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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도연 Jan 07. 2024

겜알못의 게임로그 #7: <바이오하자드 RE:4>

Resident Evil 4 (2023)

|타이틀| 바이오하자드 RE:4 (Resident Evil 4)

|최초출시일| 2023년 3월 23일

|개발사| Capcom

|유통사| Capcom

|구입처| App Store (Mac)

|사용기기| M2 맥북 에어 기본형, 엑스박스 시리즈 X|S 컨트롤러


드디어 <바이오하자드 RE:4 (Resident Evil 4, 2023)>에 이르렀습니다. 역대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후의 게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 <바이오하자드 4 (Resident Evil 4, 2005)>의 리메이크이자, 동시에 원작과 함께 시리즈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저는 원작 <바이오하자드 4>가 얼마나 대단한 게임이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검색을 통해서 좀 주워 들었을 뿐이지요.


굉장히 훌륭한 원작을 리메이크해서 다시 높은 평가를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바이오하자드 RE:4>는 그걸 해냈을 뿐만 아니라 2023년 최고의 비디오 게임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아무래도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애플이 M시리즈 전환 이후 <바이오하자드 빌리지 (Resident Evil Village, 2021)>에 이어 공개한 두 번째 AAA급 게임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맥 앱스토어에 공개되자마자 예약을 하고 발매일에 바로 다운로드를 했습니다. 그날 바로 시작하지는 못했지만요.


바이오하자드 4 모바일 에디션

그런데… 왠지 <바이오하자드>를 과거에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느낌이 들더군요. 좀비가 나오는 어떤 게임을 아이폰으로 잠깐 해본 것 같은데 알고 있는 좀비 게임이 <바이오하자드>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옛날 옛적 앱스토어 구입기록을 뒤져보니 역시나. 2011년에 아이폰에서 <바이오하자드 4 모바일 에디션 (Resident Evil 4: Mobile Edition, 2009)를 구입한 적이 있더군요. 하지만 제 기억이 맞다면 아마 딱 하루 해보고 그만뒀을 겁니다. 일반적인 스마트폰 포팅이 아니라, 원작의 품질을 대폭 낮춰서 일본의 갈라파고스 휴대폰(한국의 피처폰 같은 존재) 게임으로 만든 걸 다시 스마트폰 게임으로 바꿔서 내놓은 거였다 보니, 품질도 조작법이 그때 기준으로도 상당히 조악했다고 하네요. 아마 그래서 저도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죠. 다만 원작이 훌륭했던 만큼 익숙해지고 나면 제법 괜찮았다는 얘기도 있고요.


애플 제품에서 구동되는 <바이오하자드 RE:4>와 <바이오하자드 빌리지>

다소의 그래픽 타협점은 있지만, <바이오하자드 RE:4>의 풀 버전을 무려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오늘날 다시 돌아보면 여러모로 감개무량합니다. 물론 제겐 그게 가능한 아이폰 15 프로도, M시리즈 아이패드도 없지만요. M2 맥북 에어가 있을 뿐이지요. 그래도 맥북 에어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보다는 성능이 더 좋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바이오하자드 빌리지>는 맥북 에어에서 어지간히 높은 설정이 아니면 잘 돌아갔지만, <바이오하자드 RE:4>는 설정에 따라 경험의 질이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사용한 설정을 아래와 같습니다.


M2 맥북 에어 기본형에서의 그래픽 설정

이게 최선의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도입부 숲 장면에서 최소 40 FPS 이상 나왔고 저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MetalFX Upscaling을 'Quality (화질 중시)'에서 'Performance (성능 중시)'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FPS가 50 후반, 거의 60 정도가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바이오하자드 빌리지> 때와는 달리 <바이오하자드 RE:4>에서는 MetalFX의 퀄리티 모드와 퍼포먼스 모드의 품질 차이가 크다 보니 저는 높은 FPS보다는 높은 화질을 선택했고요. 물론 이건 맥북 에어 기본형이라서 그런 거고, M 시리즈 프로 혹은 맥스를 탑재한 맥북 프로에서는 4K에 MetalFX 퀄리티 모드에서도 60 FPS 이상은 가뿐히 나온다고 하네요.


제가 사용한 설정으로 특정 장소에서 조금 버벅거릴 때가 있는데요, 그때만 MetalFX를 퍼포먼스로 바꿔주면 바로 매끄러워집니다. 그런 곳이 게임 전체에서 서너 군데 정도밖에 없고, 그 장소만 벗어나면 다시 좋아졌기 때문에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화면에 필름 입자 노이즈가 낀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이건 그래픽 설정에서 그림자 품질을 높음 이상으로 올려주면 거의 사라집니다. 이 현상은 PC 버전에서도 나타난다고 하네요.


왼쪽: 그림자 품질 낮음. 오른쪽: 그림자 품질 높음.


아무튼 기술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넘어가죠.


