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도망가겠습니다] 이선영
안녕, 봄아.
나는 방금에서야 니가 구례 여행의 시작에 선물해준, 니를 닮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났어.
구례에서의 우리 방에 막 들어갔을 때 내게 건네주었던 책 말이지.
회색끼 도는 옅은 분홍색 봉투에 담긴 편지와 함께 나한테 전해진 책에는, 너의 마음이 커다랗게 담긴 것이 느껴져 쑥스럽기도 했던 것 같네.
너는 이 책을 쓴 작가가 ‘자늑자늑 물드는 사람이 뭔지 아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지.
나는 ‘자늑자늑’이라는 말이 생소하여 검색을 해봐야 했어.
동작이 조용하며 가볍고 진득하게 부드럽고 가벼운 모양.
자늑자늑 사람을 물들이는 글을 쓰는 작가가 세상에 띄워 보낸 이 책은 너를 참 닮았어.
너라는 친구와 도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동행을 함께할 수 있어서 구례에서의 나는 온전히 행복했단다.
고마워.
선영이가.
한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늦은 가을, 이른 겨울 쯤의 어떤 하루였다.
나도, 다른 이도, 그 누구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모든 일이 엉망진창으로 꼬여 버린 날에 나에게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나는 바쁘다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하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때 카카오톡, 인스타그램과 같은 메신저 어플을 잘 확인하지 않는다. 기본 메세지 어플 말고는 알람마저 꺼놓고 사는지라 와장창 놓치기가 일쑤다. 그 즈음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 정신이 없었고 몸과 마음이 힘들어 메세지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나 보다. 김새봄으로부터 한 통의 메세지가 도착했고 그제야 김새봄의 카톡을 며칠째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영아 전화 되니? 나 문득 너랑 하고싶은 단기 프로젝트가 떠올랐어.]
울음을 목젖까지 한껏 우겨 넣어 무거운 몸뚱아리를 방으로 끌고 가고 있었는데, 할 수 있는 만큼 목소리를 높여서 괜찮은 기분인 척 하면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 김새봄의 목소리에는 그 때의 나따위가 흉내낼 수 없는 들뜸이 몽골몽골 맺혀 있었다.
- 선영아, 나 니랑 하고 싶은 재미있는 일이 생각이 났어!
나는 얘기해 달라고, 재미있는 일이 도저히 없어서 지금 재미란 내 인생에 너무 필요한 거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김새봄은 ‘도망’을 가자고 했고 나는 울음을 온사방으로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있잖아, 어떻게 하필 지금 그런 얘기를 하냐. 나 사실 오늘 나 진짜로 너무 도망가고 싶은 하루였다, 봄아.
입술을 옴싹달싹도 하기 힘들 정도로 지쳐있었는데 주체할 수 없이 터진 울음은 얼마나 끈적끈적했는지 그 날 하루의 모든 일과 기분을 잔뜩 묻히고 쏟아져 나왔다. 그 날 김새봄의 메세지 한 통은 나를 드러운 하루에서 건져줬다. 한참을 꺼이꺼이 울고 모든 감정의 폭발이 끝나고 내 마음에 약간의 공간이 생기고서야 근데 무슨 도망? 하고서 물을 수 있었다.
김새봄은 그냥 지금 우리가 도망치고 싶은 것들로부터 도망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을 하고 글을 쓰자면서 얘기했고 나는 기꺼이, 그리고 간절하게 좋다고 했다. 도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구례로 도망다녀 온 뒤에도 그 동행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구례에서 돌아온 뒤 나에게는 인생에 큰 물결을 일으킬만한 몇몇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한 일들이 항상 그렇듯이 걔네는 얄밉게도 갑자기 예고 없이 내 인생에 찾아 들었고 아직은 천천한 마음으로 소화중이다. 소화가 끝나면 나는 또 도망갈 거다, 지금보다 더 큰 마음을 가지고 더 멀리 멀리. 피슝 도망갈 추진력을 얻기 위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일을 많이 할 거다. 에필로그를 쓸 때 쯤이 되면 나는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감정의 섬 위에 서있지 않을 거다.
2022년 2월
이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