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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나 Feb 23. 2022

01. 이유없이 좋은 곳 혹은 그런 사람

[오늘은 도망가겠습니다] 김새봄

 오래된 백팩을 꺼냈다. 속옷과 양말, 내복 한 벌, 간단한 세안도구, 두 권의 책, 무인도 까진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곳엔 날 따라다니는 손에 익은 고데기가 전부인 단촐한 짐에 배가 부른 가방을 등에 업자 겹겹이 껴 입은 겨울 옷 덕에 완만해진 어깨선을 따라 가방 끈이 자꾸만 흘러 내려 결국 현관 앞에서 다시 끈 길이를 조정해야 했다. 이십대 후반에 들어서며 추운 것을 조금도 견딜 수 없게 돼 손 끝까지 감추려 낀 뜨개장갑에 둔해진 손가락이 늘 하던 일임에도 굼뜨게 시간을 잡아 먹는다. 버스 출발까지 여유를 충분히 둔 상태였지만 들뜬 마음은 벌써 저만치 나서있어 기다림이 어렵단다. 조바심에 동동이는 마음이야 잠시 밀어두고 자취방 현관 문의 오래된 도어락이 제대로 잠겼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서야 꽁꽁 여민 긴 밤색 코트 아래로 보폭이 좁아진 다리를 재게 놀릴 수 있었다. 나는 키는 작은 대신 걸음이 아주 빠른 편인데, 흥분 할 수록 점점 빨라진다. 지하철 역까지 천천히 걸으면 10분, 빠르게 걸으면 5분. 그 거리를 4분만에 도착하는 동안 손과 눈은 분주히 휴대폰 화면 속 버스 예매 어플을 확인했다. 예매 정보가 절대 틀릴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지난 1주일 동안 보고 또 보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으니.

 부산 서부터미널, 오전 10시 출발. 승차 홈 번호와 좌석 번호를 한 번 더 곱씹으며 지하철 의자에 앉아 가방을 고쳐 안았다.

 나는 지금, 도망가는 중이다.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일상의 권태와 그가 함께 몰고오는 안주로부터.

 규칙적인 생활이 가져다 주는 안정감은 감사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안주와의 경계가 몹시도 옅었고 규칙적인 것은 정해진 시간과 행위가 예상 범위 안에서 반복 될 뿐, 그 시간 속 밀도가 빽빽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 생존 운동격인 필라테스를 다녀와 다음 날 점심 도시락을 싸고 남은 부산물(계란말이의 끝부분이나 터진 김밥 같은 것)로 늦은 저녁을 해결. 설거지는 바로, 빨래거리가 없으면 감사한 날이니 방 청소 후 샤워. 그럼 시계는 벌써 하루를 두시간도 채 남겨두지 않았는데 이대로 발전 없는 하루를 끝낼 순 없다는 오기로 영어 회화 강의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러고 나면  일주일 전부터 같은 페이지에 책갈피를 물고있는 소설책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땐 정말이지 기진맥진, 책 표지를 넘길 힘이라도 있으면 다행이기에 보통은 마취총을 맞은 고라니처럼 모로 누워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을 따라 여행하다 추하게 입을 벌리고 잠든다.

 어찌보면 평화로우나 들여다보면 권태로웠으며 업무 외에 개인으로서의 성취가 없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더불어 코로나로 인해 밀려있던 회사 일정들이 그놈의 ‘위드 코로나’라는 슬로건을 걸고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며 주말 반납도 빈번했던 초가을 부터 한겨울 사이엔 나를 위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행위마저 지난해져 종래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는 것 마저 피곤해지더라. 엄마는 어떻게 일도 하고 애도 키우고 살림도 했지? 점점 길어지는 평균 수명과 그에 비례하는 은퇴 시기를 고려했을 때, 난 적어도 40여년은 더 일을 해야 할테고 더욱이 비혼, 독신주의라 가사노동을 나눌 가족구성원도 없을 예정인데. 그말인 즉슨 일흔이 다 될 때 까지 이와 비슷한 먹는 것도 귀찮아질 일상이 지속 될 거란 말인가. 근데 뭘 위해 40년을 그렇게 살아야하지?


고라니마냥 누워 있으면 보이는 방의 풍경.


