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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호 Feb 24. 2023

<국가>

Plato

플라톤의 국가(정체),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역주, 서광사

국가,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철학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대한 담론 중 하나는 ‘정의’이다. 그리고 서양 철학의 탄생을 이끈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세워 국가에서 올바름을 정의하고, 이를 인간에게 적용하여 보편적인 ‘올바름’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상적 국가를 이끌기 위한 수호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선의 이데아’라고 하면서 그것을 수호자들에게 알게 하기 위한 교육과정을 조직한다. 그리고 그 수호자가 이끄는 정체는 이상적일 것이라 주장한다. 이후 올바르지 못한 정체(政體)를 논의하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올바름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책을 닫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올바름은 ‘각자가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수호자 계급, 수호자의 보조자 계급, 그리고 각종 재화와 서비스 등을 생산하는 계급이 각자 할 일을 함으로써 국가 자체가 성립되고 그것이 지혜, 용기, 절제를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이를 인간의 혼에 대응시키면 각각 이성, 기개, 욕망의 부분이 될 것이다. 이 세 부분이 각자 제 역할을 하고, 특히 욕망의 폭주를 이성과 기개가 잘 통제한다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결말만 서술하였으나 실제로 플라톤은 해당 결론에 이르기까지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고, 그것이 인간에게 연결되고, 올바름이 무엇인지 합당한 논리를 사용하여 전개한다. 또한 플라톤이 설명하는 ‘이데아’ 역시 매우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지식의 외형 안에 변화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플라톤은 철학자와 철학자가 아닌 사람을 구분하면서 이데아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플라톤은 배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곧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참된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에는 구경을 좋아하고, 듣기를 좋아하고, 전문적 기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나, 다른 한쪽에는 진리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의 부류는 아름다운 빛깔과 소리 등을 반기지만, 그들의 사고는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을 알아볼 수도, 반길 수도 없다. 이들은 닮은 것을 닮은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생각하기에 일종의 꿈을 꾸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아름다운 것 자체’를 믿고, 이에 관여하는 것을 알아보고, 관여하는 것을 그것 자체와 혼동하지 않는다. 이들은 깨어 있는 상태이다. 후자의 사고는 알고 있는 자의 것으로서, 우리는 이를 인식(지식, 앎)이라 하겠으나, 전자의 사고는 의견을 갖는 자의 것으로서 의견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만약, 의견을 가지지만, 인식하지는 못하는 사람이 우리를 거짓말쟁이라 주장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먼저, 인식하고 있는 자는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을 것이며, 그 무언가는 ‘있는 것’일 것이다. 또한, ‘완벽하게 있는 것’은 완벽하게 인식될 수 있으나, ‘어떤 식으로도 있지 않은 것’은 무슨 방법으로도 인식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것이 ‘있으면서’ ‘있지 않기도’ 하는 그런 상태의 것이라면, 그것은 ‘순수하게(절대적으로) 있는 것’과 ‘어떤 식으로도 있지 않은 것’ 사이에 위치할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는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무지가 상관하는데, 그것들 ‘사이에 있는’ 것에 상관하는 것은 무지와 인식 사이의 어떤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과는 다른 능력이므로, 인식과는 서로 다른 별개의 대상에 관계할 것이다. 따라서 의견과 인식은 구분되고, 인식은 본성상 ‘존재하는 것’에 관계하여,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될 것이다.

  의견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의견은 무지와 구분되는가?)에 앞서, 우리는 ‘능력’을 ‘있는 것들’의 어떤 부류로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모든 것도 무엇이든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시각과 청력이 그런 ‘능력’에 속할 것이다. 이 ‘능력’은 아무런 빛깔도, 모양도 볼 수 없으며, ‘능력’은 그것이 관계하는 대상과 그것이 해내는 작용만을 주목한다. 동일한 대상에 관계하며 동일한 작용을 해내는 것은 동일한 ‘능력’으로 부르되, 다른 대상에 관계하여 다른 작용을 해내는 것은 다른 ‘능력’으로 부를 것이다. 이때 인식을 우리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는 차원에서 일종의 ‘능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견 역시 우리가 ‘의견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능력이라 부를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의견과 인식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서로 다른 능력이라고) 앞서 합의했기에 각각 본성상 상이한 일을 할 것이고, 상이한 대상에 관계할 것이다. 

