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골딩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은 제목부터 생소했다. 대부분의 다른 소설은 주인공, 배경 혹은 주제를 제목으로 한다. 그런데 ‘파리대왕’이라니. 파리대왕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말 그대로 ‘파리들의 대왕’인지, 만약 그렇다면 파브르 곤충기도 아니고 왜 파리들이 등장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영어제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제목을 오역한 게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제목이 풍기는 분위기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20년 전에 이루어진 번역(민음사 출판본의 경우 1999년에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그때 이후로 다시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2007년에 나온 것이 가장 최근이다)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섬과 바다 지형에 대한 특수용어들, 친절하지 않은 배경묘사,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 이 모든 것이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다.
더구나 전체 300쪽 중에 180쪽 정도(민음사 기준)까지는 별다른 사건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 어떤 사건이 벌어질 듯 말 듯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다. 그 잔잔함이 지루하고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만약 이 책이나 같은 제목의 영화에 대해 무언가 들은 적이 있어 ‘파격적, 충격적, 호소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책이라고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도무지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수십 명의 영국 소년들이 어느 무인도에 불시착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년들을 데리고 온 비행기 조종사는 그들만 남겨 두고 무인도를 떠나버렸다. 그곳에 어른은 한 사람도 없다. 소년들의 나이는 5살부터 12살이다. 그들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살아남기 위해 협력하기로 한다. 이러한 도입부는 <15소년 표류기>이나 <보물섬>처럼 소년, 소녀 명랑소설의 느낌을 준다. - 도무지 ‘파격적, 충격적, 호소력’과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당신을 포함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무인도에 갇힌다면 생존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언뜻 떠올릴 수 있는 생존 방식은, 지도자를 뽑아 규칙을 정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것, 잠을 잘 수 있는 거처를 만들고 식량을 구하는 것,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짐승이 있는지 살피는 등 안전을 도모하는 것, 봉화를 피워 구조를 요청하는 것 등이다.
<파리대왕>의 소년들은 이러한 일반적인 방식들을 그대로 따른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랠프'라는 소년을 지도자로 뽑은 것이다. 랠프는 12살인데다가 체격이 좋다. 무엇보다 그가 커다란 ‘소라’를 나팔처럼 불어 불시착한 소년들은 바닷가로 소집했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지도자로 뽑았다. 소년들은 사냥을 할 사람, 어린아이들을 돌 볼 사람, 봉화를 관리할 사람 등으로 역할을 나누고, “소라를 들고 있는 사람만이 회의에서 발언할 수 있다”는 것 같은 규칙들도 정한다.
소년들의 첫 번째 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불씨를 안고 있다. 잭 메리듀라는 소년이 지도자가 되길 원했으나 다수결에 의해 좌절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권력욕과 폭력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주인공 랠프와 대립한다. 권력이 두 명에게 속할 수는 없기에, 이는 훗날의 갈등과 후반부에 나타나는 폭발의 진원지가 된다.
또 하나 유념할 것은 나이에 따른 소년들의 구성이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수십 명의 소년들 중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는 소년(대략 9-10세 이상)은 스무 명 정도에 불과하다 – 어떤 숫자도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 그들만이 사냥이나 봉화 관리 등의 업무에 있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에, 그들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중요하다. 그들이 여론과 집단적 힘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소년들은 대부분 성가단원이고, 그 성가단의 단장이 잭 메리듀이다. 전체 소년들의 공동체가 분열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규칙을 지키며 협력해서 생활하던 소년들이 차츰 갈등을 겪는다. 봉화를 관리하는 게 우선인지, 아니면 멧돼지를 사냥하여 육식을 위한 식량을 확보하는 게 우선인지 의견이 갈린다. 5-6살의 어린아이들은 누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다툼을 벌인다.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오두막을 짓는데, 어떤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일을 하지 않는다며 싸우고 감정이 상한다. 어느 것이나 공동체 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이다.
뿐만 아니라 소년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 어쩌면 모든 인간이 가진,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 무서운 꿈을 꾸는 어린아이들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섬에 무서운 짐승이 산다든지, 밤에 바다에서 무서운 괴물이 나타난다든지 하는 두려움을 갖는다. 이러한 두려움은 10대라고는 해도 아직 어린 소년들의 마음속에까지 공포심과 경계심을 심는다.