 부정적인 생각들은 지독한 기회주의자인데다 결속력까지 높아선, 추운 계절을 틈타 먹구름 마냥 커지며 안그래도 날카로운 신경에 번개를 쏘고 비를 뿌려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만 26년을 사는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한 목표를 찾지는 못 했지만 저 먹구름을 몰아 낼 방법 정도는 알아내 체화시켜 뒀다. 보통의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은 정수리에 햇빛을 쐬 주면 사라진다.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직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정신과 의사들이 우울증 환자들에게 정기적인 운동과 지속적인 산책을 권하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햇볕은 마음 속 응달까지 온기와 빛을 뻗어 음습함을 증발시키고 속에 핀 곰팡이를 제거하는데 있어 아주 효과적인 살균제 역할을 한다. ‘볕을 쐬러 갈 때가 왔구나’ 마취총을 맞은 고라니처럼 누워 생각했다.

 2021년의 모든 것들이 겨우 마무리 되고, 2022년도 교부금 신청서 제출 마감일까진 어느정도 여유가 남은 12월 말, 잠시간 숨 돌릴 틈을 타 계획을 세웠다. 볕을 쐬러 도망감과 동시에 돌아 온 후 40년 까진 아니더라도 1년간의 열심히 살 목표이자 낙이 되어줄 프로젝트의 초안을. 2021년 버킷리스트 중 이루지 못 한 두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론 일상과 떨어져 오롯이 나일 수 있는 곳으로 떠나 가만히 커피를 마시고 좋아하는 이와 조곤조곤 실 없는 얘기를 나누다, 잠이오면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 찌뿌둥해진 몸을 한바퀴의 동네 산책으로 풀어주는 느리고 게으른 여행 떠나기, 두번째는 어떤 주제로든 독립 출판물 내 보기. 두 꿈은 꿈꾸는 이가 같아서인지 부드럽게 섞여들었다.

 당장 이 명분있는 도망을 기꺼이 함께 해 줄만한 이에게 연락을 취했다. 상대는 작년부터 나와 독립출판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으며 작년 12월 기준 대학원 1년차로 안 물어도 도망이 절실한 상태일 것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해 도망을 가자니 펑펑 울면서(진짜 울었다.하필이면  전화 한 날이 그녀에게 절실히 도망가고 싶었던 날이란다.) 좋다고 그런다. 하고싶은 일을 할 때만 타오르는 나의 추진력에 불이 붙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국장님께 달력까지 짚어가며 교부금 신청서 제출 후 주말을 낀 2박 3일간의 연차를 허락 받았고 숙소를 알아본 후 크리스마스를 간절히 기다리는 독실한 크리쳔 집안의 아이같은 심정으로 몇 주를 기다린 끝에 디데이 날 승객이 드문 시외버스 맨 앞자리에 몸을 실었다. 도망이란 이름에 걸맞는 대우를 위해 돌아오는 차표는 예매하지 않은 상태. 도망 가는 사람이 돌아 올 일을 생각 하고 가는 거 봤는가? 물론 시작 부터 2박3일로 정해진 일정이다만 기분은 그게 아니라는 거다. (실은,  이번 도망지는 겨울엔 사람들이 좀 처럼 찾지 않는 곳이라 굳이 예매를 하지 않아도 부산으로 가는 차표를 마지막 날 현장에서 구할 수 있을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버스 안에서 본 섬진강.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 대단한 명분을 입은 도망의 목적지가 어디냐면,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2시간 30분 쯤 서쪽으로 달리면 보이기 시작하는 곳. 굽슬대는 야트막한 물줄기가 사시사철 햇빛에 물비늘을 반짝이고 그 물비늘 보다 뽀얗고 입자고운 황설탕같은 모래밭이 물줄기를 닮아 폭은 좁지만 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섬진강.

 섬진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은 햇수로 10년 전이다. 6월 모의고사가 막 끝났던 초여름에 떠난 가족여행. 오롯이 받고 서 있으면 분명한 열감을 머금고 있긴 했지만 따갑고 공격적이지는 않았던 해를 등지고 맨발로 걸었던 모래밭의 미적지근한 알갱이들이 발가락 새를 파고 들었던 촉감이 아직 선명하다. 그 모래밭에 발을 부비고 난 후, 한동안 나를 몹시도 괴롭히던 티눈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아무도 믿어주진 않았지만 섬진강 모래의 영험함을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녔던 일도.

