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이 대학으로 진학할 때 나는 간호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당시에도 여자 군인은 희소했다. 한해 임관하는 간호장교도 100명을 채 넘지 않았다. 내가 사관학교를 들어가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나를 ‘페미니스트’로 오해하였다. 다만, 나는 남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사관생도의 일상은 사소한 것부터 규격화되어 있었다. 아무리 짧은 거리도 모자를 쓰고 2열 종대 열을 맞추어 다니게 하였다. 생도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의 서랍장을 지급받았는데, 서랍 안을 정리하는 법도 정해져 있었다. 맨 위부터 브래지어, 팬티, 러닝, 양말 등의 순서로 놓았는데, 한 달에 한번 내무검사 때 정리 상태를 검열받았다. 그렇게 4년 동안 50번은 족히 내무검사를 받았지만, 졸업 후 나는 서랍 정리는 일절 하지 않았고, 줄을 서게 되는 상황도 최대한 피하였다. 이름난 맛 집이라도 줄 서는 식당은 아예 가지 않았다. 친구나 동료와 길을 걷다가 무심코 열이 맞추어질라치면 서둘러 옆으로 비켜섰다. 패션의 완성이라는 모자는 당연히 내 옷장에 없었다.
졸업식 직전까지 10명이 조금 안 되는 동기생들이 스스로 선택한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학교를 나갔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이상은 같이 강변가요제를 나가는 것이 꿈이었던 생도는 가요제 출전이 금지라는 사실을 알고 ‘대학생’이 되기 위해 학교를 나갔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꿈이었던 생도는 바우하우스는커녕 앞으로 몇 년은 투박한 막사와 군 병원을 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학교를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두 생도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동기생들이 하나 둘 학교를 떠나는 동안에도 나는 몇 가지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경신하며 학교에 남았다. 사관학교 최초로 학사경고를 받은 생도, 학보사 편집국장에게 관례적으로 수여되는 졸업 공로상을 유일하게 박탈당한 생도, 별 이유 없이 결시하여 모든 교수와 훈육관의 공분을 산 사관생도…. 전공과 교양과목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재 시명단에 내 이름을 올렸다. “거기(재시 고사장)에 가면 L이 있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건 군사훈련도 마찬가지였다. 위장을 코스모스로 하는 수준이니. 말해 뭐 하겠는가.
IMF가 터지기 직전 소위로 임관하여, 10년간의 유례없는 불황의 시기를 군대 밥 먹으며 무사히 넘겼다. 2년마다 새로운 발령지를 옮겨 다니길 5번, 나는 열심히 새로운 일상을 구축하고 다시 떠나기를 반복하였다. 나가야 할 때가 되어 전역을 할 때까지.
그 후, 지금의 직장에 들어와 한 곳에서 10년째 일했다. 전역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땐 2년을 주기로 떠나야 하는 훈련된 습관 때문에 답답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과 함께 산과 들로 돌아다녔다. 차 트렁크에는 항상 돗자리와 버너, 라면 따위를 쟁여놓고, 마음이 내키면 어디라도 당장 자리 펴고 앉아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돌아왔다.
내가 직장에서 승진을 하고, 남편의 자산이 쌓여가면서 우리의 발걸음도 무거워졌다. 더 이상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버너는 녹슬어 갖다 버렸다. 주말에도 일을 할 때가 많았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제야의 종소리를 TV에서 듣고서야 또 한 해가 훌쩍 떠나가고 있음을 알아채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지금 여기' 다.
내 마음이 ‘적막하고! 적막하다!’ 고 아우성 치기 시작한 지는 꽤 되었다. 올해 3월에 심한 빈혈과 탈모를 공식적인 사유로 몇 개월간의 휴직을 했다. 조직에도 속하지 않으며 노동의 의무도 없는 시간이었다. 해가 뜨고 지고, 하루가 가는 것을 오롯이 지켜볼 수 있었다. 나에게 계속 물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마음이 한참 만에 답했다. 여기서 떠나고 싶다.
머리가 묻는다. 어디로?
복직하고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재미있었던 것은 재미없어지고, 익숙했던 많은 것들이 낯설게 보인다. ‘다시 길을 나서야 할 때이다.’ 짧은 여행 따위로는 해결되지 않을 일이다.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빈손으로 다시 새로운 길 위에 서는 것이 맞는 걸까?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얻을 순 없는 것인가? 그저 계산하느라고 행동은 없이 생각만 바쁠 뿐이다. 하도 제자리에서 맴만 돌다 보니 머리가 띵할 정도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없어도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이란 걸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러니. 한 발 쓰윽 디밀어 넣고 눈치만 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