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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Dec 1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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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를 보고 난 후의 생각들과 이야기들

 * 본 글에는 현재 넷플릭스와 일부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와 관련된 내용들이 자세하게 언급됩니다. 이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는 하나, 혹 <로마>에 대한 관심이 없으셨던 분들이라도 이 글을 먼저 접함으로 인해 <로마>를 감상, 아니 체험하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먼저 읽어보시길 꼭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극장에서 받은 영화 <로마> 포스터. 포스터의 이 장면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일부 상영관에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2018년에도 참 멋진 영화가 많이 나왔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많은 영화를 놓친 아쉬움도 남지만 웨스 앤더슨의 <개들의 섬>을 통해 현시대가 직면한 갈등의 한 단면을 씁쓸하지만 즐겁게 곱씹을 수 있었고, 아름다운 일상의 시와 같은 짐 자무쉬의 <패터슨>을 통해 짧게나마 제가 살았던 뉴 저지의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었습니다. 전 지구적인 이벤트였던 마블 스튜디오의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 <블랙 팬서>의 열풍에 휩싸여 빨리 2019년이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요, <보헤미안 랩소디>는 물론 브래들리 쿠퍼와 레이디 가가의 시너지가 제대로 발휘된 <스타 이즈 본>이 일으킨 음악의 파도에 즐겁게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특히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 대미언 셔젤의 <퍼스트 맨>, 길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 야누스 메츠의 <보리 vs 매켄로>는 개인적으로 올해 기억에 남는 작품들입니다. 이 개성 있는 작품들의 화법은 각기 달랐지만, 제게는 이 작품들 모두 각 세계의 심연까지 파고 들어가 관객과의 감정적인 깊은 조응을 이뤘다는 공통분모로 묶이는 작품들입니다. 이 영화들은 언젠가 각각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라도 남기고 싶네요.


전작과는 너무 다르거나, 전작에서 보여준 미덕을 너무 잘 살렸거나, 그간의 커리어의 집대성인 이 작품들은 각 감독의 연출력은 물론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너무나 뛰어납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 스스로가 태어나고 자란 1970년대 멕시코시티의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차기작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 이미 영화 <로마>는 제 마음속에서 이미 위에 언급했던 작품들과의 동일 선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식 상영 전부터 <로마>가 제75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LA와 뉴욕 비평가 협회 작품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영화에 대한 제 기대감은 그전부터 이미 최고치에 달해있어 그저 기분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위대한 유산>, <이 투 마마>,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칠드런 오브 맨> 그리고 <그래비티>에 이르기까지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감독은 강력한 자장을 지닌 원작을 영화화하는 고난도의 숙제를 맡고도 원작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대중성과 손쉽게 타협하는 법 없이 본인만의 이야기와 화풍을 거침없이 펼쳐왔습니다. <로마>는 그런 알폰소 쿠아론이 그 스스로의 정서와 이야기를 오롯이 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작품이 될 거라는 기대감을 낮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기대로 <로마>를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로마>는 <팬텀 스레드>와 더불어 2018년 제가 본 최고의 영화입니다.


 본 글에서는 우선 <로마>의 플롯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해드리려 해요.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굳이 다 전해드리는 이유는 이 영화의 작은 사건들과 이미지 하나하나를 체험하고 기억할 때 온전하게 감동을 느낄 수 있고, 마치 우리의 삶처럼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가 <로마>에서 느낀 감정과 매력, 알폰소 쿠아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로마>의 플롯은 심플합니다. 1970년대 초반 멕시코시티의 중산층 가정과 그들의 가정부가 겪어나가는 이야기이지요. 중산층 부부의 아내인 소피와 남편 안토니오, 소피의 엄마인 테레사와 네 남매로 구성된 대가족에 가정부인 클레오와 아델라, 이그나치오가 순차적으로 등장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스케치합니다. 그리고는 서서히 이들의 삶에 한 줄씩 균열과 상처의 붓칠이 더해집니다. 영화는 가정부인 클레오의 시선과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아내이자 엄마인 소피 또한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한 축입니다.