<바이오하자드 RE:4 (이하 RE:4)>는 역시나 아주 훌륭했습니다. <바이오하자드 빌리지 (이하 빌리지)>에 큰 감동을 받아 시작한 것이지만, <RE:4>는 <빌리지>와는 또 다른 매력이 넘쳤습니다. 이미 출시 직후부터 찬사를 받고 있었으니 왜 훌륭했는지는 겜알못인 제가 자세히 이야기해 봤자 별로 의미가 없겠지요. 그래서 개인적인 느낌을 중심으로 이것저것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최근에 경험한 <빌리지>나 <바이오하자드 RE:2 (2019, 이하 RE:2)>, <바이오하자드 RE:3 (2020, 이하 RE:3)>과 비교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네요.


게임 시작 화면

게임의 분위기

게임의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스페인 어딘가에 있는 발데로보스(Valdelobos)라는 시골 마을, 살라자르 가문의 오래된 성, 그리고 정체불명의 공장과 실험실이 가득한 어느 섬입니다. <빌리지> 역시 유럽 어딘가의 시골 마을, 드미트리스쿠 가문의 오래된 성,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공장이 주요 배경이었다 보니 아무래도 비슷한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빌리지>가 원작 <바이오하자드 4>의 영향을 받은 거겠지요. 그래도 같은 시리즈 속에서도 <RE:4>와 <빌리지>는 현대적인 도시가 배경이었던 <RE:2>와 <RE:3>과는 구분된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마을, 성, 그리고 섬

<RE:2>와 <RE:3>에서는 긴장감을 주는 대상의 정체가 제법 명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좀비지요. 라쿤 시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부적인 원인이야 어찌 되었건, 좀비 사태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장르이자 클리셰니까요. 반면 <RE:4>와 <빌리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과 상황이 주는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바이오하자드> 시리즈가 좀비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RE:4>와 <빌리지>에 등장하는 건 좀비와는 다른 무언가이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당장은 알 수가 없는 거죠. 이 불확성에서 오는 긴장감은 <RE:2>와 <RE:3>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긴장감을 전해줬습니다.


보스를 제외한 주요 적이 <RE:2>와 <RE:3>에서는 좀비, 그리고 <빌리지>에서는 좀비와는 조금 다르지만 일단 괴물입니다. 원래는 모두 인간이었지만 이젠 내면도 외관도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들이지요. 하지만 <RE:4>에서 주요 적은 대부분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플라가(Plaga)'라는 기생 생물에게 뇌가 지배당한 것일 뿐, 죽었다가 몸만 살아난 게 아니라는 거죠. 가나도(Ganado)라고 불리는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외관뿐만 아니라 내면도 마찬가지예요. 말도 의사소통도 하지 못하고 도구도 단순한 둔기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앞선 세 작품의 좀비나 괴물과는 달리, <RE:4>에 등장하는 적들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대화도 하고 기도도 하며, 복잡한 도구도 사용합니다. 각자의 생활 패턴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노동 활동도 하며 물고기를 잡아 요리를 하기도 하지요. 사실상 사이비종교의 광신도입니다. 기생 생물 때문에 원래의 자아를 잃고 맹목적이고 광기 가득한 신앙을 갖게 되었을 뿐이지요.


가나도가 된 마을 주민

특히 게임의 초반을 담당하는 마을 파트에서는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의 주민들이 보여주는 광기라는 면에서 영화 <미드소마(Midsommar, 2019)>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미드소마>의 호르가 마을 주민들은 환한 미소 속에 광기를 감추고 있지만, <RE:4>의 발데로보스 마을 주민들은 시퍼런 날붙이와 타오르는 화염병을 손에 든 채 광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거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괴물이 아니라, 평범했던 사람들이 광기에 지배 당해 나를 공격해 온다는 것에서 앞선 작품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종류의 공포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인공 레온의 총구가 적어도 겉모습은 평범한 주민들이라는 점에서 스스로도 광기에 빠져가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요. 레온이 외관은 너무나도 평범한 주민의 목에 칼을 찔러 넣을 때는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마을 파트를 지나고 나서는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복장 자체가 전투병이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습니다. 그만큼 마을 파트만이 줄 수 있는 신선함이 있었던 거지요.


전반적으로 딱히 인상적인 장소가 있지는 않지만, 각각의 장소가 나름의 분위기와 개성은 갖고 있었기에 쉽게 지루해지는 일도 없었던 것 같아요. 크고 작은 적들 역시 한 종류에 조금씩 질리기 시작할 때면 새로운 종류의 적이 나타나 다른 스타일의 전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도 잘 설계된 부분인 것 같았습니다.


호박 속에 보존된 고대의 플라가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플라가의 존재였어요. 호박 속에 갇혀 발굴된 고대의 생물이라는 점에서는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1993)>이, 그것의 정체가 무시무사한 기생 생물이라는 점에서는 <그것(The Thing, 1982)>이, 이 생물이 숙주를 세뇌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에이리언 마스터(The Puppet Masters, 1994)>이 떠올랐습니다. 다른 작품들보다 조금 더 SF스럽고 코스믹 호러스러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이 지점이 그렇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반가운 설정이었습니다.


