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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Nov 07. 2019

남녀공용 화장실만 있는 도시 - 스톡홀름

스웨덴은 이상적인 국가일 뿐 아니라 이상한 나라였다.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스웨덴의 지상은 밋밋했다. 소나무와 가문비나무가 넓게 퍼져 숲을 이룬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호수가 있었다. 작은 관목들과 고생대의 이끼들이 지배하고 있던 아이슬란드 땅과 비교하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곧바로 셔틀 버스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향했다. 도로 주변의 암석들은 청년기에서 성장을 멈춘 모습이었고, 지구의 것이 아닌듯한 거대한 산맥도 포말이 일어나는 빙하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나무와 땅과 돌과 하늘이 모두 그저그렇게 느껴졌다. 스톡홀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이슬란드의 후유증에 빠져 있었다.     


 스톡홀름의 거리에는 사람과 자동차가 많았다. 분명 그리 붐비는 것은 아닌데, 왠지 복잡하고 정신없게 느껴졌다. 역시 모든 일은 상대적이던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깨끗한 바람조차 아이슬란드와 비교했을 때는 그 청명함이 덜했다. 세차게 불어오다가도 이내 끊기는 바람은 바람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웠다.     


 스톡홀름의 구도심인 감라스탄(Gamla stan)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도심의 맞은편에서 본 스톡홀름은 분명 아름다웠다. 화려한 건 아니지만 은은하게 마음을 적셨다.


 하지만 그런 야경이 어디 스톡홀름에만 있으랴. 부다페스트와 빈의 야경 역시 그윽하기 그지없고, 남산에서 보는 서울의 밤하늘도 뒤쳐질 게 없다.    


 스톡홀름 여행은 실패로 끝날 것 같았다. 아이슬란드에서 돌아온 지 불과 이틀 만에 여행을 떠난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북유럽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스톡홀름은 어린 시절 내 부루마블 게임의 탑픽인 도시였다. 우리 동네의 부루마블 로컬 룰은 땅을 매수함과 동시에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북유럽의 스톡홀름과 코펜하겐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노른자 땅이었다.


 스톡홀름을 사기만 하면 게임의 승패와 관계없이 위너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스톡홀름을 차지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주사위는 언제나 내 편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알게 된 스웨덴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이상적인 국가의 전형이었다. 대학교수와 버스운전사의 월급에 큰 차이가 없고, 사회적 인식에 있어서도 차별받지 않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나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꿈에서 그릴 수 있는 나라였다.     


 스웨덴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에 가까웠다. 물론 말로만 듣고 글로만 본 것이어서 현실은 다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스웨덴에서는 어떤 꿈을 꾸든, 어떤 모습을 하든 존중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한한 자유가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스톡홀름은 반체제 인사로 유명한, 밀레니엄 시리즈의 주인공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사는 곳이 아니었던가.     


 스톡홀름 여행 하루 만에 그런 모습을 발견하기는 무리였을까. 스톡홀름은 유럽의 다른 관광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줄지어 선 상점들, 화려한 백화점과 쇼핑몰, 잘 가꾸어진 거리와 조명들. 행인들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던 게 그나마 조금 달랐던 점이랄까.


 스톡홀름에 도착한 첫날 남는 것은 야경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스톡홀름의 진면목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에 있는 공공도서관을 찾는 길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숙소에서 30분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는데, 가는 길에 놀이터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했고, 아내와 나는 그 틈을 타서 벤치에 앉아 쉬었다.


 도서관에 다녀온 후 다른 길로 돌아가는데 그곳에도 놀이터가 있었다. 우리는 다시 놀이터에 머물렀다.     

 그렇게 두 번째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다 문득 깨달았다.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빠였다. 아빠가 한두 명 있는 게 아니라, 10명 이상의 사람들 중 한두 명을 빼고는 전부 아빠였다. 이것이 ‘라떼파파’던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두 곳의 놀이터에는 한쪽 편에 사람들이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할 수 있는 공용공간이 있었다. 가정집에서 침실을 제외한, 거실과 주방만 있는 형태로 꽤 넓었다.


 거실에는 아이들이 잘 수 있는 침대와 담요가 있었고, 주방에는 간단한 조리 도구들과 식탁이 구비되어 있었다. 아빠들은 그곳에서 아이들과 놀거나 음식을 먹었다.     

 독일에 살고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독일에서 조차 육아는 엄마들의 몫이었다. 대낮에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노는 아빠는 드물고, 있다 해도 엄마를 대동하고 있었다. 스톡홀름의 놀이터에는 엄마가 거의 없었다.     


 놀이터에서의 신선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더욱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놀이터를 떠나 공원 산책로를 따라 다시 시내로 가는 길이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였다.     


 멀리서 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보는데, 여자 아이 한두 명의 모습이 보였다. 점점 가까이 가면서 보니 여자 아이들이 꽤 많았다.


 마침내 축구장 옆에 서서 그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6명이 팀을 나누어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9명이 여학생이었다. 심지어 꽤 잘 했다.     


