈이었다. 고리오 영감은 이렇게 재산을 써버리고 누추한 하숙집에서 혼자 살게 된 것이다.      


고리오 영감의 딸들에 대한 헌신이나 부성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두 딸은 화려한 사교계를 향한 허영심으로 사치스러운 옷과 장신구에 재산을 낭비하는데, 그때마다 고리오 영감은 딸들에게 돈을 준다. - 딸들은 각자의 남편과 돈의 소비를 둘러싼 갈등을 겪고 있어서, 그들로부터 경제적으로 지원받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출처 :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한 장면

고리오 영감의 부성, 혹은 딸들에 대한 집착은 뒤틀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편과 가정불화를 겪는 둘째 딸에게 그는 용서와 화해가 아닌 다른 남자와의 사랑, 즉 불륜을 종용한다. - 그 당시에도 지금도 파리에서는 정부나 애인을 가지는 것이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 고리오 영감에게 최우선의 가치는 딸들의 행복과 즐거움이므로, 딸들의 불행은 곧 악이고, 척결의 대상이다. 그 과정에서 옳고 그름이나, 다른 가치는 헤아려야 할 사유가 되지 않는다.     


고리오 영감은 오랫동안 간직한 은그릇을 내다 팔아 딸들에게 돈을 바치고, 마지막 남은 연금마저 처분하여 딸의 무도회용 드레스 비용을 마련해 준다. 딸들은 아버지인 귀족집안에 시집간 후 고리오 영감이 수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집에서 쫓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필요할 때면 아버지를 찾는다. 딸들은 고리오 영감이 지병으로 실신하여 생사를 오가고 있을 때도 나타나지 않고, 고리오 영감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20살의 청년 라스티냐크이다. 그는 고리오 영감과 같은 하숙집에 살고 있으며 우연히 고리오 영감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는 파리 사교계에 진출하려고 노력하던 중 고리오 영감의 둘째 달과 사랑에 빠지는 인물이다.     


라스티냐크의 표현에 따르면, “고리오 영감의 딸들은 아버지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무도회에 갈 사람들”이다. 그녀들은 철저하게 탐욕적이다. 고리오 영감은 죽음에 이르러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원하는 것을 다 해준 게 후회된다. 그들에게는 내가 아니라 돈이 필요했을 뿐이다.”라고 울부짖으며 후회한다. <고리오 영감>의 이런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떠올리게 한다.     


고리오 영감의 이런 행동이 이해되는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인물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조차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딸들에게 헌신적인 부성애를 보였던 고리오 영감의 삶을 칭송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싶다.     

 

“영감님,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나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그런데 왜 그가 비판받아야 하는가.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인가. 그의 삶은 훌륭한 삶, 좋은 삶, <굿 라이프>로서의 모든 면을 갖고 있지 않은가.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의 <굿 라이프>는 행복이라는 주제를 다룬 책이다. 그는 행복을 ‘쾌락적 행복’과 ‘의미적 행복’으로 나눈다. - 다만 나는 이러한 분류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 쾌락적 행복은 순간순간에 맞닥뜨리는 삶의 즐거움이다. 의미적 행복은 자아의 성장과 타인에의 기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는 순간적인 즐거움으로 가득한 행복을 누리는 것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모두 좋은 삶, ‘굿 라이프’로 본다.

     

쾌락적 행복은 맛있는 음식, 산책, 운동, 독서와 같이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이러한 행복을 얻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은 잘 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되어야 하는 사람보다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소유보다는 경험을, 돈보다는 시간을 중요시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만의 소소한 작은 즐거움을 누리면 된다. 이렇게 살면 그것이 바로 ‘굿 라이프’다.      


의미적 행복을 얻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은 직장에서의 ‘성공’보다는 직업적인 ‘소명’에 중점을 두고 일하는 것, 자기 통제와 긍정 정서를 통해 일에서의 성취감을 얻는 것, 타인의 안녕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 또한 ‘굿 라이프’다.     


