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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Jan 16. 2020

감자탕과 친해지는 방법

돼지 등뼈에 붙은 살만 발라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건 최고의 오산!

 

 지은과 나는 지역 도서관 책쓰기 프로젝트를 하며 알게 되었다. 예술하는 벗에 대한 오랜 로망이 있던 나에게 일러스트레이터인 그녀는 흥미로운 친구이자 조언자로 가까워졌고, 며칠 전 처음으로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메뉴는 감자탕이었다.


“그러고 보니 쌤은 못 먹는 음식이 많네요?”

“그쵸. 곱창이나.. 못 먹는 게 많죠.”


 문득 감자탕의 뼈도 징그럽게 여겨 못 먹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난 언제부터 감자탕을 먹을 수 있게 된 것 일까?








 중학교 2학년, 체육시간이었다. 키가 2미터에 가까운 배구선수 출신 선생님의 이론 수업을 듣고 있었다. 지루한 내용과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하품을 하던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갑자기 감자탕 이름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감자탕’의 이름이 ‘감자탕’인 것은 채소인 ‘감자’가 들어가서이기도 하지만, 감자탕의 주된 재료가 되는 ‘돼지 등뼈’를 ‘감자’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라며 가정선생님이 해줄법한 음식배경지식을 말해줬다. 감자탕의 진정한 별미는 돼지 등뼈를 마디마디 똑똑 분리시켜, 그 안의 골을 쏙쏙 발라 먹는 맛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열네 살의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여서, 돼지 등뼈의 골까지 빼먹는 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 소녀는 어느덧 서른셋이 되었고 이제는 감자탕에 소맥을 말아먹는 사람이 되었다. 역시 인생은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감자탕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시절 감자탕은 대중적인 유행을 타기 전으로 조마루니 이바돔이니 하는 다양한 체인점들이 등장하기 전이었다. 감자탕은 내게 생소할 뿐 더러, 그냥 고기를 먹지. ‘뼈에 붙은 살이 얼마나 된다고 그걸 먹어?’라는 의문과 함께 식욕보다도 귀찮음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이었다.


 이어지는 체육선생님의 이야기는 나에게 감자탕에 대한 거부감을 추가하기 충분했다.


“너네들 내가 왜 감자탕 얘기를 꺼냈는지 아니?”

“왜요???”


“감자탕에 들어가는 뼈가 아까 설명해준 사람 척추처럼 생겼어.”

"우엑."


 선생님의 군대 시절, 근처 공군부대에서 추락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급한 연락을 받고 수습을 도우러 달려갔을 때 산산 조각난 훈련기와 조종사의 사체를 봤다고 했다. 상황은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불에 타고, 잘게 깨진 살가죽과 뼈를 보고 구토가 올라와 현장 밖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하필 복귀한 부대에서 저녁으로 감자탕이 나온 거야.”

“헐.”

“대접에 담긴 돼지 등뼈를 보는데, 낮에 본 게 또 생각나고...배는 고프지.”



“그래서 먹었어요? 못 먹었어요?”


 잠시 뜸을 들이는 선생님에게 호기심이 많던 한 친구가 물었다. 궁금해 하는 우리들의 표정을 웃으며 보다가 체육선생님이 대답 하려던 순간.


딩동댕-!


50분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렸다.


“다들 궁금하지?! 이번 중간고사 체육시험 평균 80점 이상이면 말해준다! 모두들 앞으로 감자탕 먹을 때는 오늘 알려준 척추 운동을 생각하면서 맛있게 먹도록!”


으엑. 선생님 그 적나라한 사고 얘기를 듣고 어떻게 감자탕을 먹어요......전 이제 평생 감자탕은 쳐다보지도 않을 거예요.라고 다짐했던 내가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 어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은과 뭘 먹을지 정하며, 문득 뜨끈한 감자탕이 생각났고. 감자탕을 먹으러가기로 결정하니 감자탕을 보신용으로 먹던 대학시절이 생각났다.


“쌤. 혹시 쌤도 대학생 때 자취할 때, 몸보신용으로 감자탕 먹었어요?”

“ㅋㅋㅋㅋ네! 마자요.”

“다들 비슷하구나~. 보신용으로 혼자 먹기에 마땅한 음식이 없어요. 만만한 게 감자탕이죠?”

“그쵸. 뼈다귀 해장국으로 자주 먹었죠.”

“진짜.. 완전 웃겨.”



 엄마 밥을 먹던 집을 떠나 처음 직접 밥을 해먹는 것이 일상이 되기 시작하는 대학생 시절.

‘아 이렇게 인스턴트만 먹다가는 죽겠다..’ 건강을 위해, 무언가 보양식을 먹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삼계탕이나 추어탕을 먹으러 간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내키지 않았다.