게임의 난이도와 조작

게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 벌어지는 적들의 물량공세는 제법 큰 압박감을 줬습니다. <빌리지>에서도 마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지는 물량공세가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요. <RE:2>와 <RE:3>에선 초반에도 긴장감 넘치는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압박감을 느낄 수준은 아니었어요. 반면 <RE:4>와 <빌리지>에서는 이게 게임 시작 맞냐는 생각이 들 만큼 쏟아붓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RE:2>와 <RE3> 그리고 <RE:4>와 <빌리지>를 구분해 주는 또 다른 요소처럼 다가왔습니다.


챕터 6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챕터 7부터는 난이도가 급상승하는 것 같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쉬움 모드(지원 모드)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RE:2>나 <RE:3>, <빌리지>보다 훨씬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예전에는 가끔씩만 겪던 탄환 부족도 <RE:4> 챕터 7부터는 자주 겪었고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 무기 하나를 계속 써도 큰 문제가 없었던 과거작들과는 달리 <RE:4>에서는 경우에 따라 다양한 무기를 수시로 바꿔가며 써야만 하는 상황이 제법 있었어요. 물론 능숙한 게이머라면 무기의 종류를 가리지 않겠지만 게임 흙손인 제게는 상당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저는 권총으로는 블랙테일을, 산탄총으로는 라이엇 건을, 소총으로는 스팅그레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블랙테일은 스피넬을 열심히 모아서 특수개조티켓을 이용해 최고 수준까지 업그레이드를 했었고요. 어쩌다 보니 기관총과 매그넘은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어요.

왼쪽부터 블랙테일, 라이엇 건, 스팅그레이


또 밀리와 패리라는 조작이 있었습니다. 밀리는 잠시 공격력을 잃은 적에게 다가가 몸으로 직접 공격을 하는 건데요, <빌리지>의 에단 윈터스에게도 밀리가 있었지만 단순한 밀어차기 수준이었던 것에 반해 레온의 밀리는 소리부터가 다른 어마어마한 파괴력의 발차기여서 조금 놀랐습니다.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액션의 쾌감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패링은 나이프로 적의 무기를 막는 건데… 중후반부까지 존재를 잊고 있었어요. 후반부에 가서도 패링을 쓰려고 쓴 게 아니라 적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정신없이 공격을 하다가 우연히 나온 게 대부분이었고요. 아무튼 공격과 방어의 다양성이 늘어난 건 흥미로웠습니다.


선형적인 동선과 목표

<RE:2>나 <RE:3>, <빌리지>를 할 때 유독 고생을 했던 것 중 하나가 길을 찾는 것이었는데 <RE:4>에서는 다행히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끔 헤매기는 했지만요. 진행을 위해 가야 할 길과 부수적인 곁가지 루트가 비교적 구분하기 쉬워서 여기에 들렀다가 저기로 가야겠다는 식으로 조금 계획적으로 움직이기 수월했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는 여기가 도대체 어디고 어떻게 들어왔으며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 여기로 가야 하나 아니면 저기로 거야 하나 고민해야 할 때가 많았거든요. 저는 오픈월드의 높은 자유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잘 짜인 선형적인 동선을 따라가는 걸 좋아해요. 물론 <바이오하자드>는 오픈월드였던 적이 없지만, <RE:4>는 앞서해본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뚜렷하고 선형적인 동선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언제나 미션 혹은 목표를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야기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었고 챕터가 진행될 때마다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어요. 미션을 위한 서브 미션이 여러 층 얽혀 있거나 중간에 별도의 독립적인 목표가 추가되면 언제부턴가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RE:2>나 <빌리지>에서도 그럴 때가 종종 그럴 때가 있었고요. 특히 심했던 건 <틈 레이더>였고요. 친구와 동료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뜬금없이 비밀 무덤을 찾아 퍼즐을 풀고 유물을 수집하라니….


I hate backtracking

<RE:2>와 <RE:3>에서 불편했던 점 중 하나가 같은 길을 여러 차례 왕복해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백트래킹(backtracking)은 다른 게임들도 갖고 있는 요소지만 <RE:2>와 <RE:3>에서는 좀 남용한 게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미션 수행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도 지나온 공간을 몇 번이나 방문해야 했어요. 조금 전에는 없던 좀비가 툭 튀어나와 놀라게 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단순한 이동이었고요. 물론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었고 덕분에 라쿤 시티 경찰서라는 공간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남기는 했지만,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조금 지겨워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빌리지>에도 이런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비교적 짧은 동선이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에이리언: 아이솔레이션>도 백트래킹이 제법 있었는데 이때는 같은 길을 가는 게 지겨워서라기보다는 순전히 공포와 긴장 때문에 울면서 도망치고 싶었던 느낌에 가까웠던 것 같네요.