클레오와 막내 아들 페페의 행복한 한 때. 더없이 평화롭게 '죽음'의 메타포를 언급하는 이중적인 섬뜻함도 서려있습니다.


 출장을 떠난다고 집을 나섰던 의사 남편 안토니오는 실은 내연녀에 빠져 가정을 내팽개쳤고, 아내인 소피는 생활고의 압박이 시작되고 사춘기 초입의 장남과 아직은 너무도 어린 막내가 각기 날뛰는 집에서 내려앉는 억장을 숨기며 어쩔 줄 몰라합니다.


 주인댁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혼이 나도 싫은 표정이나 대꾸 한 번 할 줄 모르는 순한 가정부 클레오는 페르민이라는 남자 친구와 연애를 하고 있습니다. 페르민의 직업이 무엇인지 제대로 언급되지는 않으나 그는 술과 약물에 빠져 지냈던 유년시절에서 벗어나 무술에 정진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클레오와의 잠자리 전에 집에 있는 집기로 무술 시범을 펼쳐 보이고 그런 그를 클레오는 다정하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클레오는 영화관에서도 키스에 여념이 없는 페르민에게 본인의 임신 사실을 고백하게 되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페르민은 그렇게 그녀를 떠나버립니다.


클레어가 페르민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빛은 곧 그녀에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빛입니다. 그리고, 앞날을 알 수 없는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는 바와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클레오는 임신 사실과 페르민의 변절을 소피에게 고백하며 본인을 해고할 것인지 눈물을 흘리며 묻고, 당장 본인 가정의 일만으로도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소피는 클레오를 끌어안습니다. 이 지점까지가 <로마>의 두 주인공이 겪어온 고통과 갈등의 배경이자 앞으로 맞서게 될 삶의 무게와 그늘입니다. 지금까지는 소피의 집 안의 풍경과 가족들의 모습 외에는 시대적인 배경이나 그림자가 화면에 드리워지지 않았지만 이 지점 이후로 시대의 입김 또한 영화 속으로 소환됩니다.


스스로의 삶의 무게도 버거운 소피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는 클레오. 사고무친의 두 여인의 동행이 시작되는 순간.


 클레오는 임신 3개월 째로 판정을 받은 와중에도 열심히 소피의 가족들을 돌봅니다. 소피는 클레오, 자녀들과 함께 이웃의 별장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는데, 그 이웃은 땅의 소유권 문제로 이웃들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날 밤 별장이 위치한 산에서 불이 나게 되는데 별장에 모인 사람들의 실수인지 혹은 갈등을 빚는 이웃들의 방화인지는 불명확합니다. 많은 이들이 산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취중에 새해의 노래를 부르는 군상도 섞여있고, 남편이 떠난 소피의 사정을 알고 소피에게 추파를 던지는 군상도 있습니다.


산을 뒤덮은 화염은 누군가의 실수였을까요, 아니면 누군가의 광기였을까요.


 클레오는 용기를 내 아이의 아버지인 페르민이 무술 훈련을 하는 장소에 찾아가 그에게 대화를 시도하지만 페르민은 본인과 클레오의 관계, 아이의 존재에 대해 과격하게 부정하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 것을 폭력적인 언사로 퍼붓고는 떠나버립니다. 먼 길을 어렵사리 찾아와 입을 뗀 클레오는 이제 확실히 혼자가 되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오랜 부재에 이상함을 느낀 아들은 소피가 남편의 외도에 대해 분노하는 전화 통화를 엿듣게 되고, 이를 알아챈 소피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아들에게 손찌검을 하지만 즉시 그를 끌어안고 사과합니다. 소피는 혼자가 된 지 오래이고, 이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클레오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소피는 남편이 몰고 다니던 대형 세단을 힘겹게 끌고 다닙니다. 좁은 대문을 극도로 세심하게 운전하며 성공적으로 주차를 했던 남편과 달리 소피는 주행 중에도 사고를 내고, 주차를 하면서도 차와 벽을 부숴버립니다. 그녀에게는 이 대형 세단이 그녀의 삶만큼이나 버거워 보입니다. 클레오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무력감에 휩싸인 사람들 스스로가 암담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클레오가 테레사, 이그나치오와 아기용 침대를 사기 위해 시내로 나간 날, 시내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사방에는 시위를 준비하는 군중의 모습이고 테레사는 유혈사태를 걱정합니다. 이 거리를 지나 가구점에서 평화롭게 침대 가격을 흥정하던 이들에게 셀 수 없는 발포와 함성이 들립니다.