 성별로 팀을 나눈 것도 아니었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서로 섞여서 몸싸움을 해가면서 축구를 했다. 물론 여자라고 봐준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한쪽 팀은 여자 아이가 골키퍼를 했는데, 그렇다고 슛을 약하게 때리지 않았다. 누구나 열심히 공을 쫓아 다녔다. 남녀의 구분은 없었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있는 것으로 보건대, 학교가 끝난 후 같은 반 아이들끼리 축구를 하는 듯했다. 선생님도 없고 감독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남녀가 함께 축구를 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도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과 함께 축구하는 모습을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한두 명이 남자들 틈에 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남자처럼 축구를 했다. - ‘남자처럼’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자 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이 남자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톡홀름의 여자 아이들은 여자처럼 축구를 했다. 같이 축구를 한다는 게 중요하지, 어떤 모습으로 하는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러한 문화적 충격은 3박 4일 동안의 여행 내내 이어졌다. 스톡홀름에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는 남녀 화장실의 구분이 없었다. 내가 방문한 모든 식당과 카페와 백화점의 화장실에도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남녀공용 화장실이 있을 뿐이었다.     


 스톡홀름의 화장실 정책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낮은 칸막이를 가운데 두고 – 그 마저도 없는 경우가 많지만 – 소변기에 볼 일을 보는 것은 남성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남자에게도 한 칸의 사적인 공간이 허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톡홀름의 화장실에는 남자용 소변기가 없었다. 변기가 하나 놓여 있고 발목 아래와 천장 부분이 개방된, 공간이 좁은 칸막이가 여러 개 늘어서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변기와 세면대가 함께 놓여 있는 넓고 쾌적한, 집안의 화장실 같은 실내 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화장실을 집안의 것처럼 꾸미면 공간의 제약상 여러 칸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객실이 10개쯤 있는 게스트하우스 한층에 화장실 3개(즉 변기가 3개),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버거킹 매장에 화장실 2개(즉, 변기 2개), 몇 백 명이 모여 있는 커다란 카페에 화장실 3개. 물론 모두 남녀공용이었다.     

스톡홀름 시내에 있는 백화점 지하의 화장실 표시

 

 화장실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줄을 서는 게 당연했다. 남녀가 같은 줄에 서서 기다렸다. 화장실 줄은 점점 길어질 수밖에 없고, 기다리는 시간 역시 길어졌다. 어떤 사람은 화장실 줄에 서서 여유롭게 책을 읽었다. 그 모습이 아직까지 인상 깊게 남아있다.     


 스웨덴은 이상적인 국가였을 뿐만 아니라 이상한 나라였다. 그곳의 화장실 시스템은 비효율성의 극치였다. 소변기 몇 개만 두면 금세 해결할 수 있는 일을 20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장애인과 어린이용 화장실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스톡홀름 사람들은 규칙을 잘 지키지 않았다. 서슴없이 무단횡단을 했다. 커다란 트럭이 달려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운전사도 규칙을 지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을 쓰윽 보면서 횡단보도를 통과했다. 신호등에는 차량의 정지를 명령하는 빨간불이 오래전에 들어왔음에도 말이다. 짧은 스톡홀름 여행에서 “선진국 = 규칙을 잘 지킨다”는 공식이 완전히 깨졌다.   

  

 스톡홀름 사람들은 표정이 어두웠다.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퇴폐적인 우울함’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토록 삶에 진지하다는 독일 사람들조차 따라갈 수 없는 우울함이었다.


 혼자 걷는 사람은 물론,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 역시 웃으며 길을 걷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조차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웃으며 걷는 사람은 성별과 연령에 관계없이 오직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뿐이었다. - 그만큼 ‘Love Affair’가 중요한 게 아닐는지.     


 내 앞에서 길을 걷던 사람이 갑자기 바다로 뛰어 들어도 놀랄 것 같지 않았다. - 바다 옆 길에는 난간이 없는 곳이 많았다. - 전 세계 자살율 2위 국가다웠다.


 스톡홀름에서는 모든 행동과 선택에 있어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고(왜냐하면 어떤 행동과 선택을 해도 존중받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죽음 앞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지 않던가. - 그런 스웨덴보다 자살율이 두 배 높은 세계 1위의 국가가 우리나라이다.     


 그럼에도 스톡홀름 사람들은 친절했다. 정확히 말하면 친절하다기 보다는 관대했다. 삶을 초월한 사람의 관대함이었다. 타인의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에 연연하지 않았다. 타인과 직접 부딪히기 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른 말로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했다. 타인이 어떻게 사는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도 힘든데, 타인을 생각할 여유가 있겠는가. - 서유럽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완견(역시 타자이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스톡홀름은 이중적인 매력이 있는 도시였다. 자유와 평등이 각기 극한을 달리면서 공존했다. 나는 그 속에서 나의 극한을, 퇴폐적인 우울함을 맛보고 싶은 깊은 충동을 느꼈다.


 인구 100만 명인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대의 도시를 떠나는 비행기에서 나는 다른 형태의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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