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중반과 40대 후반에게, 같은 질문 다른 무게
아들 "엄마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기억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 "응? 갑자기 왜?"
아들 "오늘 윤리 시간에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글쓰기를 할 거야. 내가 읽고 있는 철학책에 그 사람의 퍼스널리티는 경험과 기억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나오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나 "아, 그렇지. 경험과 기억 중요하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에 대해 먼저 생각해봐야 할 텐데, 퍼스널리티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 흠 근데 나는 경험과 기억 중에 선택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기억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각각 생각할 수가 있나? 근데 너는 왜 경험과 기억이 퍼스널리티를 만든다는 이론에 동의하는 거야?"
아들 "정확히 말하면 어린 시절에 하는 경험이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만들어가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퍼스널리티는 어렸을 때부터 쌓여서 어른이 돼 완성되는 거잖아. 그런데 어떤 경험이라는 게 어린 시절에 끼치는 영향과 어른에게 끼치는 영향은 엄청 다르다고 생각해. 어린 시절은 경험치가 많지 않고 살아온 시간이 짧기 때문에 하나의 작은 경험이라도 큰 부분을 차지하거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어른들은 이미 쌓여있는 게 많아서 같은 크기의 경험이라 해도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는 거 아닐까?"
나 "그렇지. 인생이 블록 쌓기라고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는 몇 개의 아주 커다란 블록들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구조물일 테고, 어른들은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블록들로 만들어진 결과물일 테니까, 그 하나하나가 경험이라고 치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 다르겠다. 어릴 때는 블록 하나 바뀌면 전혀 새로운 형태가 되겠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겠지. 물론 그 형태를 완전히 깨부술 정도의 강력한 경험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와, 근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답변할 수 있다니 우리 아들 대견한데! 이런 질문은 사실 가장 까다롭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귀찮은 질문이거든."
아들 "오늘 윤리 시간 기대돼. 재밌을 것 같아."
학교 가는 길에 아이와 나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관한 대화를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돌아와 내내 곱씹고 있는 중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눈을 반짝거리던 10대 중반의 아이와 달리 50을 바라보는 내게 그 질문은 너무나 무거운 무게로 다가온다. 자신만만하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의 나에게 누군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인생이란 살면 살수록 어렵고 복잡하고, 또 무엇보다.... 설령 지금의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 해도 바꿔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오늘의 나에게 던지는 숙제 같은 질문,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