터져버린 유혈 사태. 1971년 정부의 지원을 받은 우익 무장 단체 '로스 알코네스'가 120여명을 사살한 성체 축일 대학살 사태.

 

 창 밖에는 군중들이 끝없이 총살을 당해가고, 가구점으로 도망쳐 온 시위대들을 쫒아 온 무장 세력은 거침없이 시위대를 사살하는데, 무장 세력의 일원 중에는 페르민도 있었습니다. 페르민은 클레오를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워하며 떠나가고, 그 순간 클레오의 양수가 터지며 산고가 시작됩니다.


 클레오 일행은 병원으로 향하지만 120여 명이 사살당한 역사의 광장과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어 한 시가 급한 그들의 발목을 잡고, 2시간 반이 넘어 겨우 병원에 도착합니다. 의사들이 수술복을 챙겨 입을 여유도 없이 머리부터 나온 태아를 받지만 태아는 숨을 쉬지 않습니다. 의사들의 거듭된 CPR에도 태아는 단 한 번의 숨을 쉬지 못한 채 생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클레오는 도저히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이 순간의 고통 속에서도 크게 소리를 내 울지도 못한 채 홀로 이 상황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클레오의 고요한 시간을 소피가 깨웁니다. 소피는 크고 무거웠던 삶의 굴레와도 같았던 남편의 대형 세단을 팔기로 결정하고 더 작은 차를 새로 샀다며 유려하게 주차를 해냅니다. 남편의 대형 세단을 팔기 전에 마지막으로 네 자녀와의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클레오에게 이 여행에 동참해줄 것을 제안합니다.


 해안가로 여행을 떠난 자녀들과 클레오에게 소피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본인도 출판사 일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떠날 것을 선언합니다. 네 자녀들과 클레오에게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주고 안아줄 것을 당부하고 끌어안습니다. 네 자녀는 아빠의 소식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클레오도 이들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가장이 된 소피의 담담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선언. 이제 소피는 어쩔 줄 몰라하며 불평만 늘어놓던 지난 날에서 한 걸음, 아니 더 큰 걸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음날, 소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은 얕은 물가에서만 놀겠다는 엄마와의 약속을 어기고 몰아치는 파도를 향해 바다로 나아갑니다. 이들을 그저 바라보며 가벼운 주의만 주던 클레오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파도가 몰아치고 아이들이 멀어지는, 아이들이 생명에서 멀어질지도 모르는 그 순간에 클레오는 움직입니다. 헤엄을 치지 못해 그간 물에 들어가지 않았던 클레오가 바다로 달려갑니다.


무서워하던 바다로 향하는 클레오.


 클레오의 걸음을 비추던 카메라는 심각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로 시선을 돌리고 아이들은 파도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클레오는 파도를 하나 둘, 셋, 그리고 셀 수 없이 맞아가며 아이들을 한 명씩 붙잡고 뭍으로 돌아옵니다.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진 이들에게 소피가 돌아오고 살아난 아이들은 "클레오가 우리를 구해줬다"며 울먹입니다. 클레오는 그제서야 사산한 아이에 대한 본심을 털어놓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두렵고, 태어나길 원치 않았다고.

 이 순간 이들은 전날 밤 소피가 다짐했던 것처럼 부둥켜안고 하나가 됩니다.


