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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Nov 27. 2019

추운 겨울에 더 맛있는 음식, 생태찌개

#4. 한 겨울의 생태찌개



 겨울이 되면 자연스레 생태찌개가 생각나는 것처럼. 날씨와 계절은 추억을 불러온다. 겨울에 생태찌개가 생각나는 것은 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생태찌개의 맛을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가장 맛있게 먹었던 때가 바로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외할아버지 댁에서 보냈다. 점점 추워지는 11월 말, 외할아버지는 한 달 이상 병원에 입원하실 정도로 아프셨다. 외할아버지의 퇴원 날, 엄마는 입맛을 잃은 할아버지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싶어 했고,  저녁상에 올라왔던 음식이 바로 ‘생태찌개’였다.


 학교에 다녀와 귤을 까먹으며 뒹굴 거리던 나는 엄마 심부름을 다녀왔다. 집 근처 동네 마트로 가서 생태 3마리와 두부 한모, 무 반 개, 파와 쑥갓 한 단을 사 왔다.


 나에게 비닐봉지를 전해 받은 엄마는 생선부터 손질했다. 토막 난 생태 안에 붙은 내장과 살을 분리하는 검은색 막을 뜯어내고, 두부와 무는 납작하고 도톰하게 나박나박 썰었다. 파와 쑥갓은 어슷하게 썰었다.  요리하는 엄마 옆에서 잠깐 구경하다가 나는 추워서 파고든 따뜻한 방바닥 이불속에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시에나 일어나. 저녁 먹어야지.”


 어깨를 흔드는 엄마의 손길과 목소리에 일어나 보니 이미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상의 한가운데 놓인 생태찌개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붉은 국물은 보기만 해도 얼큰해 보였고 투명하게 변한 무는 보기만 해도 입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질 것 같았다. 엄마는 살이 많은 큰 생태 한 조각과 두부, 무를 먼저 떠서 할아버지 앞에 놔드렸다.


 입원하는 사이 두 볼이 수척해진 할아버지는 뜨끈한 국물부터 한 술 뜨셨다. 무의 시원함이 배어있는 얼큰한 국물이 집 나간 할아버지의 입맛을 되찾아주기를. 할아버지의 수저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부드러운 두부였다. 간이 든 두부를 반으로 잘라 하얀 쌀밥 위로 얹고 국물을 뿌려 밥을 살살 비벼서 다시 한 입. 이어서 맛있게 숙성된 김장김치도 한 조각 집어 드셨다.


 할아버지가 몇 술 뜨다 마실까 봐 긴장감이 돌던 밥상 위로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식구들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할아버지의 순서를 따라 생태찌개 맛을 보기 시작했다.





 생태와 무, 양념의 깊은 맛이 잘 우러나온 국물은 얼큰하면서도 시원했다. 다음 공략 대상은 무였다. 익어서 물컹해진 무는 싫어하지만, 왠지 생태찌개의 무는 맛있을 것 같았다. 입안에서 뭉그러지는 무의 맛이 달큼했다. 생선살은 더 맛있었다. 담백하면서도 고추장 양념의 짭짤함이 배어 부드럽게 부서졌다.


 내장 마니아는 아니지만 생태찌개에 들어간 곤이와 명란은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였다. 꼬불꼬불한 곤이는 모양새가 이미 내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입안에서 요상하게 미끄덩거리는 거 아닐까?’ 잠시 두려움도 느껴졌지만, 한 조각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예상대로 미끄덩거리지만 묘하게 툭툭 끊기는 신기한 식감이었다.


 젓갈로 친숙한 명란은 보기만 해도 입안에 알이 톡톡 터지는 맛이 그려졌다. 익히지 않은 명란의 맛은 알알이 부서지는 짭조름한 맛이 선명하다면, 익힌 명란은 겉을 감싸고 있는 명란 막이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던 알들을 툭하고 끊어서 먹는 맛이 재미있다. 익어서 연한 살구 빛으로 변한 명란 알은 간이 좀 약해져서 명란 자체의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각각의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국물과 함께 떠서 먹는 맛이 담백하니 맛있다. 여타 고추장 베이스의 탕이나 국과 달리 조금은 맑지만 시원한 맛이 생태찌개를 좋아하는 가장  이유다. 우리  생태찌개가 다른 집이나 식당의 맛에 비해 수수한 이유는 고추장을 기본 맛으로 잡지만, 기저에 된장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생태 혹은 생태를 얼린 동태는  손질을 잘못하면 국물에 비린내가 난다.) 쌀뜨물에 된장을 조금 풀고, 고추장을 풀면 신기하게도 생선의 비린내가  잡힌다. 물론 소주나 청주, 생강을 활용하기도 한다.







 입맛을 잃은 할아버지가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시게 만든 생태찌개. 얼어붙은 가족들의 몸과 마음을 모두 녹여주는 생태찌개의 따뜻함. 겨울이 되면 먹고 싶어 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구 온난화로 국내산 생태를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러시아산이라면 어떻고 또 동태면 어떠랴. 향수에 젖은 그때의 맛과 추억을 나에게 선물하는데. 생태탕의 진정한 맛을 즐기게 된 지금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생태찌개에 반주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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