이렇게 작가인 윌리엄 골딩은 소년들의 공동체 내부에 갈등과 분쟁, 두려움과 알 수 없는 적의를 쌓아올린다. 별다른 사건 없이 3/5 지점까지 이런 저런 땔감들을 모아 차곡차곡 장작을 쌓기만 한다. 그리고는 연쇄적으로 폭발시킨다. 이전까지는 지루하고 나아갈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던 소설이 고농도의 에너지가 응축된 핵폭탄처럼 터지며 버섯구름을 그린다. 건물이 폭파되어 사람들이 죽고 파편이 튀어 또 죽는다. 막을 수 없는 재앙이다. 긴박함에 숨이 찰 정도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헐떡거리던 숨이 탁 풀리면서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사회계약론자인 토마스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인다고 했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인간을 신체적이나 정신적인 기능에서 평등하게 만들었다. 이런 능력의 평등으로부터 목적한 바를 얻고자 하는 똑같은 희망이 생기게 된다. 두 사람이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나 양이 충분하지 못해 서로 만족할 수 없을 때 두 사람은 적이 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는 부정의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같은 개념들은 전쟁 상태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공통의 권력이 없는 곳에는 법이 없으며, 법이 없는 곳에는 부정의도 없다. 전쟁 상태에서는 소유권도 지배권도 없으며, 내 것과 네 것의 구분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득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지를 경작하는 일도, 항해를 하고 물자를 운반하여 사용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 예술도 문학도 사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쁜 일은, 언제 당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과 공포이다. 인간의 삶은 외롭고 가난하며, 더럽고 야만적일 뿐 아니라 그나마 짧다.
-이상은 다음백과, 고등교과서 윤리와 사상 부분 참조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남겨진 소년들이 (영국 사회와 같은) 문명화된 공동체로부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모습까지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근대의 시민들은 오랜 시행착오와 희생 끝에 악의 화신인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낸다. 리바이어던은 사람들이 뭉쳐서 만들어낸 거대한 인간형의 존재로서 국가이자 전제군주이다. 하지만 소년들은 그런 절대적인 통치자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Lord of the flies’는 히브루어의 ‘Beelzebub(베엘제붑 또는 바알제부브)’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베엘제붑’을 직역하면 ‘파리의 왕’이라고 한다. 고대 사람들은 파리라는 생물이 악령 그 자체거나 혹은 사람에게 악령을 옮기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파리가 꾀었던 음식을 먹으면 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고, 썩은 고기나 쓰레기에 떼 지어 몰려드는 파리들을 보고는 정말 불길하고 더러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파리에는 ‘죽음의 냄새’와 ‘병을 유발하는 더러움’이 있다고 여겼다.
또한 베엘제붑은 셈족의 신 ‘바알’을 가리키는 명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베엘제붑을 ‘악마’ 또는 ‘사탄’을 달리 이르는 말로 사용했다고 한다(이상의 베엘제붑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위키백과 참조).
이 책의 제목인 <파리대왕>은 결국 ‘악마’를 뜻하는 것이고, 그것이 비유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포악함과 추함’이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대체 언제 ‘파리대왕’이 등장하는지 궁금했다. ‘파리대왕’은 책의 중후반부에 비로소 잠깐 등장하는데, 그것은 어떤 존재가 아닌 물체였다. 더구나 아주 엉뚱한 물체였기에 어이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파리대왕’을 등장인물로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그것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었다.
혹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그들이 미성숙한 소년들이었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성적, 합리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어른들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소년들과 같은 투쟁 상태를 만들지 않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믿을 것이다. 어쩌면 맞는 얘기일 것이다. 작가가 굳이 5살부터 12살까지의 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유가, 그들의 미성숙함과 비합리성, 감정적인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나이의 소년들이 포장되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고 집단적 행동에 쉽게 동요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 이 책의 백미 중의 백미인 결말 부분은 소설가가 상상해 낼 수 있는 최고의 마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작가는 어른들 역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있고 ‘본성의 포악함과 추함’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마음속의 ‘파리대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어떤 비평가는 이 책이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고 했다.”고 평가했다는데, 이러한 의견에 동의한다. 사회 결함의 원인은 사회 제도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있다고 믿는다. - 그렇다고 내가 성악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다. 소년들 중에는 안경을 쓴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안경은 쓴 소년은 뚱뚱하고 운동능력은 떨어져도 똑똑하고 지적이다. 그의 안경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는 데 쓰인다. 불이 있어야 구조의 신호를 보내고 멧돼지를 구울 수 있다. 하지만 안경은 망가지고, 소년은 안경을 빼앗긴다. 결국에는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분열하는 사회에 속한 지식인의 한계이자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