영화의 포스터이자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해변가의 포옹 장면. <로마>는 사람의 살결과 체온이 어우러지는 이 장면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소피의 가족들과 클레오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들이 짓는 표정은 이전과는 사뭇 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평화로움이, 누군가에게는 결연함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몰랐던 것들을 체험한 그들의 삶은 이제 어떻게 흘러갈까요. 집에 돌아와 동료 가정부인 아델라를 만난 클레오는 "해줄 이야기가 너무 많아. 다 해줄게"라며 웃음 지으며 말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까요. 그저 클레오는 아이들이 먹을 아이스크림을 챙기고, 짐을 정리하는 일상으로 돌아와 다음 일을 하기 위해 계단을 구비구비 오릅니다. 그렇게 영화는 클레오가 지나간 자리를 오래오래 비추며 막을 내립니다.







 제가 이해하는 알폰소 쿠아론 영화의 세계관과 화법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하고자 하는 말을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전한다'입니다. 감독들 중에는 범상치 않은 철학을 전하기 위해 플롯과 캐릭터의 관계를 아주 복잡하게 구성하거나, 배경 지식이 없이는 도저히 이야기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함의를 추구하는 감독들도 있습니다. 속된 말로 쥐뿔도 없는데 복잡하기만 한 영상 테크닉이나 개똥철학을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감독들도 있지요. 알폰소 쿠아론은 이런 스타일의 감독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생각합니다.


 <로마>는 제가 생각하는 감독으로서의 알폰소 쿠아론 식 화법의 정점입니다. 모든 상황은 이해하기 쉽고, 화면과 대사의 은유는 이 상황들을 더 몰입하고 이해하기 쉽게 도와줍니다. 이야기의 진행은 옆길로 새거나 불필요한 곁가지를 키우지 않고 멈추지 않고 나아가 결국 가장 효과적이고 임팩트가 있는 방식으로 마무리됩니다.


 물론 알폰소 쿠아론의 이야기와 세계관 설정은 가볍거나 손쉽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상당히 치밀합니다. <칠드런 오브 맨>의 이야기와 에피소드 구성, 인간 군상의 조합들을 돌이켜봐도 아주 촘촘하게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린 세계관 속에서 펼쳐지지요.

P.D. 제임스의 원작과는 크게 다른 노선을 취했음에 원작자도 크게 칭찬했다는 <칠드런 오브 맨>. 현 시대의 난민문제를 선제적으로 다룬 놀라운 통찰력까지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디테일에 강한 그의 그런 최대 장점 중 하나는 과감한 정리에 대한 의사결정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어 원작자의 설정 오류나 영화화 단계에서 원작과 달라지는 부분에 대해 극렬한 지적을 받기로 유명한 <해리포터> 시리즈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이전 시리즈에 비해 본격적으로 어두워지는 세계관과 함께 정보량까지 방대해져 영화화하기 쉽지 않은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가 그의 작품이지요. 실제로 영화화된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원작의 설정과 이야기를 과감하게 걷어낸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기억하는 바가 맞다면,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전 시리즈에 걸쳐 가장 퀄리티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가 되고 원작 팬들의 잡음도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해리포터와 시리우스 블랙의 관계, 어둠과 빛의 진실을 다루기 위해 알폰소 쿠아론은 영화화가 됐을 때 매력적일 수 있는 원작의 요소들을 과감히 정리하고 온전히 본인의 이야기와 색채에 집중했던 것이죠.


디멘터, 늑대인간, 범죄자 등 온갖 어둠과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한 혼란 속에서도 끝내 익스펙토 페트로눔의 빛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그래비티>도 단 한 줄로 플롯이 설명될 수 있는 간단한 이야기의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길지도 않은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죠. 놀람과 절망, 걱정과 환희, 슬픔과 용기, 희망과 감동이 쉴 틈 없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라이언 스톤과 맷 코왈스키의 대화는 길고 끊임없이 계속되지만 지루하거나 군더더기 조차 없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제목 그대로 중력처럼 받들어 이끌어 나갑니다. 딸을 잃고 우주 미아가 되어 동료까지 떠나간 라이언 스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할 관객은 없지요. 이렇게 뻔한 우주 미아극에서 온갖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었던 점에서 알폰소 쿠아론이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 꾼인지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비티> 중 라이언 스톤과 맷 코왈스키의 이 재회 판타지는 제 인생에 손꼽을 만한 명장면입니다.