 스무살, 청춘, 대학생 이라는 단어는 보신탕(개 보신탕X, 보신한다는 의미의 보신탕O)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피가 끓고, 에너지가 넘쳐야 정상 같았다. 이런 생각도 반 오십, 스물다섯 살에 가까워지면.. 보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입안에 꾸겨 넣어야했다. 그때 입안에 넣었던 것이 바로 ‘감자탕’이었다. 가격도 만만하고, 유난스럽게 보신의 느낌이 나지 않지만 괜스레 든든했다.







 함께 자취 중이었던 친언니는 감기 몸살에 걸려 입맛이 없던 나에게 감자탕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감자탕? 언니는 안 징그러운가? 생각에 쫄래쫄래 따라갔다. 도착한 감자탕 집에서 언니는 감자탕이 베이스인 뼈다귀 해장국 두 개를 시켰다. 능숙한 모습이 제법 멋있었다. 내 인생에 우리 언니가 멋있었던 순간이 몇 번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 날 놀린 남자애를 때려주러 우리 교실에 찾아왔던 때가 제일 멋있었고,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멋진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언니는 미리 서빙된 상위의 고추와 양파를 하나씩 집어먹었다. 식전 에피타이저를 즐기듯 도도했지만 “쓰읍-이거 청양고추야. X 매워.”라며 금방 여유를 잃고 말았다. 청양고추의 매운맛에 언니의 가오가 삐끗했지만. 그래도 언니는 멋있었다.


 그 사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뼈다귀 해장국도 도착했다. 언니는 자신과 내 몫의 해장국에 들깨가루와 슬라이스로 썬 청양고추도 큼지막히 한 숟갈씩 넣었다. 아래 깔린 국물을 소중히 떠서 들깨가루와 청양고추 위로 끼얹으며 섞어 먹으라는 제스쳐 또한 잊지 않았다. 아아..다정한 사람. 천천히 그 모습을 따라하다가 당황했다. 이제 이 뜨거운 걸 어떻게 먹어야할까?


“이거 어떻게 먹어?”

“자 봐바.”


언니는 다시 멋있게(=능숙하게) 스텐레스 밥공기를 위아래로 흔들어 뚜껑에 붙은 밥알을 정리했다. 밥뚜껑을 해장국 뚝배기 옆에 놓았다. 어설픈 젓가락질로 조심스레 김이 폴폴 나는 국물 속 등뼈 하나를 꺼내 밥뚜껑 위에 올려 등뼈 사이의 뼈를 발라내기 시작했다.


“자- 이렇게 뼈 속살을 발라 먹으면 돼. 뼈 3개 들어있으니까. 2개까지는 살 발라서 와사비간장에 찍어먹어.”

“응. 그럼 1개는?”

“그건 일단 살을 잘 발라서 모아둬. 남은 해장국 국물에 다시 넣어서 밥 말아 먹어야 되니까.”

“국에 바른 고기 다시 넣어? 더러운 거 아니야?"

“어차피 네가 발라서 너가 먹을 건데 뭐. 괜찮아. 먹어봐. 먹어보면 그런 말 못할 걸?”


 맛을 보기 전에 이런저런 잡지식과 먹는 법까지 이토록 자세하게 배운 음식은 내 생에 7천원 짜리 감자탕이 유일하다. 한 번 맛을 보고나니 언니가 알려준 감자탕 먹는 방법이 내게 절대 법이 되어버렸다.


이 감자탕이 소자 라니..!


 돼지 등뼈를 오래 끓여 우린 국물에 데친 시래기와 깻잎, 감자를 넣고 된장과 고춧가루로 잡내를 잡아 구수하면서도 끝 맛이 달콤한 듯 고소하게 입안에 착 감기는 맛있는 음식.



 부드럽게 발라지는 살을 먹는 것도 맛있지만, 따뜻한 국물의 깊고 구수한 맛과 한풀 죽었지만 산뜻하게 씹히는 시래기와 콩나물의 맛도 맛이다. 떡과 수제비의 쫄깃한 식감 역시 빠트릴 수 없다. 이 모든 맛을 즐기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감자탕을 돼지 등뼈의 살과 골만 발라먹는 음식으로 단정 지었던 내가 어리석었음을 깨닫는다.


 정신없이 등뼈의 속살을 발라내며 먹다보면, 마치 석회 동굴 속을 탐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다양한 미(味)지의 세계를 걷고 또 걷는 기분.




 새로 사귄 친구와 따뜻하고 맛있는 감자탕을 먹으며 두런두런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새 밥을 볶아 먹을 시간이다. 물론 양을 넘치게 주는 감자탕 집에서는 소자 사이즈를 시켜도, 감자탕만 먹고 나오기에도 벅차다. 다음에는 꼭 또 다른 글벗 황언니와 함께 셋이가서 꼭 볶음밥도 먹고 와야지. 분명 맛있고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감자탕과 지은과 황언니와 친해져서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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