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와 구원>에서 발견한 환대 신학
세상에는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알게 되는 책들이 있다. 예를 들면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와 같은 책. 한 번도 들춰본 적이 없지만 내용을 대충은 알 수 있다. 제목이 내용 요약을 너무 잘해서 그렇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선물로 받은 <환대와 구원>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용이 예측이 안된다. 제목에 들어있는 ‘환대’라는 단어부터 익숙하지가 않다. 여기에 구원은 또 무슨 관계가 있지? 구원받았으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구제를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일까? 보통 저자를 알면 문체나 어조 정도는 기대할 수 있다. 존 스토트, 유진 피터슨 같은 유명한 저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저자도 낯설다. 조슈아 지프? 처음 들어봤다. 이 모든 조건들로 인해 책을 펼쳐보지 않으면 내용을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단순히 무슨 내용인지 확인해보려고 책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는 성경해석의 신세계를 보게 되었다.
사실 ‘환대’라는 주제는 나와 같은 일반적인 신자들에게는 낯선 것이 사실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신앙생활 혹은 교회생활을 한 나부터 그렇다. 그동안 내가 소속되었던 많은 교회 및 기독교 관련 단체들에서도 이 주제를 자세히 들어봤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구원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차고 넘친다. 봉사나 기부에 대해서도 많이 들었다. 많이 나아가면 정치 및 사회참여 정도랄까. 그런데 환대는 잘 들을 수 없었다. 성경에서 가끔 나오는 훈훈한 장면으로 소개될 뿐이지 사도신경과 같은 이른바 핵심 교리에 비해서는 부수적인 주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환대는 행위에 속한다. 저자는 클레멘스1서를 인용하면서 구원이 ‘믿음과 환대’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책의 원제 자체가 <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이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니! 행위구원은 전통적인 장로교에서는 이단적으로 여기는 교리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신자들에게는 환대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메시지가 더더욱 낯설 수밖에 없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면 좋고 안 해도 무관한 옵션 정도가 아니라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하는 데에서 이 책의 메시지는 혁명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창세기부터 복음서를 거쳐 사도들의 서신과 초기 기독교 문서(클레멘스1서)에서 일관적으로 환대를 구원에 결정적인 요소로 말하는 것을 보여 준다. 환대야말로 “성서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핵심“(p. 247)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다. 실제로 저자를 따라서 성경 속을 여행해보면 정말 환대가 성경 전체적으로 나타나 있고 구원과 떼려야 뗄 수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외인들에 대한 환대가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주장은 정당화할 필요가 거의 없다. 결국 성서의 첫 부분부터 우리는 환대하는 아브라함(창 18:1-8)과, 교회를 향하여 외인들에 대한 환대를 권면하는 사도들(예컨대 다음 구절들을 보라. 롬 12:13; 히 13:2-3; 딤전 3:2; 딛 1:8; 벧전 4:9), 그리고 자주 교회들이 순회 선교사들을 극진하게 맞이하고 환송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장면을 만난다(예컨대 롬 16:23; 골 4:10)을 보라). (p. 23)
성경에서 소개하는 이런 환대의 사례 중에 무엇보다 예수의 삶이 환대의 극적인 예임을 저자는 또한 강조한다.
예수는 아무런 구별 없이 “타자”에게 신적 환대를 베푸는데, 이는 예수가 죄인과 종교인, 남자와 여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환영한 데서 예시된다. 예수는 어떠한 우려나 두려움도 보이지 않고서 사회에서 낙인찍힌 자들과 어울렸다. (p. 46)
예수께서 보이신 모든 사역 중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환대의 극치를 보여준다. 예수님 자신이 떡과 포도주가 되어 하늘의 잔치에 죄인들을 초대하신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절정이라고 이해되는 만큼 이는 동시에 환대의 절정이기도 하다. 이처럼 환대의 관점으로 예수님의 모든 궤적을 살펴보면 그는 살아계신 기간 중에도 늘 환대를 하셨고, 죽으면서도 환대를 베푸셨으며, 부활하셔서도 제자들을 조반에 초대하심(요 21)으로 모든 순간 환대를 하셨다. 그리고 그의 환대를 받은 사람들, 그를 환대한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다.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기성 신학이 이해하듯이 예수에 의한, 예수에 대한 환대는 구원의 유일한 길인 것이다.