  <로마>의 세계관은 명확합니다. 집에 귀가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존경의 시선을 받는 아버지의 일탈과 부재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어머니. 폭력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에 휩싸였지만 책임감을 찾을 수 없는 남자 친구의 변절에 혼자 남겨진 여인. 이들의 행보가 영화의 모든 것입니다. 상황들은 이 두 여인이 원하는 방향과는 정 반대로만 흘러가고 이들은 어찌 대처하지도 못한 채 내일을 맞습니다.


 또한 <로마>는 어찌 보면 노골적이기까지 한 방식으로 또렷하게 상반된 이미지들을 쉴 틈 없이 배치합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 방식에 대해서는 개인마다 받아들이는 의견 차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눈에 띄는 장치들과 복선으로 인해 향후 진행이 예측 가능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제겐 이런 어찌보면 뻔한 예측 가능성도 나쁘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초반부터 아이들의 술래잡기에 이어 '죽음'이 언급되고, 클레오가 임신 진단을 받으러 간 병원의 신생아실에 지진이 일어나고,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생아실 아기의 인큐베이터는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벽의 잔해에 깔립니다. 이 직후의 장면은 십자가가 세워진 무덤가로 전환이 됩니다. 클레오의 아기에게 드려진 불길한 그림자인거지요.


 남자 친구인 페르민이 클레오 앞에서 무술 시범을 보일 때 카메라는 페르민의 나신과 남근을 곧이곧대로 보여주며 폭력적인 남근의 이미지를 강화시킵니다. 소피의 남편인 안토니오는 양수가 터져 병원에 실려온 클레오를 마주하고 염려가 되는 척하며 체면을 지키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녀의 수술실에 동행할 것을 피하며 비겁한 모습을 보입니다.


페르민의 육체와 남근은 클레오를 겨누고 위협하는 치명적 무기입니다. 평소에도 그는 쌍절곤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죠.


 소피와 클레오의 염려에도 아이들은 자꾸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소피의 집 안 새장 속 새들이 자꾸만 날아가려는 모습처럼 그들은 하염없이 파도로 뛰어들이겁니다.

 이처럼 영화에는 생명과 죽음, 무지와 폭력, 염치와 무정의 모습들이 병치됩니다. 내 앞에 서있는 사람 조차 어찌 내 마음대로 대하기 어려운 이들보다 더 큰 세상은 살육의 광기에 휩싸여 나약한 이들의 발목을 붙잡고 또 다른 죽음의 구덩이로 끌고 갑니다.


이 다음 순간에 무엇이 다가올지 모르는 채 신생아실 앞에서 신생아들을 바라보는 클레오.


 알폰소 쿠아론 하면 이른바 '롱테이크의 장인'이라는 수식이 떠오릅니다. <칠드런 오브 맨>과 <그래비티>에서 보여준 롱테이크는 정말 환상적이지요. 그런데 과거 이 두 작품에서 알폰소 쿠아론의 비전을 실현시켜줬던 촬영 감독인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이번 <로마>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엠마누엘 루베즈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 감독상을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회 연속으로 수상한 명인이자 거장이지요. 애초부터 알폰소 쿠아론은 <로마>의 촬영 감독으로 엠마누엘 루베즈키를 염두에 뒀지만, 영화의 제작 기간이 길어지며 스케줄 조율이 어려워져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참여하지 못한 상황은 알폰소 쿠아론에게 큰 부담이 됐을 것 같습니다.