  인식과 의견이 관계하는 것과 그 능력을 다시 정리해보자. 인식의 능력은 ‘존재하는 것(실재)’에 관계하며,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고, ‘의견’의 능력은 ‘의견을 갖게 됨’일 것이다. 그리고 ‘있는 것’이 인식의 대상이라면, 의견의 대상은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의견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의견의 대상은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적어도 ‘어떤 하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있지 않은 것’에 무지를 대응시키고, ‘있는 것’에 인식을 대응시켰기에, 의견은 ‘있는 것’이나 ‘있지 않은 것’ 중 어느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어떤 것이 ‘있으면서’ ‘있지 않기도’ 하는 그런 상태의 것이라면 ‘순수하게 있는 것’과 ‘어떤 식으로도 있지 않은 것’ 사이에 자리 잡고 위치해 있을 것이며 이것에 관계되는 것은 인식과 무지도 아니고, 그 중간의 것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둘의 중간에 우리가 의견이라고 일컫는 것, 의견의 대상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의견은 명확성에 있어서 인식을 능가할 수 없고, 불분명함에 있어서 무지를 능가할 수 없기에, 그 인식과 무지 사이에 위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견의 대상으로, ‘있음’과 ‘있지 않음’ 양쪽에 모두 관여하고, 어느 한쪽만의 것으로서 부르는 것이 옳지 못한 무언가라고 부를 것이다. 만약 ‘아름다움 자체’라던가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아름다움의 본모습(이데아)을 믿지 않으면서, ‘많은 아름다운 것(사물)’은 믿는 사람, 다시 말해 ‘아름다움’, ‘올바름’이 ‘하나’라고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름다움, 올바름, 신성한 것이나 큰 것, 작은 것, 가벼운 것들이라 부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추함, 올바르지 않음, 신성하지 않음, 작음, 큼, 무거움이라고 부릴 것이다. 즉 우리는 상대적 관점에 따라 그것들을 다르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해서 어느 쪽 ‘이다’라고 할 수도 없고, 어느 쪽도 ‘아니다’라고 할 수도 없고, 양쪽 다‘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들을 ‘있음’와 ‘있지 않음’의 중간 위치에 배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름다움이나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관계된 많은 관습이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중간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아름다운 그런 것들이 포착된다면, 그것은 의견의 대상이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할 것이다. 다중이 옳거나 좋은 것, 또는 아름다운 것으로 믿는 것들은 의견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추가 해석 : 어떤 사람이 튤립꽃 애호가라고 하자, 그는 튤립꽃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자신이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튤립꽃이 아름답지 않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튤립꽃이 ‘아름답다’, 혹은 ‘아름답지 않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둘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선 논증에 의해 튤립꽃에 관여하는 것은 인식이 아닌 의견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튤립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워서’가 아닌, ‘아름다움’에 대한 의견에 근거한 것이다) 

