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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un Cho Feb 08. 2021

워킹홀리데이 잘 갔다 왔냐?

1장

 퇴사 혹은 무직, 영어 조금, 용기 조금, 동경, 도전 혹은 도피.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마음먹기 위해 필요한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 중 서너 개가 나를 표현하는 단어로 다가 올 무렵, 5년간의 고민이 무색한 듯,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는 워킹홀리데이 지원을 마쳤다.




자유여행    


 출국하기 전부터 워홀에 관련된 글들을 마구 보기 시작했다. 완벽한 워홀을 달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런던에는 무엇이 있고, 집은 어떻게 구하고, 조심해야할 것들, 심지어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영국 yms 대표단에서 배포하는 가이드를 많이 참고하였다. 작성에 도움 준  분들께 감사하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공유를 민족적으로 하는 나라를 손꼽는다면 한국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영국의 Goldersgreen과 New Malden 지역에는 한국인이 많고, Lidl 슈퍼마켓은 Tesco 보다 저렴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비자발급은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실 워홀을 가기로 결정한 이후 한동안 영국과 호주 중에 어디로 갈지 고민했었다. 인터넷을 통한 수많은 워홀과 관련된 정보, 리뷰들을 보면서 영국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유는 꽤나 간단했다. 호주에 비해 영국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계획 할 때, 첫 번째로 골라야하는 것이 있다. 매번 가는 사람이 계획한 코스를 다니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가이드여행과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계획한 순백의 자유여행 중에 당신은 어느 쪽을 선호하는가? 가이드여행을 선호하는 이유는 아마도 검증된 재미를 선사할 것이고 돌발 상황이 발생할 확률이 낮으며 안전해서 일 것이다. 이와 달리 자유여행은 정반대이다. 재미있을지 장담 할 수 없다. 돌발 상황이 허다하고 상대적으로 위험하다. 가이드여행을 은행적금이라 비유하면 자유여행은 주식투자인 셈이다. 그 당시엔 불안정한 여행인 만큼 그에 대한 보수 즉, 진귀한 경험을 선사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개척가 정신을 이어받아 영국을 탐험하고 싶었다. 위에 언급했듯이, 사전조사는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무지에서 오는 불안감을 떨치게 하는 용도로 말이다. 어느 슈퍼마켓이 가성비가 좋은지, 비자는 어디서 받는지와 같은 정보들은 유용했다. 하지만 미리 알지 않았더라도 살다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미리 알고 있어서 잃는 것들에 대해 조금씩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Mark&spencer 슈퍼마켓이 비싸다는 것을 가보지 않고도 이미 가이드를 통하여 알고 있었기에 2년간 살면서 가 본적이 손에 꼽는다. 그러다보니 안에 뭐가 있고 어떻게 다른지 자세히 비교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곳의 초콜릿이 참 맛있다는 것을 귀국하기 한 달 전에 알았다.) 

 워홀 초기의 나는 각국에서 온 워홀 친구들을 볼 기회가 많았는데, 그들과 비자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때 마다 나는 쉽게 흥미를 잃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많은 워홀 후기들을 보면서 마무리하는 절차에 대해 이미 층분한 복습하였기 때문이다. 관광지를 미리 알지 못해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상황들을 겪고 난후, 나는 더 이상 미리 알려고 노력 하지 않았다. 자유여행의 묘미를 살려 워홀을 보내기로 결정한 셈이다.