 런던 필름 페스티벌 중 한 인터뷰에서 알폰소 쿠아론은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본인에게 직접 촬영 감독까지 겸임할 것을 권유했다고 밝혔습니다. 알폰소 쿠아론이 살아온 공간에서 본인의 기억과 영감이 가득한 영화를 만든다면 본인이 직접 촬영 감독으로서 비전을 화면으로 찍을 것을 권했다고 하죠. 이렇게 해서 알폰소 쿠아론은 <로마>의 감독이자 각본, 촬영 감독까지 겸하게 됐습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본인이 유년시절에 살았던 집의 풍경을 소피의 집으로 구현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고 합니다. 유년시절에 집에 있었던 장식품과 소품들을 가져다 놓거나 고증을 통해 재현하고, 기르던 개와 흡사한 개를 출연시키는 등 감독으로서 소환 가능한 개인의 역사를 모조리 담아낸 것이죠. 자, 저 훌륭한 필모그래피를 보유한 알폰소 쿠아론에게 <로마>는 매우 특별한 영화가 됐습니다. 원작자도 본인, 촬영도 본인, 감독도 본인인 말 그대로 본인이 100% 끌고 나가야 하는 프로젝트인 것이죠. 비단 영화감독이라는 직업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직업을 통 틀어 이렇게 한 개인이 온전히 이끌어가는 프로젝트는 많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굉장한 기회이기도 하지만 굉장한 리스크이기도 하지요.


  이 지점에서 <로마>의 트리비아 중 제가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전체 시나리오를 온전히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알폰소 쿠아론 본인뿐이었고, 매일, 매 촬영마다 배우들에게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연기 디렉션을 해나갔다고 합니다. 배우들은 그 즉시 접한 디렉션에 매우 당황하고 충격을 받는 '실제 감정'을 드러내며 연기를 해나갔고, 알폰소 쿠아론은 이 과정에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환상적인 경험이었다고 감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 그 자체입니다. 혼란스럽죠. 그리고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그 모습 자체입니다.”


 <로마>의 배우들은 소피 역의 마리나 데 타비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문 연기인이 아닙니다. 클레오 역의 얄리차 아파리시오는 교사 지망생으로 정보를 본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일반인인 그들이 카메라 슛이 들어가기 직전까지 시나리오의 상황도 모른 채 궁금해하고 있다가 디렉션을 받고는 '레알 생생한 반응'을 보인 모습이 알폰소 쿠아론의 카메라에 온전히 담긴 것이죠.


<로마>의 세트장에서의 알폰소 쿠아론.


 <로마>에는 알폰소 쿠아론 특유의 영상미와 롱테이크가 유감없이 발휘됐습니다.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디테일하고 멋진 테이크를 촬영한 알폰소 쿠아론의 재능은 정말 찬란합니다. 소피의 가족들이 놀러 간 별장의 숲 속 웅덩이와 산속의 풍경과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해변가의 롱테이크에는 찬사를 아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촬영 능력은 혹자처럼 테크닉 과시를 위해 남발되지 않고 영화의 세계관과 이야기의 펀치 라인의 방점을 찍기 위해 최적의 방식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페르민의 무술 훈련장에서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무술 사범의 동작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실소를 터뜨리지만, 그를 묵묵히 바라보며 따라하는 클레오는 흔들림 없이 그 자세를 해냅니다. 아무도 클레오의 성공을 주목하지 않지만, 그녀는 이를 뽐내려고도 머쓱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순수하고 자기 주장이 세지는 않지만 이 세상과 군중 속에서 무게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 드러나지 않지만 강한 존재입니다. 이 담담하고 짧은 쇼트에 감독의 의도와 마음이 묻어나 좋았습니다.


직접 따라해보지...는 않았지만 눈을 가리고 한 발로 서서 흔들림 없이 균형을 잡는 동작에 담긴 상징성이 계속 마음에 남네요.