다만 이 책은 쾌락적 행복과 의미적 행복이 충돌하는 경우, 아니면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행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저자는 그런 상황을 살펴보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운동이나 독서에 많은 시간을 들이면서 동시에 일의 성취감을 얻기는 쉽지 않다. 더 많은 시간을 봉사활동에 할애하면서 타인에 기여하고 싶어도, 가족들은 수입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삶의 모순과 갈등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어떤 행복이 우선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다시 고리오 영감으로 돌아가 보자. <굿 라이프>의 기준에 따르면, 고리오 영감은 쾌락적 행복과 의미적 행복을 모두 누리는 방식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딸들을 위한 그의 헌신은 그가 좋아서 한 행동이다. 그는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돈을 소유하기 보다는 돈을 사용하면서 경험하는 방향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방향으로 행동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는 많은 쾌락적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의미적 행복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고리오 영감은 그리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제면업자로서 직업적 소명을 다한 후 은퇴했고 거기에 막대한 재산까지 얻었다. 은퇴한 이후 그는 딸들의 사회적 성공과 정신적, 물질적 행복에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기여했다. 그는 자기중심성에서 탈피하여 자녀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이지 삶을 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삶은 의미적 행복이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와 같은 삶을 살거나, 다른 사람에게 권유하고 싶지 않고, 그의 삶을 바로 잡아 주고 싶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굿 라이프>에 나오는 ‘좋은 삶’의 여러 방법 중 고리오 영감이 하지 못한 한 가지는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의 온갖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리오 영감은 ‘자기를 성장시키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많은 쾌락적 행복과 의미적 행복을 누렸음에도 실패한 삶을 살게 된 이유다. - 사람에 따라서는 그의 삶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고리오 영감이 “헌신적인 부성애를 통해 스스로의 인격을 성장시킨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인격적인 성장도 성장의 한 종류이고, 그의 헌신과 부성애에 존경심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딸들에 대한 그의 헌신과 부성애는, 딸들이 어렸을 때부터 고리오 영감이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었을 뿐 성장한 것이 아니다. 고리오 영감은 죽기 직전 딸들을 원망하기는 했지만, 평생 해왔던 것처럼 이내 딸들을 용서했다. 고리오 영감은 소설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   

  

내가 고리오 영감에게 느끼는 감정은 연민과 동정, 불편과 부당, 답답함과 경계심이다. 불편함과 답답함을 넘어 당황스러움에 이를 지경이다. 그 답답함은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불효하는 딸들을 대하는 그의 자존심 없는 태도 때문이 아니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 – 바로 자기 자신 - 을 잃고 사는 모습 때문이다. 사실 나는 자식, 가족, 직장, 사회, 국가를 위해 몸 바쳐 일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발자크가 이런 인물을 창조한 이유를 모르겠다.     

고리오 영감 1897년판 표지


물론 <고리오 영감>만으로 작가인 발자크를 비판하기는 무리가 있다. <고리오 영감>은 <인간 희극>이라는 구십 편의 장편과 단편으로 이루어진 대하드라마 중 한편에 불과해서, <인간 희극> 전체를 읽어야만 그 시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뒤틀린 부성애가 아니라, ‘돈에 대한 집착’의 측면에서 보면 <고리오 영감>은 인간의 속물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는 흥미로운 화두가 한 가지 더 있다. 또 다른 주인공인 라스티냐크에 대한 얘기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고리오 영감의 딸들과 야심찬 청년 라스티냐크의 선택을 대비한다는 것이다.     


라스티냐크는 젊은 대학생이다.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자란 그는 파리에서의 성공을 꿈꾸는데, 그런 그의 꿈을 알게 된 하숙집 동료가 그에게 달콤한 제안을 한다. 일종의 청부살인을 통해 부유한 귀족의 상속자인 아들을 죽인 다음, 그의 이복동생으로 장차 상속녀가 될 사람과 결혼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재산을 상속받게 되면 그 중 20%를 달라고 제안한다. 예비 상속녀는 같은 하숙집에 살고 있는 여자로 이미 라스티냐크에게 큰 호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라스티냐크가 그녀를 사로잡는 것은 쉬운 일이다.     


상속자를 죽이는 것은 그 당시에는 흔했던 결투를 통해 교모하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라스티냐크가 연루될 염려는 없다. 그의 고민은, 성공을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하는가, 두 가지였다. 라스티냐크는 결국 이러한 방식의 성공을 포기한다. 고리오 영감의 두 딸이 성공을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고, 아버지를 밟고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과 대칭을 이룬다.     


라스티냐크는 파리에서 성공하려는 꿈을 잠시 미룬 채 고리오 영감의 임종을 끝까지 지키고, 딸들을 대신해 장례식까지 치러 준다. 그는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유일하게 ‘자신을 성장시키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좋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라스티냐크는 <인간 희극> 중 수십 편에 등장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공하여 고위 관료가 되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고리오 영감>의 결말은 나름 교훈적이라 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의 굴레에서> - 삶의 굴레와 삶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