 모래밭도 모래밭이었지만 내겐 섬진강 그 자체가 새롭고 산뜻했다. 포항에서 자라 동해 바다로 곧장 이어지는 폭이 아주 넓고 파도가 치며, 그 주변엔 거대한 제철 공장이 들어 서 있던 웅장한 형산강이 ‘강’ 그 자체의 이미지로 박혀있던 내게 황순원의 소나기 속 소년과 소녀가 건넌 징검다리가 있을 법한 서정적인 이 개천이 섬진’강’이라니. 그 서정적인 낯선 강가에서 살짝 더울만 하면 흰 린넨 셔츠를 부풀리며 들어와 땀을 식혀주던 바람, 화개장터 앞 상인에게서 산 종이컵 속 앵두의 모양새 만큼이나 깜찍하던 시큼달짝지근한 맛, 텁텁하면서도 개운했던 재첩국. 급하게 밀짚모자를 두개를 사 머리에 그늘을 씌워준 엄마 아빠, 너른 챙 아래 초등학생이던 동생의 까무스름한 솜털이 땀에 젖어 완만한 이마에 달라붙어 있던 것 까지.

 어떤 순간이 너무 좋을 때면 기억이 아닌 오감으로 남아 각인된다. 감사하게도 행복했던 장소는 수 없이 많고 그 많은 장소엔 각각 저보다 더 대단한 순간과 이야기가 셀 수 없이 존재하지만, 어쩐지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섬진강의 순간들이 촉감, 후각, 시각, 청각, 미각으로 오롯이 남아 이유없이 좋은 곳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냥’ 이라는 모든것을 얼버무리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가끔은 ‘그냥’ 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생기기도 한다. 섬진강은 그런 곳이다. 그냥, 별 다른 이유 없이 좋기에 마음속에 오래도록 품고 있다가 기어이 다시 찾게 된 곳. 그래서 이번 도망의 목적지를 정할 때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사실 처음엔 제주를 생각하기도 했었으나 거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그저 가만히 햇볕을 쐬고 머리를 비우기엔 섬진강만한 곳이 없었고 조심스레 희망 목적지의 이름을 말 했을 때, 동행인은 선선히 그 곳을 허락했다.


좌 선영, 우 새봄. 숙소 창가의 곶감 그림자 앞에서.


 그냥이라는 수식어가 붙고야 마는 존재가 여기 또 있다. 고향 읍내에서나 볼 법한 소박한 규모의 화개 터미널에 내리자 유리 샷시 넘어 바로 보이는 발그스름한 혈색이 보기좋은 둥근 얼굴. 이번 도망의 동반자 선영이었다.

 선영과 나는 고등학교 입학 직전 아주 추운 겨울 날 당시 동네에 유일하던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서로 한다리 건너 아는 사이였고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우리 둘의 다리 역할을 하던 친구가 자리를 마련해 준 것. 발그스름한 볼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던 그 애는 처음 봤음에도 도무지 낯설지가 않아서, 우린 순식간에 아주 오래 알던 사이인 것 처럼 웃고, 쉴 새 없이 떠들다 씁쓸한 코코아 가루를 화분 심은 자리의 흙 마냥 여기저기 흩뿌려가며 서로의 포크가 맞닿는 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티라미수를 나눠 먹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자퇴를 한 탓에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기간을 길지 않지만 점심시간을 사이에 두고 연강으로 이어지던 수학시간이 시작 되기 전, 급식을 거른 채 교실에 단 둘이 앉아 당시 빠져있던 녹차맛 아이스크림을 베어먹으며 선영이 지독하게 좋아하던 조용필의 신곡을 무한 반복재생 하던 기억이 그 시절의 대부분이다. 참고로 우리는 조용필 세대가 아니다. 선영이 옛날 가수를 좋아했고 나도 당시 반 애들이 난리를 치던 엑소보단 조용필을 듣는 편이 나았을 뿐. 이번 여행에서도 그녀는 ‘거꾸로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을 무한 재생했다. 난 그게 윤도현 밴드 노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지 뭐람.

 아무튼 선영은 그런 친구다. 학교 자퇴 후 각자의 입시를 치르고 부산과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느냐고 몇년간 얼굴을 보지 못 하면서도 뜬금없이 보낸 메신저가 어색하지 않고 내가 서울을 방문 할 때나 그녀가 부산에 올 일이 있으면 으레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라는 말이 나오는. 이렇게 설명하면 우린 운명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한 몸처럼 잘 맞거나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은 친구라 예상할 지 모르겠다만, 사실 선영과 나는 이다지도 다른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로 열부터 하나까지 정반대다.