 클레오와 소피가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 삶의 갈등에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의 사건이 터지고, 두 사람의 힘으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역사의 광기까지 조여드는 시간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늘을 어떻게든 살아가는 하나가 된 사람들의 모습. 알폰소 쿠아론을 <로마>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은 몰아치는 파도와 같은 삶의 격랑을 이겨내지는 못하더라도 버텨내고자 하는 용기와 연대, 사랑의 모습,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내 눈 앞의 당신도, 내 스스로도, 그 삶도 모두 끌어안는 그 자체.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주역인 소피와 클레오가 연대하는 모습은 현대 여성 영화로서의 정체성도 진하게 담고 있습니다. 영화 연출 상 두드러지게 강조하지 않고 그저 두 여인의 삶과 자연스러운 용기, 연대를 비춰주는 방식이 오히려 여성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또한, 소피의 네 자녀 역시 주인공으로서 성장해나갑니다. 아버지의 부재에 혼란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몫과 숙제는 그들의 것이니까요. 결국 <로마>의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이 영화의 관객인 우리랑 똑같이 본인의 의사건 아니건 간에 삶의 무게를 절감하며 다음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의 전작인 <그래비티>와의 유사점이 있습니다. 관객으로서 영화를 감상하는 수준을 넘어 '체험'하게 됩니다. 관객으로서의 감상과 한 인간의 체험은 매우 다른 경험이지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게 올해 최고의 영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와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입니다. <팬텀 스레드>가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 모두 영화에 등장한 드레스처럼 천의무봉의 경지에 이른 명작이라면, <로마>는 제 삶으로 다가온 체험이었습니다. 파괴와 구원의 모티브가 핵심이라는게 두 영화의 공통점이면서, 두 가지 모티브를 어떻게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느냐가 또 결정적 차이이기도 합니다. <팬텀 스레드>가 ‘내 삶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면 <로마>는 ‘우리를 파괴하는 세상 속, 스스로에 대한 구원’으로 느껴집니다.






<로마>는 넷플릭스의 자본으로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넷플릭스 회원이면 집에서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옥자>의 GV에서 들려준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옥자>의 촬영 감독인 다리우스 콘지와 음흉한(?) 아이디어를 냈는데, 도저히 스마트폰으로는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운 끝내주는 원거리 테이크를 찍어보자는 의견에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겁니다. 영화 중 옥자가 고속으로 내달리는 장면이었는데, 제가 본 명필름 아트센터에서 보니 기가 막힌 장면이었습니다. 대형 스크린에서 이 장면을 보고 나니 도저히 <옥자>를 집에서 PC로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볼 자신이 안 생기더군요.


 여담으로 넷플릭스에서는 거액의 제작비를 지원하면서도 감독의 크리에이티브 영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경험을 전하는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며 좀 복잡한 심경이긴 했습니다. 코엔 형제, 알폰소 쿠아론, 봉준호...이런 감독들의 영화에 큰 돈을 내어주면서도 연출에 관여하지 않고, 넷플릭스에만 공급을 하든 영화관 상영을 하든 개의치 않는 넷플릭스. 단지 FAANG의 패기로만 받아들이기에는 감독과 작가들이 목말라하는 예산과 공급의 문제를 너무도 시원시원하게 대처한다는 생각이 들어 좀 무섭기도, 꽤 고맙기도 합니다.

 

 앞서 여러 번 강조했던 바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강조하면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이 직접 촬영 감독으로 활약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체험에 가까운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편한 감상의 방식도 좋겠으나, <로마>가 소수의 극장에서 상영을 하는 기간 내에 그 극장에서 보시기를 최우선적으로 권합니다.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언급했는데, 알폰소 쿠아론은 멕시코시티의 풍광을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사운드에도 전력투구를 했습니다. 멕시코시티 내에서 들리는 자연 소음까지 모조리 담아낸 사운드 소스가 일반 영화의 6배의 용량에 달한다고 합니다. 즉, 영상과 사운드를 담아낼 수 있는 스펙이 높을수록 체험의 수준이 비례한다는 뜻이겠지요. 전 개인적인 사정으로 비록 그곳에서 보지 못했지만, <로마>를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 스펙으로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상영관은 명필름 아트센터입니다. 멀티플렉스 체인에서는 상영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좋은 상영관을 찾는데는 노력이 좀 필요하긴 합니다. 이런 불편함에도 <로마>는 극장에서 보시기를 꼭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본 상영관은 신도림의 씨네큐 였고, 좋은 상영관이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를 수 있는지 여부 자체가 미디어 시장의 큰 관심사이자 논란입니다. <로마>가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를 수 있을까요? 수상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로마>가 이뤄낸 성취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더 많은 분들이 <로마>를 체험하셨으면 합니다.


 * 영화 <로마>의 사운드트랙은 지금, 당신의 음악 FLO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지금 FLO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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