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일. 나는 그런 일을 반가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조심하고 미리 준비하고 안정적으로 상황이 유지되는 것을 누구보다 바라며 살아왔다. 어렸을 땐 사소한 것에도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엄마에게 자랐고 조금 커서는 출근했던 아빠가 갑자기 쓰러져 하루아침에 이별을 겪기도 했다. 서른이 다 되었지만 나의 불안은 더욱 높아졌고 미리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계획하는 완벽주의 성향은 더 강해졌다.
인간에게 불안이란 살아가면서 뗄래야 땔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미완성의 존재로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이 높은 편이었다. (궁금해서 TCI 기질 검사도 해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예기불안 항목에서 100점이 나왔다. 세상에...) 살면서 어떤 일이든 충동적으로 행동하지도 결정하지도 않았고 맡은 일은 이러나저러나 꾸준히 해나갔다. 나에게 안정이란 예측되는 삶을 의미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시작한 일을 올해 서른이 되기까지 꾸준히 이어갔고 같은 곳으로 출퇴근하며 꽤나 비슷비슷한 안정적인 일상을 살아갔다.
그런 내가 불현듯 제주에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타지살이를 결정했다. 2년간 만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결혼을 하면서 타지살이를 결심한 것. 그렇게 평생에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타지살이, 게다가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로 훌쩍 떠나게 되었다. 항상 심사숙고하며 조심하고, 삶의 모든 변수들에 안절부절하던 내가 갑자기? 어쩌면 가장 불안해 보이는 이런 선택을 해버린 것일까. 스스로의 선택에 나조차 의아해하던 찰나. 지인이 추천해준 책의 한 부분을 읽다 무릎을 탁 쳤다.
'어려서는 별 대가 없이도 넘치도록 주어지던 설렘과 기대 같은 것들이 어른이 되면 좀처럼 가져 보기 힘든 이유는 모든 게 결정되어 버린 삶을 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벌 수 있는 돈,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 등이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으면 대개 정해져 버린다. 장차 여행은 몇 나라나 더 가 볼 수 있고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으며 내 힘으로 마련할 수 있는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 일지가 점점 계산 가능한 수치로 뚜렷해지는 것이다. 남은 생이 보인다고 할까. (중략) 그게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 해도, 그런 작은 변화의 여지라도 있어 내 남은 생이, 내 몸과 마음이 이대로 정해져 버리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는 노력할 거다. 언제까지고 결정되지 않을 삶을 위하여.'
- 이석원 [언제 들어도 좋은 말]
나는 왜 모든 것이 정해져 있기를 바랐었나?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굴러갈지 손에 잡히길 바랬다. 그래야 겁나지 않고 흔들릴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만 살다 보니 불안과 두려움은 점점 커져 겁쟁이가 되어갔고 나의 일상과 미래마저 너무 뻔하게 그려져 답답했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커다란 챕터, 그다음 장으로 가기 위해 이런 결정을 했구나. 서울 토박이인 내가 엄마 곁을 떠나고 싶지 않던 내가 안정된 삶을 소원하던 내가, 아무것도 예상되지 않는 제주로 훌쩍 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함과 동시에 설레고 가슴 떨리는 삶으로 가는구나. 결정되지 않아서 불안한 게 아니라 그렇기에 자유로운 삶, 예상되지 않아서 기대되는 삶으로 말이다. 모든 게 예상되는 대로 흘러가길 바랬던 내가 이제 당신과 함께 아무것도 예상되지 않는 삶으로 뛰어든다. 인생 2막, 나 또한 언제까지고 결정되지 않을 삶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