<RE:4>에서는 다행히 백트래킹 요소가 많지 않았습니다. 중반부에 해당하는 살라자르 가문의 고성에서는 같은 공간을 방문할 일이 제법 있기는 했지만 중간에 놀이기구를 연상시키는 묘한 열차를 준비해 둬서 이동이 편하게 해두기도 했고, 레온과 애슐리가 전혀 다른 조건과 목적으로 같은 곳을 방문하게 만들어 반복한다는 느낌이 덜 들도록 해주더군요. 이런 점은 참 좋았습니다. 물론 그런 만큼 <RE:2>의 라쿤 시티 경찰서나 <빌리지>의 드미트리스쿠 성, <에이리언: 아이솔레이션>의 세바스토폴 정거장처럼 특정 공간이 아주 인상적으로 남지는 않았다는 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이야기와 캐릭터

<RE:4>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용사가 납치된 공주를 구한다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요. <RE:4>는 여기에 <바이오하자드> 시리즈만의 설정과 캐릭터를 집어넣어 재구성하는 걸로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어요. 물론 미국 대통령의 딸이 납치되었는데 권총 한 자루와 낡은 칼 한 자루 밖에 없는 요원 한 명만 파견하거나 지원이라고 보낸 게 탄약 부족한 헬기 한 대라는 건 말이 되지 않지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게임적 허용이라고 봐야겠지요.

레온 S. 케네디

레온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건 주인공 레온 S. 케네디(Leon S. Kennedy)의 과거와 관련된 요소들이었습니다. <RE:4>의 이야기는 사실 레온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내용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임의 시작부터 레온은 1998년 9월 30일, 라쿤 시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때 경찰로서의 자신은 죽었다고 말하며 마빈 브래너 경감, 그리고 총 포상 주인 로버트 랜도와 그의 딸을 떠올려요. 그들은 레온이 경찰로서 지켜내지 못한 동료와 시민이지요. 역시나 레온에겐 그 일이 크나큰 상처이자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던 거죠. 게임 속에서 레온이 사용하는 컴뱃 나이프는 다름 아닌 <RE:2>에서 마빈 경감이 레온에게 준 바로 그 나이프입니다. 설명에선 R.P.D. 에서 받은 나이프라고만 나오지만 레온이 R.P.D. 였던 날은 마빈을 만났던 그날 하루뿐이니까요.

레온의 회상 속 로버트 랜도(왼쪽)과 마빈 브래너(가운데). 그리고 마빈이 <RE:2>에서 레온에게 건내 줬던 컴뱃 나이프(오른쪽)


그런 레온에게 납치된 애슐리를 구한다는 건 단순한 임무이기 이전에 경찰로서 동료와 시민을 지켜내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속죄로서 다가오기도 했을 겁니다. 특히 이번 일의 배경에 라쿤 시티 때와 마찬가지로 플라가라는 생물학적 위협(biohazard)이 얽혀 있는 데다 애슐리 역시 이미 플라가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더욱 그랬겠지요. 플라가에게 완전히 지배되기 직전의 애슐리를 치료실로 힘겹게 데려가며 레온이 내뱉는 대사 "이번엔… 다를 거야."는 레온에게 애슐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루이스 세라 나바로

루이스

독특한 조력자로 등장하는 루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이스 세라 나바로(Luis Serra Navarro)는 이번 사태의 주도자인 새들러 밑에서 플라가를 연구했던 동시에 한때 엄브렐라의 직원이기도 했지요. 처음에는 아무래도 수상한 녀석이었고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엄브렐라 고학력 관계자 중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속죄 캐릭터입니다. 물론 자신의 생존과 탈출을 위해 수상한 외부세력과 손을 잡기는 했지만 적어도 새들러보다는 나을 거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고요. 그런 루이스가 제공해 준 약품과 치료 장비 덕분에 레온은 애슐리를 구할 수 있었지요. 레온을 돕던 루이스는 레온에게 "사람은 변할 수 있는 거 맞지? (People can change, right?)"라는 말을 남깁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루이스 자신이 직접 보였다는 걸 알고 있는 레온은 "넌 꽤 훌륭한 기사였어, 돈키호테"라고 하며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내지요. 루이스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 가벼운 농담을 던지지만 사실은 비극의 현장인 발데로보스 마을에서 나고 자랐던 토박이입니다. 옛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자기 고향을 처참한 지옥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현실을 견디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촐싹거리는 모습을 보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잭 크라우저

잭 크라우저

반면 중간보스 중 한 명인 잭 크라우저(Jack Krauser) 소령은 레온이나 루이스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한때는 레온의 교관이었던 크라우저는 레온의 증언에 따르면 성격은 좀 재수가 없어도 군인으로서의 긍지와 원칙만큼은 결코 버리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잘못과 무책임으로 인해 눈앞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모두 잃는 경험을 하고는 정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오릅니다. 그런 와중에 플라가의 힘을 목격하고는 결국 미국은 물론이고 세상 전체를 뒤집으려고 하는 새들러의 편에 서게 된 거고요.


크라우저는 레온처럼 지켜내야 할 존재들을 지켜내지 못한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크라우저의 텐트에 옛 부하들과 그들을 잃었을 때의 기록이 남겨져 있는 걸 보면 크라우저 역시 레온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그림자 속을 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고요. 하지만 크라우저 스스로가 동전의 양면에 비유한 것처럼 레온과 크라우저는 결코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없는 운명이었지요.


