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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닐 Jun 18. 2021

은수가 나를 사랑한다



 은수가 나를 사랑한다. 며칠 전 새벽 예고없던 고백을 받은 후 나는 이 생경한 사실을 하루에도 몇번이나 되뇌어보는데도 그럴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든다.

 밤 열한시가 다 됐을 쯤이었다. 여느 밤처럼 카톡을 징하게 하다가 '비연애'에 관한 내 발언에 한참 대답이 없던 은수. 그리고 40분 쯤 뒤 전화가 와서는 그 애는 공연히 시덥잖은 얘기로 빙빙 돌기만 했다. 나는 전화가 울리던 그 순간부터 어느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모른척 해봤다. 짓궃게도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를 했냐며 재차 물었고 은수는 그제서야 두어번의 머뭇거림 뒤에 나는 ! 너랑 ! 연애하고 싶어! 이 말 하려고 전화했다! (뚝) 나는 진짜 벙쪘다. 어..? 어......? 전혀 예상못한 맥락은 아니었지만 저런 문장은 정말 생각지 못했다. 얘가 왜 다시 전화가 안오나 슬슬 불안해할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복잡미묘해진 바람에 금방 다시 전화걸 수 없었다. 나도 꽤 오랜시간을 마음을 가다듬고 숨을 여러번 크게 내쉬어야 했다. 연애.. 연애라니. 우리 둘 위로 연애라는 핑크빛을 입혀본 적이 별로 없었다. 뭐라할까. 우리 사이에 연애라는건 왠지 새삼스럽고도 낯선 토픽인 것 같았다. 소란스러웠다. 나의 마음이 그랬고 아마 그 애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렇게 갑자기 전화가 끊긴 후 내 작은 방에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전화를 걸기까지의 시간, 말을 꺼내기 전까지의 시간, 전화를 다시 걸기까지의 시간. 이렇게나 잦은 공백으로 채워진 우리는 이 새벽이 처음이었지 싶다. 그 공백을 벅찬 애정으로 걱정으로 떨림으로 감당했을 나의 은수. 나는 그런 은수를 생각하니 너무 그리워져서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제대로 결론도 내지 못한채로 다시 그 애 목소리를 찾아갔다.  당장 마주보고 싶었다.


 나는 은수를 사랑한다. 그 사랑의 형태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가늠할 수는 없지만 크기 정도는 알 수 있다. 그것은 특별한 사건도 없이 절로 생겨났고 신경쓰지 않아도 절로 자라났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처럼 은수를 그리워했고 망설임 없이 다가서게 되던 내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러면서 나는 은수가 했던 말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서로 엮여있는 것이라며 특별히 소중한 존재로 여겼다. 서로의 베로니카로 임명하면서 원래는 한몸이어야 하는데 둘로 나뉘어서 이렇게도 당기는 것이라고. (그런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잘 안됐다. 몇달전 갑작스레 알게된 사이에 이렇게나 불꽃이 튄다는게) 둘도 없는 친구, 운명적 존재, 아니면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점점 더 강하게 느낀다'는 무료사주궁합, 그런거.

  그렇지만 가끔 나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우리 정말 우정인지, 그렇다면 왜 나는 사람들의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냐는 물음에 고민했던건지. 2년전이라고 대답한 내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던건지. 한참 그런 모호한 기분에 잠길때면 사랑보다는 멀고 우정보다는 가깝다고 노래하는 피노키오의 음악을 찾아 들었다. 며칠을 들었다. 빠짐없이 은수의 웃는 얼굴이 내 눈앞에 일렁였다.


 은수가 나를 각별히 좋아하고 있음을 알고있었다. 모르면 바보였다. 바뀌는 프로필 사진마다 나와 같이 찍힌 사진, 내가 찍어준 사진, 내 옷을 입고있는 사진. 내 별일없는 일상얘기도 매일같이 즐겁게 들어주고. 잠 잘 못드는 나 잘 자라고 같은 책 같은 챕터를 읽어주고. '자기야, 자유롭게' 하며 기타연주에 속삭이는 목소리로 노래해주는 은수. 하루빨리 떠나고 싶던 서울이 나를 알게 된 후 다르게 느껴진다고, 타국으로 떠난 후에는 내가 있는 한국에 마음을 두고온 것 같다고. 그 앤 이런 말들을 숨기지 않고 늘상한다. 순간 순간에는 자연스럽게 흘러간 것들이, 돌이켜 주워 담아 모아보면 그건 나에게 너무나도 큰 마음이었다. 내가 이토록 지순한 마음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그 애의 말처럼 우정이든 동경이든 연애감정이든, 아무런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 후 나는 저녁이 되면 하루가 아쉬워 매일 은수에게 전화를 걸고 바람이 너무 선선한 탓에 쉽게 들뜬다. 밝은 달과 하천의 물이 흘러가는 소리, 그보다 맑게 웃는 은수의 웃음소리에 내 발은 지치지도 않고 오래도록 동네를 걸어다닌다. 꼭 함께 걷는것 같다. 내가 요즘 걸음 수가 부쩍 늘어난 이유다.


 노란 해바라기 같은 은수, 그렇게 싱긋하고 살랑거리는 은수가 나를 사랑해서, 나는 덩달아 그 애를 더 사랑하게 된다. 얼른 3월이 되어 마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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