또한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하신 말씀에서도 환대와 구원이 직접 연결되어있음을 추가로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영접하는 마을에 구원이 있을 것이고, 영접하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하라고 하신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8-12, 개역개정)
낯선 주제의 책이었지만 표지를 열고 마지막 책장을 덮기까지 내내 이 책을 읽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환대’라는 성경을 읽는 새로운 안경 하나를 하나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안경으로 성전이나 언약, 계시, 선교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런 안경들을 내 머릿속에 여러 개 가지고 있으면 좋은 것은 같은 성경 본문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어서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런 안경을 하나 더 준 것이다.
이 안경이 유용한 이유는 그동안 다른 안경으로는 잘 해석이 되지 않던 이야기들을 해석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세 사람(혹은 하나님)을 적극 맞이하여 대접하는 사건이 있다. 한 장을 할애할 정도로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한지는 기존 안경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환대의 안경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환대했기 때문에 이삭을 언제 누구를 통해 얻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마 25:31-46)도 해석이 어려운 구절 중 하나다. 그냥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말씀만 잘 실천하면 되지 않는가? 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환대한 사람은 영생에, 그렇지 않은 자는 영벌에 처해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환대의 안경을 적용하면 환대라는 행위가 영생으로의 구원과 긴히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며 쉽게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용의 오리지널리티에 불균형이 있다는 점이다. 서문으로부터 시작해서 누가-행전을 다룬 1장까지는 메시지가 뚜렷하고 알차다는 느낌이 있다. 마치 저자의 전공분야라는 느낌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아마존에 등록된 저자의 5권의 저서 중 누가-행전을 다룬 책이 1권, 사도행전만 다룬 책이 1권이다. 그 외에는 신약 전체를 다룬 책이 1권, 바울서신을 다룬 책이 1권이다. 나머지 1권이 바로 본서이다. 누가-행전을 1장으로 전면 배치한 이유가 보이는 부분이다.
2장 바울서신과 3장 요한복음의 내용은 주로 다른 학자들의 글의 인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독자적인 주장이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용 자체가 부실하거나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은 아니다. 바울서신에서 강조된 환대를 다룬 2장은 교회 내의 다양한 구성원들끼리 환대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등 중요한 주장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다룬 1장이나 2부 <인간의 환대>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다소 선명하여 상대적으로 무디다는 느낌이 든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 신명기 10:19
책은 이론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반부 ‘신적 환대’인 1부가 성경과 문헌 속에서의 성경신학적 논의였다면 후반부인 2부는 이를 넘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서 환대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여기서 다뤄진 사례들은 문화 속에서 주인의 입장에서 손님을 환대하는 방법, 반대로 문화적 손님의 입장에서 주인들을 대하는 방법, 혹은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이 있다. ‘환대’라는 안경은 성경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이민자 이슈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한 챕터를 할애한다. 저자는 교회와 신자는 영적인 이스라엘로써 하나님께 환대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민자를 포함한 외인에게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고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민자 이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환대하는 입장에 서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이주민·체류자·손님이며 또한 하나님의 환대로 자신들의 존재가 유지되고 있는 백성으로 정의하게 해 준다. 하나님은 이민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위에서 다룬 성서 텍스트들은 끊임없이 외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외인의 마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려가 외인을 환영하는 근거라고 말한다. (pp. 247-248)
이민자를 환대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단순히 “환대하라”는 명령을 하고 마는 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실제적인 행동을 바로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저자는 민주주의 속 유권자들인 독자들에게 작은 행동부터 시작하기를 촉구한다. 먼저는 성경적인 이민자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을 지지하라고 한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관련 정책과 법을 공부하기를 권한다. 더 적극적으로는 해당 분야의 목소리를 내는 단체나 이민자에게 도움을 주는 단체에 자원봉사를 하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효과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조언은 많은 고민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저자가 얼마나 이론부터 실천까지 고심하고 책을 저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우연히 선물로 받게 되어 읽게 된 책이었지만 나에게 준 영향은 컸다. 기존에 배워온 신학의 구멍을 채워줬기 때문이다. 기존의 신학에서는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신칭의로 대변되는 주류 신학에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여 믿게 하는 것이 이웃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불리는 진보적 복음주의에서는 구조적인 사회악을 고쳐서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이웃사랑이라고 한다. 허나 이 두 가지 신학은 변화된 내가 중심이 되어서 이웃을 끌어당겨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비해 환대 신학은 이웃의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여 그들을 중심에 두고 내가 나를 죽기까지 변화시켜 이웃을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이었던 나와 교회를 구원하신 방법이고, 같은 방법으로 나와 교회가 이웃을 환대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말한다.