패배의 순간, 크라우저는 레온에게 자신의 나이프로 끝을 내라고 말합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은 얼른 나를 죽이라는 악역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지만, <RE:4>의 레온은 비록 변절해버리고 말았지만 자신의 거울상이자 여전히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갖고 있던 크라우저에게 군인으로서의 죽음을 선물해 줍니다. 이때 크라우저의 나이프를 든 레온을 보니 <RE:2>에서 마빈 경감의 나이프를 처음 들던 레온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레온에게 나이프는 참 많은 의미를 가지는 장비인 것 같습니다.

크라우저의 나이프, 그리고 크라우저의 시신을 바라보는 레온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크라우저의 시신을 한 번 뒤돌아 보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레온의 모습을 보면, 크라우저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과거를 드디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RE:2>의 레온은 거친 상황 속에서도 말이나 행동이 비교적 자상하고 온화했으며 배려심도 보였어요. 솔직히 얼굴과 목소리에도 앳된 티가 묻어났고요. 하지만 6년이 지난 <RE:4>에서의 레온은 외모도 목소리도 굵고 거칠어졌을 뿐만 아니라, 말투와 행동도 호전적이거나 공격적이며 때로는 냉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일들을 겪으며 말과 행동에 원래의 자상함과 온화함이 조금 돌아온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애슐리와 루이스의 농담을 잘 받아주기도 하고 크라우저의 죽음 앞에서는 잘 보여주지 않던 슬픈 감정을 드러내는 것처럼요. 결국 <RE:4> 초반부에 나온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무덤덤해 보이는 레온의 모습은 루이스의 촐싹거리는 행동처럼 내면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6년 만에 만난 에이다는 그런 점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이 변한 것 같다는 레온의 말에 당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뿐, 당신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해주지요.

레온과 에이다의 대화

게임 초반부에서 <RE:4> 속 레온의 동기를 <빌리지> 속 에단 헌터스의 동기와 비교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레온에게 애슐리를 구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공적인 업무(business)였다면, 에단에게 딸 로즈를 구하는 건 사적인 일(private)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에단에게 더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다고요.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이기는 합니다. 저는 딸을 가진 부모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게임의 이야기가 진행되며 레온에게도 애슐리를 구한다는 게 공적인 업무를 넘어 사적인 일이 되어간다는 걸 느꼈을 때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애슐리 그레이엄

애슐리

<RE:4>의 주요 캐릭터 중 한 명이자 커버에도 레온과 함께 등장하는 애슐리 그레이엄(Ashley Graham)은 결과적으로만 이야기하자만 레온의 서사를 위한 도구적 캐릭터입니다. 이후의 <바이오하자드> 게임에 등장하지도 않고요. 간단히 말해 레온에게 동기와 목적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인물이지요. 사실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기사'의 서사가 언제나 그렇지요.


하지만 <RE:4>의 애슐리는 그런 단순한 도구로만 치부하기에는 나름의 성장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납치된 혹은 구출된 히로인에서 끝나지 않고 레온의 조력자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동시에 두려움을 극복하고 적과 맞서며 심지어는 레온을 위기에 빠진 구출해 주기도 합니다. <RE:2>나 <RE:3>, <빌리지>에도 조력자 캐릭터는 있었지만 애슐리는 대통령의 딸이라는 걸 제외하면 총은커녕 칼도 다룰 줄 모르는 일반인이라는 점에서 '조력'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감이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지요. "도망치지 않을 거야. 기다려, 레온! (I won't run. Wait for me Leon!)"이라는 대사가 애슐리의 성장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 대사가 나온 다음 진행되는 애슐리 플레이 구간은 <RE:4>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구간이었어요. 일격에 애슐리를 죽일 수 있는 갑옷 입은 괴물 아르마두라가 좁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쫓아오는데 애슐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도망치거나 파란 불빛을 비춰 그들을 잠시 멈춰 세우는 게 전부니까요. 끊임없이 쫓아오다가 특정 조건에서만 멈추며 근접했을 땐 플레이어를 일격에 죽인다는 점에서 <빌리지>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파트로 유명한 <섀도즈 오브 로즈> 속 미아 인형 파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옷 괴물들이 떼로 몰려오는 구간마저 있으니 압박감 측면에서는 미아 인형 파트를 훌쩍 뛰어넘었던 것 같습니다.

애슐리와 갑옷 괴물 아르마두라

애슐리와 시간여행

레온과 애슐리가 함께 움직일 때 애슐리가 죽으면 게임 오버가 됩니다. 이건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긴 한데, 다시 세이브포인트로 돌아가서 살아있는 애슐리를 보면 왠지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게임에서 세이브포인트로 돌아가는 게 항상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애슐리라는 지켜야 하는 캐릭터가 추가되니 느낌이 전혀 달랐습니다. 마치 죽은 연인이나 가족 등을 되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고 과거 속에서 다시 살아있는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먼저 알고 있던 애슐리는 엄연히 죽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애슐리는 아직 그 일(사망)이 일어나기 전의 애슐리라는 거죠. 이 애슐리는 다른 애슐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레온/플레이어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운명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는 거죠. 이번에는 애슐리가 죽게 두지 않겠다면서.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이야기에서는 흔히 나오는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비극적인 일을 겪을 때마다 상상해 보는 일이니 흔하면서도 마음이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세이브포인트로 돌아간다는 건 똑같은데 인물 관계의 설정만으로도 전혀 다른 느낌을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게임 후반부에서는 애슐리가 레온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인지 에이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묘한 경계심을 보이는 게 평범한 20대 대학생 같기도 해서 인간적인 매력도 있었습니다.