프렌즈의 의미


 미국드라마 ‘프렌즈’를 보면 큰 거실하나와 방 여러 개가 딸린 집에서 친구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영국에서는 ‘Flat’이라고 하는 개념인데, 미국 뿐 만아니라 유럽국가들 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청년들의 주거형태이다. 어릴 적 유행했던 시트콤들이 유독 대가족이나 대학교기숙사 같은 공동주거를 설정으로 많이 내세운 것이 기억난다.(지붕 뚫고 하이킥, 논스톱 등) 그것의 영향을 받아, 공동주거에 대한 로망이 나도 모르게 싹트고 있었다. 나는 브리스톨이라는 런던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2년간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총 5명의 친구들과 지내게 되었다. 영국인, 그리스인, 독일인. 각자 살아온 문화가 다른 친구들이 한 지붕아래 모이게 됐다. 그들의 출퇴근 루틴, 요리방식, 여가를 보내는 방법, 심지어 설거지를 하는 방법까지. 그들과 밀착하며 지내면서 듣고 보이는 문화적 차이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같이 사용하는 공용주거공간이 생기다 보니 가끔씩은 설거지, 청소 왜 안하냐는 둥 사소한 언쟁을 해야 할 때가 있었지만, 이 부분은 셰어하우스에 산다면 모두가 겪는 일들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같이 살면서 겪는 단점은 장점에 비할 바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던 나는 같이 사는 친구들과 피자를 시켜먹고, 영화를 같이 보고, 공원에 산책도 자주 다녔다. 친구 하나 없이 외딴 세상에 개척을 하고자 먼 길을 온 나에게는 사소함을 같이 할 사람들이 소중했다. 특히 그들은 나의 개인 영어과외 선생님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해야 하는 영어를 구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문장을 말하려면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어떻게 영어로 표현할지 시뮬레이션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음식점에서 주문을 할 때 “이것 주세요.”, “고맙습니다.”처럼 필요하고 짧은 단어들만 구사했었다. ‘음식 주문하는데 그것이면 되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용건만 간단히’라는 개념은 영국, 특히 내가 살던 브리스톨 이라는 도시는 금기시하던 것 이었다. 주문을 위해 오가는 말들은 ‘이거 주세요.’ 와 같은 당신의 목적이 우선이 아니다. 잘 지냈니, 오늘 바쁘니, 어디서 왔느니, 날씨가 어떻다는 둥, 최소 1분에서 많게는 20분간 대화의 롤러코스터를 탄 이후에 주문을 한다. 누가 보면 3년 만에 재회한 절친 같이 서로 대하지만 그들은 초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사의 나라 영국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나중에 와서 알게 됐지만, 진심으로 잘 지냈는지 알고 싶어서 물어 보는 게 아니다. 그저 인사치레인 것이다. 나도 예의를 지키는 것에 동참하고 싶어서 최대한 길게 이야기를 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느린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이 그들에게 곤혹일 듯하여, 길게 말을 하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그 당시엔 영어로 말하는 실력을 늘리고 싶은 마음보다, 버퍼링이 걸리는 나를 ‘귀찮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느린 말을 구사하는 나를 기다려주는 친구들, 그리고 내가 느리게 말해도 부담이 안 되는 상대를 찾아야 했는데,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같이 살던 친구들이었다. 같이 살아야 만하는 상황이니 한 귀로 흘려듣기도 애매 할 것이고, 매번 마주치니 ‘아, 이 녀석을 가르치는 게 빠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나는 영어로 예의적인 수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의 터득으로 인해 얻은 부작용이 하나 있는데, 용건만 간단히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예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것은 내가 한국에 귀국한 후에도 계속 습관처럼 하고 있는 좌측보행과 더불어 영국생활이 나를 세뇌한 것들 중 한 가지로 꼽힌다. 


 대부분의 워홀러들처럼 평균 주40시간 풀타임을 한 적이 있다. 직장과 집을 오가는 것이 일상이 되고 피곤함과 귀차니즘에 지배당하여, 경험과 문화체험에 비중을 주고 싶었던 내 워홀의 본질적 의미는 점점 변질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랬던 나에게 귀차니즘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이 있는데 바로 제스이다. 직장 동료인 그녀는 음악공연과 전시를 기획하는 단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였다. 종종 공연이나 파티가 있을 때 마다 나를 초대를 해주었는데, 피곤함과 귀찮음에 초반엔 여러 차례 거절을 했었다. 이미 두어 차례 거절을 한지라 세 번째 초대에는 매너를 지키기 위해 응했는데, 그때가 브리스톨 로컬밴드의 새 앨범 쇼케이스 파티공연 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제스가 일을 마치고 나중에 합류한다고 해서 나는 파티예정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였다. 1시간가량 기다리는데 파티 시작은 하지 않고 어색함이 점점 나를 감쌌다. 그도 그럴 것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을 오가고, 나는 혼자서 불편하게 허수아비처럼 서있는, 그 건물 반경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이건 아니다.’ 싶어 황급히 발길을 돌리는 와중에, ‘너 어디니 나 도착했어.’ 라는 제스의 문자를 받고 다시, 공연장을 향했다. ‘그래 제스가 있으면 괜찮을 거야.’라는 일말의 기대감이었다. 제스는 만나자 마자 자신들의 친구들을 소개해주었는데, 그들은 공교롭게도 이미 문 앞에서 마주친 무서워 보였던 무리들이 아닌가. 공연장입구가 허름한 창고인데다가, 무수한 피어싱과 타투를 뽐내던 그들은 뭔가 불법을 저지를 것 같은, 분명히 나에게 쉽지 않던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악수를 오가며 서로의 소개가 끝나고 나고, 때마침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큰 음악소리에, 우리는 다 같이 온 것인 마냥 공연장 안을 향했다. 그 밤 내내 분위기에 취해, 피로감이라는 감각이 무뎌졌다. 워홀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날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그날 밤을 택할 것이다. 인종, 출신을 초월하여 음악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하나로 모두가 어울려 놀던 그 하루가 정말 꿈만 같았다. 아무리 피곤하고 귀찮더라도 친구들의 초대에는 망설임 없이 나서기로 마음먹은 날이기도 하다. SNS와 인터넷에서 문화를 찾으려는 요즘, 이곳은 마치 사람간의 아날로그적인 연결이 두터운 지하문명의 세상 같았다. 그들의 문화에 초대되고, 새로운 친구를 얻는 것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추억들은 귀찮은 몸을 이끌고 밖을 나서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워홀러로서의 삶은 끝이 정해진 삶이기에, 이곳의 사람들보다 부지런히 많은 경험을 맛보는 것은 나에겐 의무 이었다. 그리고 워홀경험을 송두리째 격상시키는 옳은 선택 이였다. 

제스와 나[만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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