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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선물로 받은 코로나

2022년 12월 23일 오전에 올해의 마지막 워크숍을 마무리하고 집 근처 카페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1 둘째가 너무 아파서 조퇴하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연락이 왔다.


아들 코로나 검사를 신청하면서 왠지 목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서, 나도 검사를 의뢰했다.

배탈을 자주 앓는 둘째 녀석이라서 설마 하면서 기다리는데 우리 둘 모두 양성이라고 하신다.

부랴부랴 약을 받고, 간단한 옷가지와 먹을 것, 연말 휴가 때 읽겠다고 주문해 놓은 책을 챙겼다.
연로하신 어르신들과 함께 사는지라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해 농사를 맡아주시던 아버님 몸이 편찮으셔서, 남편과 둘이서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거의 모든 주말을 이곳 홍천 용수리에서 보냈다. 뽑고 돌아서면 경쟁하듯 자라나는, 이름도 모르는 풀들과 덩굴들과 싸우면서... 얼마 심지도 않은 것 같은데, 주렁주렁 달리고 무럭무럭 자라는 엄청난 양의 채소를 수확해서 다듬고 나눠주고 요리하면서...

도시에서 자란 남편은 농사 관련 유튜브 애독자가 되었고, 시골에서 자랐지만 농사일 피해서 감나무 위에 올라가서 땡땡이만 쳤던 나는, 어려서도 안 해봤던 낫까지 들고 500평 농사를 지었다. 사실 농사를 지었다기보다는, 이른 봄부터 때를 달리하며 릴레이로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 꽃을 피우고, 뿌리를 내리는 잡초들과 전쟁을 치렀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렇게 전쟁터 같았던 이곳 홍천 밭에, 모든 업무를 마무리한 연말에 코로나로 자가격리 기간이 되어서 다시
일주일간 머물게 되었다.

얼마 전 내린 눈이 아직 그대로 쌓여있고, 아무런 풀도 생명도 없는 듯한 텅 빈 밭.


앞쪽 전나무 우거진 가지에 모여서 재잘거리는 작은 새소리가 들리고

옆집에 터를 잡은 까마귀 커플의 샛된 울음소리가 들리고

극성스러운 직박구리한테서 잘 익은 살구를 지켜내느라 서성거렸던 살구나무를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만져본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텅 빈 밭에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 연말에

먹을 것만 챙겨주면 행복해하는 먹깨비 둘째 아들과의 일주일 격리

다행히 둘 다 증상이 심하진 않으니,

올 한 해 열심히 산 나를 위한 자연의, 세상의 선물인 것 같다.


내년에는 또 이곳 이 밭에서, 내 일터에서 어떤 작물과 잡초와 사람들과 만나게 될까?

내년에는 끝이 아닌, 도중에 새소리도 듣고, 나무도 바라보는 휴가를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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