약간 여담으로 애슐리에게 권총 한 자루 쥐여주면 최소한의 자기 보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은 건 아무래도 게임성을 위한 제약이겠지요. 플라가에게 지배당할지 모르니 총을 줄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만 레온 역시 감염된 상태인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다만 원작 <바이오하자드 4>의 플레이 영상을 보니 원작의 애슐리에게는 총은커녕 칼도 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습니다.


에이다 웡

에이다

에이다 웡은 이번에도 인상적인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레온의 이야기를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 줬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에 사로잡혀 자신이 변했다고 믿는 레온에게 그렇게 믿고 있을 뿐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지적해주기도 하고요. 사실 <RE:4>의 에이다 이야기는 DLC인 <세퍼레이트 웨이즈 (Separate Ways, 2023)>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인지 <RE:4> 본편에서는 <RE:2> 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에이다 이야기는 <세퍼레이트 웨이즈>를 플레이 해본 다음에 더 자세히 할 수 있겠지요.

왼쪽: 우타다 히카루. 오른쪽: 에이다 웡

역시 약간 여담으로 <RE:2>에서 에이다를 봤을 때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었는데요, <RE:4>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떠올랐습니다. 일본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우타다 히카루(宇多田ヒカル)였어요. 우타다 히카루는 저의 10대와 20대를 흠뻑 물들인 가수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지만 이건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지요. 아무튼 저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지 일본에서도 에이다 웡이 우타다 히카루를 닮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더라고요.


상인

상인

<빌리지>에 나온 미스테리한 상인 듀크(The Duke)가 인상적이었던 만큼, 원작 <바이오하자드 4>에 나왔다는 상인에 대한 소문도 많이 접했었기에 등장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듀크 역시 이 상인의 대사를 흉내 내며 과거에 이런 말습관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며 그 존재를 언급하기도 했지요. <RE:4>의 상인은 듀크와는 또 다른 개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듀크가 조금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 겉모습과는 달리 말과 행동에 은근히 품위가 있었던 것에 반해 상인은 모든 면에서 정말 세속 그 자체였어요. 듀크보다 말도 더 많았던 것 같네요. 혼자 콧노래를 부를 때도 있고. 무기를 고를 때마다 그 무기에 대한 의견을 들려주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듀크는 어떤 비밀스러운 목적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나 에단에게 묘한 우정 혹은 의리를 느끼는 듯한 뉘앙스가 있었지만 상인에게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정말 순수히 돈을 벌기 위해서 레온을 돕는다는 느낌이었죠. 어떤 면에서는 더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빌리지>의 듀크나 <RE:4>의 상인이나 모두 게임적 허용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지만요.


<빌리지>가 뚜렷한 개성을 최종보스인 미란다와 네 명의 중간보스가 안타고니스트로서 가장 큰 존재감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 이하의 적들 중엔 어떤 게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대부분 비슷비슷했던 느낌이기도 하고요. 반면 <RE:4>에서는 중간보스 이하의 강력한 적들 중에도 중간보스만큼이나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녀석들이 있었습니다. 진행로에 큰 산이 몇 개 있다기보다는 제법 거친 언덕이 여러 개 있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인지 <빌리지>가 영화 같은 느낌이었다면 <RE:4>는 미니 시리즈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중간보스는 촌장 비토레스 멘데스와 성주 라몬 살라자르, 그리고 잭 크라우저 소령입니다. 거대 물고기 델라고나 거인 엘 히간테, 제노모프를 닮은 베르두고 등도 중간보스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저는 중간 '보스(boss)'라면 적어도 의사결정권을 가진 존재여야 할 것 같아서 사실상 수동적인 크리처에 가까운 후자의 존재들은 중간보스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중간 보스 아래의 녀석들은 아르마두라를 제외하고는 제법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모습이다보니 이미지는 넣지 않는 걸로 하지요.


애슐리 이야기에서 잠깐 언급했던 아르마두라의 심리적 압박은 정말 훌륭했어요. <섀도즈 오브 로즈>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색다르게 변주된 부분이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애슐리 파트 이후에 레온이 같은 곳을 방문했을 때도 등장하는데, 이때 레온을 통해 애슐리를 공포에 질리게 만든 아르마두라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레헤네라도르는 외관과 연출 모두 공포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특별한 무기와 전략이 없으면 쓰러뜨리기 어렵다는 점과 쓰러진 줄 알았더니 애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와서는 공격하는 능력이라거나 기괴함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아이언 메이든 버전까지,  <RE:4>에서 가장 인상적인 적 중 하나였던 것 같네요.