저자도 크리스틴 폴을 인용하며 환대신학이 기존 신학의 부족한 점을 채운다는 것을 지적한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가난과 복지, 포함과 다양성, 희소성과 배분에 관한 현재의 많은 논의들이 일관성 있는 신학적 틀이라는 유익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종종 가장 심오한 기독교적 가치와 헌신들이 복잡한 사회 공공 정책 사안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일종의 틀로서의 환대는 우리의 신학과 일상과 삶 및 사안들을 연결하는 다리를 제공한다. (p. 32)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하나님과 자기의 신앙과 이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렇게 함으로 그동안 교회 안에서 잘 듣지 못했던 ‘환대’라는 주제를 다 같이 생각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환대라는 새로운 안경을 얻어서 성경을 더욱 풍성하게 해석하는 경험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읽고 생각하는데에서 멈추면 안 된다. 책이 신학에서 끝나지 않은 것처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번역서의 한계 상 한국교회의 상황에 맞는 환대의 실천방법이 책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이 공백을 한국의 신자들이 한국교회가 처한 환경에 맞게 연구하고 채워야 한다. 개인의 삶 속에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환대는 무엇이 있을지, 투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지역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직은 막연한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족으로, ‘환대’라는 단어가 낯선 이유를 하나 더 꺼내본다. ‘환대’라는 개념을 교회에서 접하기 힘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환대’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 생활 속에서 비교적 잘 쓰이지 않는 탓이 크다. 실제로 저자가 조명한 성경 속 장면들에서 ‘환대’의 자리에 ‘대접’을 넣으면 더 자연스럽다.
‘대접’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친근하다. 우리는 손님을 ‘대접’한다고 한다. 윗사람을 ‘대접’하기도 한다. ‘대접받는 느낌’이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환대받는 느낌’은 비교적 잘 쓰지 않는다. ‘환대’보다는 ‘대접’이 책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문화적으로 적절한 단어인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 ‘환대’를 ‘대접’으로 바꾸어 읽으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 글에서도 ‘환대’와 ‘대접’을 등가로 치환하며 읽을 수 있다. (그래도 책 제목이 <대접과 구원>이라면 어딘가 어색할 것 같긴 하다.)
이와 함께 성경에 자주 나오는 ‘영접’도 ‘환대’, ‘대접’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사실 ‘영접’은 ‘환대’보다 더 우리의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기 때문에 뜻이 와 닿지 않는다. 그동안 잘못 알려진 탓도 있다. 그 유명한 구절인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때문인지 ‘영접’은 ‘그 이름을 믿는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렸다. 초대하여 대접한다는 의미를 생각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므로 ‘영접’ 또한 ‘대접’으로 바꾸어 읽는다면 성경이 원래 의도한 뜻을 더 잘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