 선영은 술(특히 맥주)과 술이 가진 긍정적인 마력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매번 섬세한 시음기를 남기고 그것을 sns에 공유하거나 최근엔 맥주 관련 카드뉴스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술에 대한 열정과 간 기능이 비례하는 건지 어지간 해선 취하지 않는 반면, 나는 오늘 당장 이 세상에서 술이 단 한방울도 남지 않고 말라 버린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않은 채 한 손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절망하는 알콜 러버들을 바라보며 혀를 찰 수 있는 사람이다. 또 태생적인 알쓰(알콜 쓰레기)라, 맥주 한 병을 넘어가는 순간 부터는 혹여나 실수라도 할까 정신머리에 힘을 바짝 주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술자리의 끝은 매번 기진맥진. 내겐 가만히 앉아 체력 깎아 먹기엔 이만한 게 없다.

 그리고 또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점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눈을 빛내며 그 자리에서 묻는 선영과 이미 안내서, 설명문 등을 정독한 후라 궁금한게 없거나 있어도 나중에 따로 검색 해보는 나. 낯선 사람과의 교류에 열광하는 슈퍼 외향인 선영과 낯선사람은 커녕 알던 사람과도 교류하기를 저어하나 어째서인지 mbti는 항상 e가 나오는 세미 내향인인 나. 삶의 동반자와 가정을 꾸리고 싶어하는 선영, 내 삶이 온전히 내 것이었으면 하는 비혼주의자인 나. 드라마보단 책에 감정이입이 쉬운 선영, 책보단 드라마에 감정이입이 수월한 나. 맵고 칼칼한 떡볶이를 좋아하는 선영, 달달한 떡볶이를 좋아하는 나. 개보다 고양이가 좋은 그녀, 개를 키우니 개가 최고인 나. 홍시가 익길 기다리는 그 애, 곶감이 말라가길 기다리는 나.

 당장 생각나는 것만도 이정도로 어떤 주제를 던지든 어지간 해서는 서로 반대인데,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렇게나  다르지만 양 극점에 서서 줄다리기 하려 들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지만 선영과 나에겐 어떤 중간점이나 합의점이 없다.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술을 좋아하는 선영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캔을 꺼내오거나 위스키에 따뜻한 물을 타 자리에 앉고,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선영이 데운 물에 인스턴트 아메리카노를 타 그 맞은 편에 앉는다. 짭짤한 육포를 안주로 먹는 그녀와 인절미 맛 과자를 와삭이는 내가 오후 내도록 같은 주제로 이야기 한다.

 함께 있음이 즐거운 관계는 많으나 함께함 속에 타협 또는 내려놓음이 내제 되어있지 않아 오롯이 ‘나’ 와 ‘너’를 지킬 수 있는 관계는 드물다. 서로를 너무 배려하느라 혹은 서로의 양보를 얻어내려 눈치보는 동안 지칠 일 없으며 각자의 성향이나 취향이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마찰 된 탓에 마모 될 일도 없으니 우린 그저 양 극점에 있는 서로의 성향과 취향은 존중하다, 때론 호기심에 경험 해 보기도 하며 너는 선영, 나는 새봄이기만 하면 된다.

 분명 섬진강과 선영을 이유없이 그냥 좋은 곳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 해 놓곤 그들이 좋은 이유를 너무나 많이, 거기다 상세히 써 버린 것 같다. 그래, 섬진강과 선영을 좋아할만한 이유는 이토록 많지만 그 해 여름 섬진강 변이 그토록 화창하지 않고 비를 뿌려댔어도 나는 빗물 젖은 모래내음과 녹음의 청량함으로 그곳을 사랑했을테고, 선영이 나와 비슷한 점이 아주 많았다면 그랬기에 그 애를 사랑했을게 분명하다. ‘섬진강’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확히 어느 도에 붙었는지도 분명치 않은 그 곳의 어감이 그저 수수해 마음에 들었고 선영을 처음 만났을 때 상기되어 웃는 얼굴이 그냥 반가웠으니까.  ‘그냥’이란 말 속엔 어떤 불가항력이 포함되어있다.


이렇게, 그냥 이유없이 좋은 곳에 이유없이 좋은 사람과 도망을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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