베르두고는 제노모프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자주 나오는 좁고 어둡고 폐쇄던 복도를 돌아다니며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물을 상대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제노모프가 떠오르더군요. 게다가 액체 질소로 냉각시켜 공격하는 설정은 <에이리언 4 (Alien Resurrection, 1997)>에서도 나왔던 거고요. <에이리언: 아이솔레이션>의 제노모프가 이동할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대놓고 복도를 돌아다니며 아만다/플레이어를 공격했다면, 베르두고는 천장에 숨어다니다가 기습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베르두고가 오히려 영화 속 제노모프의 습성을 더 닮은 것 같기도 했어요. <RE:2>와 <RE:3>에서도 <에이리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을 찾을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바이오하자드> 제작자들이 <에이리언> 팬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에이리언 시리즈를 좋아하는 입장에선 베르두고가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다는 게 조금 아쉬웠는데 DLC <세퍼레이트 웨이즈>에 한 번 더 등장한다고 하니 기대해 봐야겠네요.


그리고 플라가의 한 종류인 아라냐는 그 모습과 행동이 그야말로 거대한 페이스허거라서 유독 기억에 남았습니다. 거미처럼 바닥을 돌아다니며 빠르게 접근하는 모습은 <에이리언: 아이솔레이션> 후반부에 나오는 페이스허거 그 자체였어요. 반갑기도 했지만 그만큼 처리하기가 까다로운 적이기도 했지요.


가나도는 사실 잡몹 혹은 졸개에 가까운 존재지만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평범한 시골 마을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날붙이를 들고 공격해 오는 광경 덕분에 기묘한 공포감을 조장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델라고엘 히간테도 있는데요, 솔직히 이 둘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엘 히간테는 이후에도 등장하고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기도 하기 때문에 존재감은 있지만 다른 적들에 비해 개성이라고 할 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조금 아쉬웠고요.


그럼 이제 중간 보스를 이야기해 보죠.

왼쪽부터 비토레스 멘데스, 라몬 살라자르, 잭 크러우저

촌장 비토레스 멘데스(Bitores Méndez)는 일단 플레이 과정에서는 선형적이고 평면적인 존재입니다. 딱히 예상외의 지점이랄 것도 없고 특별한 개성이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설정상으로는 한때 마을과 주민을 아끼는 촌장이었으며 어린 시절의 루이스와도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하는데 촌장 집에 남겨진 사진이나 일기로만 드러날 뿐, 게임 플레이 속에 그런 설정이 녹아들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일기 같은 기록을 통한 배경 설명은 <RE:2>나 <RE:3>, <빌리지>에서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리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가 대상이었어요. 하지만 멘데스는 다름 아닌 중간 보스이다 보니 이런 배경이 조금 더 게임 플레이에 녹아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귀족 라몬 살라자르(Ramón Salazar)는 <빌리지>의 알치나 드미트리스쿠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중세 풍의 고성에 살고 있는 몰락한 귀족이자 중간 보스이지요. 살라자르는 외모는 늙었지만 체격은 어린아이이고, 알치나는 키가 거의 3미터에 육박하기 때문에 둘 다 신체적으로 정상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둘 모두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살라자르는 여러 차례 등장하며 제법 큰 인상을 남기기는 하지만, 매력 자체는 알치나 드미트리스쿠에 비해 많이 옅었습니다. 자기 가문의 조상들이 힘들게 쫓아냈던 로스 일루미나스 교단에 스스로 들어가게 된다는 설정은 좋았지만 딱 거기서 끝나는 느낌이었어요. 드미트리스쿠의 경우는 미란다를 향한 애증과 하이젠베르크를 향한 혐오, 딸들을 향한 사랑, 에단을 향한 복수심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얽힌 복잡하고 입체적인 악역이었지만 살라자르에게선 그런 모습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잭 크라우저 소령에 대해서는 레온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했지요. 크라우저 소령은 영화 <더 록(The Rock, 1996)>에 나온 프란시스 험멜 장군을 오마주한 느낌이었습니다. 비밀 군사 작전 과정에서 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자신이 아끼던 부하들을 잃었던 험멜 장군은 희생된 부하의 유가족들 역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국가를 향한 복수를 실행합니다. 물론 진짜 목적은 복수 자체가 아니라 국가가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부하의 유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게 만드는 거였고요. 험멜 장군은 90년대 액션 영화 최고의 악역이자 결코 악역으로 선을 그을 수만은 없는 캐릭터였지요.


하지만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크라우저 소령은 험멜 장군과는 달리 순수한 힘과 잔인한 복수를 선택했고 결국은 자신의 거울상이었던 레온에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비극이라면 비극이고 운명이라면 운명이지요.


오스문드 새들러(가운데)

최종 보스

최종 보스이자 고대부터 플라가를 숭배해온 로스 일루미나도스의 교주 오스문드 새들러(Osmund Saddler) 역시 아무래도 <빌리지>의 미란다와 비교를 할 수밖에 없겠네요. <RE:2>와 <RE:3>에서의 최종 보스는 사실상 덩치만 큰 괴물일 뿐이었으니까요.