  ‘많은 아름다운 것(사물)’을 보되, ‘아름다움 자체’를 못 보는 사람들을, 그리고 ‘많은 올바른 것’을 보되, ‘올바름 자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들이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은 갖지만, 자신들이 의견을 갖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에 반해,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들’을 보는 사람들은 인식하지, ‘의견을 갖는 게’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인식이 관계하는 대상을 반기며 사랑하나, 먼젓번의 사람들은 의견이 관계하는 대상들을 반기며 사랑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 ‘의견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불러야 할 것이다. 반면 ‘각각의 실재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처럼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논증은 시대상에 상관없이 그럴듯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이데아가 있다고 하고 플라톤의 다음 주장인 ‘선의 이데아’에 대한 논의로 이어가  자.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의 지도자인 철인 치자는 ‘선의 이데아’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지도자가 그것을 알아야 할 이유와 선의 이데아를 알기 위한 교육 방법까지 설명한다. 다만 플라톤은 올바름과는 달리 선의 이데아가 무엇인지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세상에 이데아가 존재할 수 있는가? 선의 이데아라는 게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한 플라톤 철학에 대한 고찰을 넘어선 이야기이므로 우선 플라톤 철학 내에서 선의 이데아를 검토해보도록 하자. 먼저 이데아는 존재하고 선의 이데아는 플라톤이 말한 대로 이를 알게 된 수호자가 이상 국가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선의 이데아를 신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선’을 태양에 빗대어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에서 ‘지성’과 ‘지성에 알려지는 것들’에 대한 참된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선의 이데아’는 인식하는 것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인식하게 하는 힘이다. 이 ‘선의 이데아’는 ‘지성’과 ‘지성에 알려지는 것들’보다 한결 더 훌륭한 것이고, 이들은 ‘선의 이데아’와 닮았으나, 그것 자체라고는 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태양이 보이는 것들에 생성, 성장을 제공해 주는 것에 빗대어, ‘선의 이데아’가 인식되는 것들의 ‘인식됨’의 원인을 넘어서서, 그것이 ‘존재하게’ 되고, 그것이 ‘본질(실재성)’을 갖게 하는 것이 그것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선’은 단순히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를 초월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의 이데아’는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하고자 하는 자가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만족할 만한 것이 모든 것을 초월한 ‘신’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게다가 이미 성경에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 곧 하나님이라고 잠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적인 힘을 통해서 선의 이데아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 플라톤은 어릴 때 올바른 시가 교육과 체력 교육을 하고 이후 수학, 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의 교과목을 수호자에게 가르친 다음 변증술을 배우면 선의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플라톤은 <국가>에서도 다른 책에서도 변증술에 있어서 엄청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그 선의 이데아가 어떤 것인지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플라톤 이후 철학자들의 어떤 논의에서도 이상적 국가로 이끌 ‘선의 이데아’가 드러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과연 ‘선의 이데아’는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나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선의 이데아’에 도달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논리 체계 중 가장 엄밀하고 논리적인 수학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수학을 감각으로 알 수 없고, 오직 지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추론적 사고가 이에 관여한다고 이야기했고 ‘선의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한 교과목 중 1순위에 놓았다. 하지만 수학은 이미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서 완벽한 학문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수학을 기반으로 한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계 학문과 공학 역시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과학 자체가 완벽하다는 논리는 수없이 변화하는 패러다임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한 변증술이 탐구의 주된 방법인 철학은 완전한가? 적어도 지금 상태에서는 철학이 완전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은 앞선 시대에 제시된 명제가 후대의 학문에 의해 부정되기도 하며 끊임없이 자체적인 변증술적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을 통해서 어떤 완벽한 체계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적어도 현재의 철학은 완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완벽한지에 대해서 철학적, 과학적으로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이성만으로 완벽 그 자체인 ‘선의 이데아’에 접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구상에서 인간의 개체수를 뛰어넘는 개미에 빗대어 이를 설명할 수 있겠다. 우리는 개미들의 체계적인 움직임과 역할 분담, 그리고 개미집의 구조 등에서 그들이 동물 중에서 매우 발달한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미의 이성이 인간을 뛰어넘었다고 하지는 않고, 개미들의 체계나 건축물 등이 인간의 것을 뛰어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같은 신의 피조물들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신과 인간의 격차는 이보다 어마어마할 것이고 단순히 인간의 힘으로 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책을 꺼내 들었다. 성경에서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을 이성적인 근거에 기반하여 받아들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성적인 근거들이 성경 자체에 대한 이해를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성만으로는 선의 이데아, 즉 신에게 도달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철학을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생각을 분석하고 행동을 매우 세심하게 분석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성의 체계를 주의 깊게 배우고 이를 성경과 대비해 보면서 성경에 있는 개념을 더 충실하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철학의 정수인 <국가>를 읽은 것은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2번째 로 책을 읽으면서 플라톤이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을 봤을 때, 정말 기원전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고 엄밀했다. 만약 이 책을 읽는다면 플라톤의 주장을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논리적 전개를 따라가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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