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팀의 빅 팬이다. 그냥 빅 팬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뇌구조를 그리면 상당 부분이 축구로 꽉 차 있을 정도로 온통 축구 생각으로 가득하다. 현재 아스널클럽 선수와 코치진에 대한 면면, 팀의 전략과 전술, 역대 아스널 선수들, 그 선수들의 이적과 성과 스토리, 그리고 아스널의 상대팀이 되는 모든 프리미어리그 클럽에 관한 선수 및 코치진, 심지어 챔피언스리그나 유로파리그 등에서 만나는 다른 모든 유럽 축구클럽에 이르기까지 지식과 정보가 그야말로 방대하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어디 축구 잡학다식에 관한 대회에 나가면 우승은 떼놓은 당상일 듯! (여담이긴 하지만 사춘기 청소년 아이가 스포츠에 푹 빠져 있다는 건 사춘기 시절을 나는 굉장히 건강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잡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으므로? ^^)
아들이 아스널 팬이 된 건 팔할이 남편 영향. 남편이 아스널 팬이건 말건 축구라고는 월드컵 정도에만 관심 있던 내가 아이 덕분에 아스널의 스몰팬쯤은 되는 상황으로 바뀌면서 우리 가족 대화의 상당 부분은 축구로 시작해 축구로 끝날 때도 많다. 어쩌다 화제가 다른 데로 돌아가도 기어이 아이가 다시 축구로 돌려놓는 상황의 반복?
평소에도 이럴진대 아스널 팀의 경기가 있는 다음날이면 말해 뭣하랴.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으며 특히 간밤에 지난 리그에서 1위 한 맨시티와 2위를 한 아스널의 경기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당분간 지난 경기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 아침은 그 서막이었는데,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2대 2로 비긴 아스널팀은 상대팀에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선수 한 명이 레드카드를 받아 퇴장당했고 결국 비기는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등교 준비 때부터 시작된 경기 브리핑은 학교에 도착하는 내내 그러니까 약 1시간 넘게 이뤄졌고, 아이는 내내 목소리가 높았고 흥분상태였다.
나 "선수 한 명이 없는 상황에서 비긴 거면 정말 잘했네!"
아들 "아니, 그때까지 아스널이 이기고 있었다고! 문제는 그 심판이 같은 종류의 반칙에서 맨시티 선수한테는 레드카드를 안 주고 아스널 선수한테만 줬다는 거야. 그리고 이런 일이 다른 팀과의 경기에서도 똑같이 발생했었고 그때도 같은 심판이었어! 그때도 경기 후에 상대팀이 문제제기를 했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지. 맨시티가 프리미어리그에서 내내 우승하는 동안 이런 판정 시비가 계속 있었는데, 도대체 왜 아무 변화가 없는지 모르겠어!"
나 "흠,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같은 심판이 계속 문제 있는 판정을 했다면 합리적 의심을 할 만하네."
아들 "합리적 의심 수준이 아니라니까? 실제로 많은 프리미어리그 팬들은 거의 확신을 하고 있다고."
나 "축구도 그렇지만 모든 스포츠가 완벽하게 공정할 수는 없어. 아니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 그리고 때로는 그 불공정이 우리 팀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들도 있잖아. 그냥 어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아스널이 진짜 잘 싸웠다고 박수를 보내는 게 팬들이 할 일 아닌가?"
아들 "역대 전적을 보면 맨시티를 이겨야 아스널이 리그 우승 확률이 높단 말이야. 어제는 거의 이긴 경기였는데. 엄마 ooo 선수 알지? 그 선수가 선발 출전하면 우승확률이 80퍼센트가 넘어가거든. 근데 어젠 경기 초반에 그 선수가 부상당해 나가면서 아스널에 완벽한 기회였는데 진짜 화나!"
여기까지는 좋았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어보니 아이가 경기 내용에 대해 억울해하는 게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고, 뭐 한 두 번 겪은 상황은 아니라서 진지하게 듣고 피드백하되 같이 동요되지 않는 전략을 잘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들 "아, 그 선수가 이번 리그에 못 뛰면 좋겠다."
나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그 선수가 네가 좋아하는 클럽의 경쟁 상대인 클럽에 있다는 이유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상대팀이 똑같이 아스널 팀선수한테 그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
아들 "(약간 잘못했다는 듯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아니면... 한두 경기?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돼?"
나 "네가 응원하는 팀을 위해서 기도해야지. 아스널 팀 선수들이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항상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서 경기를 잘 치르게 해달라고, 어제와 같은 억울한 상황이 우리 팀에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야. 만일 네가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라고 생각해 봐. 그런데 금메달 유력 후보인 선수들이 모두 부상당해서 출전을 못하는 바람에 네가 금메달을 땄어. 그렇게 딴 금메달을 보고 사람들은 뭐라고 평가할까? 100% 실력 덕분이라고 할까? 운이 좋았다고 할까? 모두가 최상의 실력과 기량을 갖춘 상태에서 정정당당하게 경기를 치러 우승하는 게 진짜 가치 있는 금메달 아니야? 상대방 팀의 에이스 선수가 부상으로 출전을 못해서 얻은 우승은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할 수도 없어. 모든 일이 그래. 상대가 잘못하길 바라지 말고 내가 잘하면 되는 거야. 그게 진짜 승리야."
축구를 매개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라는 일들을 정말 많이 만나게 된다고, 세상이 내가 생각한 만큼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도 많이 온다고,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일들을 많이 겪는다는 건 그만큼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라고. 아이는 수긍을 하는 건지, 생각이 많은 건지 따로 답하지는 않았다.
나 "그래서 엄마는 항상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세상이 내 생각 같지 않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똑같이 돼버리면 더 나빠질 테니까. 나라도 아니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래도 세상은 좀 달라질 테니까. 그리고 그런 믿음도 있어.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은 나에게, 나의 가족들에게, 나의 아이에게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이야."
차에서 내리는 아들에게 늘 하는 인사 '굿 럭'과 함께 오늘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캄 다운!'
*** 덧, 혹시 독자분들 중 맨시티 팬이 계시다면, 어디까지나 아스널 빅 팬인 청소년의 개인적 발언이니 너무 다큐로 받지 말아 주시길 ^^
*** 커버 사진_©어나더씽킹랩 via Dall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