오래전에 죽은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미란다의 동기는 훨씬 현실적이고(그 방법은 비현실적이지만) 누구라도 어느 정도는 감정을 이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반면 새들러는 플라가를 이용한 평화로운 세상 구축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최종 목적은 극단적이면서도 또 평범하기 그지 없는 세계 정복이지요. 궁극적인 원인은 정신 나간 종교와 비현실적인 광기이다 보니 납득 자체는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특히 종교가 얽히면 세계 정복은 어떤 의미에선 그리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라는 느낌도 들고요.


<빌리지>의 미란다는 존재감도 있고 동기도 설득력이 있었지만 한 가지 부족했던 점이라면 카리스마였습니다. 카리스마는 차라리 중간 보스인 드미트리스쿠와 하이젠베르크가 더 강했던 것 같아요. <빌리지> 초반부에 나오는 회의 장면을 봤을 땐 작은 마을에서 서로 티격거리는 네 명의 중간 보스들을 미란다가 이래저래 달래며 지내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심지어 로즈를 담은 플라스크를 네 귀족이 나눠서 갖고 있게 된 것도 중간 보스들이 서로 싸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 보니 사이 나쁜 간부들 때문에 은근히 골치 썩이고 있는 회사 대표라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악역으로서의 카리스마는 <RE:4>의 새들러가 압도적이었어요. 외관과 대사, 목소리도 인상적이었고 주변의 모든 것을 휘어잡고 있다는 분위기를 아주 선명하게 풍기고 있었습니다.


알버트 웨스커

게임 플레이가 끝난 후에 에필로그처럼 나오는 영상 속에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흑막 중 흑막이라고 할 수 있는 알버트 웨스커가 잠깐 나옵니다. 저는 게임 속에서 웨스커를 본 건 이게 처음이기 때문에 사실 어떤 캐릭터인지 자세히는 잘 모릅니다. 시리즈 첫 작품부터 나왔었고 원작 <바이오하자드 4>의 후속작인 5편에서 사망하면서 퇴장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언제나 올백머리에 선글라스를 쓰고 중저음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 때문에 왠지 조금 유치한 캐릭터일 것 같다는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영화판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에서는 낯간지러울 만큼 유치한 캐릭터였던 걸로 기억해요. <RE:4>의 후속작이 언제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제 편견을 산산히 깨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쉬운 점도 여러 가지 늘어놓기는 했는데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RE:4>는 굉장히 즐겁고 몰입감 있는 만족스러운 게임이었습니다. <빌리지>와는 한층 다른 매력으로 꽉 들어차 있었어요. 끝내고 나서는 정말 어딘가에 모험이라도 다녀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2023년 최고의 게임 중 하나로 꼽혔다는 것에도 충분히 납득이 갔고 잘 만들어진 게임이 어떤 것인지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소한 점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죠. 플레이 중에 은근히 반가웠던 요소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나무판자입니다. <RE:2>에서 좀비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걸 막는데 요긴하게 쓰인 물건인데요, <RE:4>에서도 아주 잠깐 등장합니다. 루이스와 함께 건물 내부로 몰려드는 가나도들을 저지해야 하는 순간인데 창문 근처에 나무판자가 떨어져 있어요. 이걸 주워서 창문을 막으면 가나도가 더 많이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RE:2>를 해보지 않았다면 아마 나무판자의 용도를 몰랐을 거예요. 실제로 <RE:2>에서도 나무판자의 용도를 한참이나 몰랐었거든요. <RE:4>에서 나왔을 때는 정신없이 긴박한 상황이었다 보니 나무판자의 용도 따위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겠지요. 아무튼 노란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판자는 그렇게 은근히 반가운 존재였습니다.

나무판자


많이 길어졌네요. <바이오하자드 RE:4> 본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지요.


작년 하반기에는 출장이 많았다 보니 이동할 때나 일을 끝내고 호텔에 갔을 때의 시간을 이용해 게임을 경험해 볼 수 있었는데 이젠 당분간 출장이 없다 보니 게임에 많은 시간을 소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요. 특히 <RE:4>는 거의 20시간이나 걸려서 시간적으로 조금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제 작가로서 새로운 작품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 다음에는 비교적 짧은 걸 천천히 해볼 생각입니다. 일단 <RE:4>의 DLC인 <세퍼레이트 웨이즈>와 <스트레이(Stray, 2022)>를 생각하고 있어요. 둘 다 플레이타임이 5시간 전후라고 하네요. <스트레이>는 고양이가 되어 사이버펑크 도시를 돌아다니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동안 너무 압박감 넘치는 것만 했던 같아서 골랐습니다.

왼쪽: DLC 세퍼레이트 웨이즈, 오른쪽: 스트레이




겜알못의 게임로그

맥북에어(2022)나 아이패드 프로(2020)에서 가능한 것만 합니다. 컨트롤러로만 합니다. 싱글 플레이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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