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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나 Feb 17. 2022

프롤로그_도망, 그거 한 번 해보니 썩 나쁘지 않더라

[오늘은 도망가겠습니다] 김새봄

처음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열아홉 살, 입시 미술 학원에서였다.


고향 미술 학원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아이였던 나의 우물 위 동전 만한 하늘이 산산 조각 난 수능 직후의 11월. 실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입시 특강을 위해 올라간 서울 미술학원 아이들의 그림에 비해 눈에 띄게 멀겋고 엉성한 내 그림을 보며 재수를 직감 했을 때. 두번째는 재수를 해 들어간 미대의 마지막 학년 5월. 졸업 작품전과 2개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중 전화를 받고 달려간 병원에서 엄마가 누운 중환자실 문 앞에 선 의사에게 10만 분의 1의 확률로 발병한다는 희귀병의 생소한 병명을 들었을 때. 세번째는 기운 집을 온 몸으로 받쳐내려 한 겨울에도 얼굴이 검게 타도록 일하는 아빠의 바짝 마른 팔다리일랑 눈 감아 넘겨버리고 내 욕심을 채우자고 진학한 대학원 1년차의 12월. 등록금을 깎으려 지원한 미술관 조교 자리와 생계를 위한 2개의 아르바이트에 치여 연구주제 선정이 늦어지는 내게 “집에 돈도 없는 게 대학원은 왜 왔냐” 묻던 지도교수님과 마지막 상담을 했을 때.


견디고 인내하는 것에는 임계점이 있다. 서서히 끓어오르다 한계에 다다르면 기화되고, 결국 사라진다.  재도 남기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서서히. 그저 버티고 견뎌 내는 것이 책임을 다 하는 것인 줄만 알아 5년 새 몰아치는 세 고비를 넘기는 사이 나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하고싶은게 무엇인지 까맣게 잊은채 해야 하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한계점을 지나치는 줄도 모르다, 손 끝까지 녹진해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온몸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고서야 희미해져 가는 ‘나’를 알았다.


‘도망가 보자’ 교내 순환버스의 마지막 차도 끊긴 늦은 시간 대학원실 문을 잠그며 생각했다. 절벽 끝에 섰어도 아직 떠밀린건 아니니 도망 갈 수 있을 때 꽁무니 빠지도록 내 달려 보자. 도망치는건 무책임하고 부끄러운 짓이지만 감당치 이상의 것들을 짊어지려는 객기 끝에 결국 주저 앉는 것 보단 나을지도 모르니.  가로등이 띄엄띄엄한 학교내리막을 걸으며 휴학을 결정하고 일 자리를 찾았다. 당장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금전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돌리다 한두해 몫돈을 모아 학교로 돌아간 후 학업에만 집중해 석사 학위를 따는게 원래 이 도망의 목표였다.


그런데 이게 왠일일까, 꽁무니 빠지게 도망쳤으니 삶에 졌다 손가락 질 받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 하게 일이 잘 풀린다. 코로나19로 일자리 찾기가 막막한 와중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라도 구할 수 있을까 싶었더니 운 좋게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무렵 전공을 살려 공공기관에 취업했고 살짝 얼이 빠진 상태로 사무실에 앉아 온라인 휴학 신청서를 냈다. 1년짜리 계약직이었지만 당분간 먹고 살 걱정을 덜었다는 것만도 감사한데 사무실 식구들은 모두 친절하기까지. 사랑해 마지않던 전공관련 업무는 맞춘듯 잘 맞아 아주 간만에 일을 하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으며 회사 근처로 새로 구한 자취방의 집 주인 어르신은 사회 초년생인 나를 긍휼이 여겨 월세 인상 없이 보증금 100만원을 깎아 주신단다.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규칙적인 수면 시간과 제 때 챙겨먹는 삼시세끼는 고질적인 우울증과 소화불량을 거짓말 처럼 낫게했고 정해진 날짜에 들어오는 정확한 금액의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월세나 공과금 걱정에 발 굴릴 일 없이 자그마한 적금을 들고도 남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한끼 대접하는데 인색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기화되어 가던 몸과 마음이 서서히 형태를 되찾아 ‘나’를 일궈갔다. 해야만 하는 일들이 아닌 하고픈 것들을 할 수있게 된 저녁 혹은 주말이 오면 까마득히 잊고 있던 홀로 다녀오는 산책을 좋아하고 자늑자늑한 문체의 소설이나 배낭 하나만 메고 떠나는 여행기에 열광했던 내가 다시 찾아왔다. 영어 회화 배우기, 조조 영화 보러가기, 그림자가 짧은 시간부터 나만 아는 조용한 해변에 가만히 앉아 두 섬 사이로 해가 기운 후 차가운 보라빛에서 시작해 뜨거운 주홍빛으로 끝나는 박명이 나타나길 내도록 기다리기 등 좋아하는 것도, 하고픈 것도 많았던 나.


운이 아주 좋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새 1년이 지나 계약 조건을 바꿔 직장에 오래 남게 된 내가 원래의 목표였던 학업으로 부터 몸과 마음이 많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 역시. 어쩌면 목표를 이루지 못 했으니 이건 실패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도망, 그거 한 번 해 보니 썩 나쁘지 않더라 말 하고싶은 것은 도망친다 해서 삶에 패배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싶어서.  상황에는 졌을지라도 아직 삶에 지지는 않았다. 당장의 버거움을 모면하고자 도망치면 결국 아무것도 될 수 없어 좋아하는, 하고픈 모든 것을 놓치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맹목적인 믿음과 책임이 굴레가 되어 원치 않는 곳으로 삶을 이끌었고 오물을 뒤집어 쓴 기분으로 친 줄행랑이 그렇게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들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도망이란 패를 자주 꺼내다 보면 결국 삶에 지게 되겠지만 나의 도망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상황에선 이다끔씩 비장의 카드로 꺼내들 수 있지는 않을까. 비장의 카드는, 정말 위기의 순간에 나 살자고 쓰는거니까.


그래서 이토록 장황히 변명이라면 변명일 수 있고 변호라면 변호인 도망 경험담으로 책의 첫장을 시작하려 한다. 이 책은 극적으로 기한에 맞춰 실적보고서와 연말 정산을 막 끝낸 직장인이 어느 겨울날, 마찬가지로 학회가 겨우 끝난 10년지기 대학원생 절친과 갑작스레 떠난 일상으로 부터의 도피 여행기이자 도망 옹호론기 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나면 도망, 그거 썩 나쁘지 않다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2022년 2월


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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