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비서가 Feb 05. 2021

제2화 간호사로 일할 것인가?
엄마로 살아갈 것인가?

경력단절 간호사,  엄마로 살기 위해 일을 버리다

신경외과 근무 33세 간호사

“저는 밤 근무 때 새벽 동틀 무렵이 정말 견디기 어려웠어요. 쉴 틈 없이 수액을 갈고, 스스로 몸을 못 움직이는 환자들은 욕창 생길까 봐 2시간씩 체위변경을 해줘야 하거든요. 그렇게 꼬박 뛰어다니다 보면 정말 발바닥에 땀이 나요. 하나만 더 하고 간호기록도 좀 하고 화장실도 가야 하는데… 그 틈에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몸을 바삐 움직이는 사이에도 쏜살같이 지나가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 동이 트는 거예요. 소변은 하도 참아서 방광은 탱탱하게 차 있고, 커피는커녕 물도 한 잔 못 마셔서 입은 마르고 말이죠.”


그녀는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이야기를 잠시 멈추더니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옆에서 엄마를 찾으며 칭얼대는 갓난아기 침을 닦아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근무했던 병동이 11층이었거든요. 아! 그때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새벽하늘이 얼마나 예쁜지. 근데 저는 문득 ‘이 밑으로 떨어지면 편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을 하다가 그녀는 문득 나를 쳐다봤다. 공감을 구하는 간호사의 눈빛을 마주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지요. 알고 말고요. 너무 아름다운 새벽이지만 지친 몸과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못 견디게 슬픈 그런 하루의 시작 말이지요”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아침밥이 나오기 시작해요. 아, 애가 깰 때가 되었네. 곧 어린이집 차가 데리러 올 텐데, 남편이 밥은 챙겨줬나? 아이 양말은 신겼나? 하는 갖가지 상념이 우르르 스쳐가요. 제가 담당한 환자들이 처방대로 식이를 받았는지 확인하고 아침 약을 차리러 간호사실로 달려가면서 집 생각, 아이 생각은 어느새 머리에서 사라져요. 아침 근무자가 올 때까지 해야 할 일이 또 장난 아니거든요. 제가 제대로 마무리 못하면 다음 근무에 차질이 생기거든요. 밤 근무 때도 일이 많지만, 낮에는 검사에 처방에 입원과 퇴원 업무에 더 바쁘고 힘든 걸 제가 잘 아니깐.”


그녀는 지방 간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서울의 대형 대학병원에 신규 간호사로 입사했다. 병동 업무에 대한 두려움, 선배 간호사와의 갈등 등 통과의례처럼 겪는 일들에 적응하면서 간신히 3년을 버텼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1년 뒤에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밤낮이 바뀌는 불규칙한 3교대 근무는 회복되지 않은 몸을 더욱 지치게 했다. 밀려드는 병동 업무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퉁퉁 불은 가슴이 아프면 그제야 집에 두고 온 갓난아이가 미칠 듯이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이를 맡겨둔 동네 이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가 열이 나고 토해서 병원을 데려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낮 근무라서 인력이 있던 참이라 조퇴를 하고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급성장염이었는데 의사는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몇십 년을 아이 키우는 일을 해온 동네 이모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매일 새벽바람 맞고 밤바람 맞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스트레스받을 만하지요”


“이모님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분노가 올라왔어요. 누군가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죠.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났고 엄마가 되었는지’ 말이죠. 그때까지 전화도 받지 않는 남편한테도 화가 났어요.


28세의 그녀는 바로 그날 병원에 육아휴직 의사를 밝혔다. 다시 복귀하는데 5년이 걸렸다. 아이를 품에 안아 키워보니 떼어내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5년간의 경력단절 기간은 다시 대학병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제약조건이 되었다. 다행히 간호인력 취업교육센터의 도움으로 중소병원에 취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급여는 경력단절 전에 받던 60% 수준밖에 안 되지만 병원이 집에서 가까워 출퇴근 시간을 아껴 아이 볼 시간이 많아져 좋다고 이제 33세가 된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잠깐 말을 멈추고 아까부터 진동을 울려대던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일어나야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나는 개의치 말라는 몸짓을 하며, 급하게 몸을 일으키는 간호사를 따라 일어나 배웅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간호사들은 행동이 빠르다. 밥도 빨리 먹고, 화장실도 보통 여자들보다 몇 배는 빨리 다녀온다.




2012년, 간호관련 단체에서 일을 시작한 지 3년 차가 되었을 때 나는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대학원 공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일과 가정을 병행하며 공부까지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신촌에 있는 학교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과 금요일에 수업을 받았다. 목요일은 퇴근을 하고 삼각김밥을 입에 물고 택시를 타고 달려도 매번 지각, 금요일은 회사에서 오는 연락을 받느라 수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날도 있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학부 공부에 비해 학생 참여도가 높고 토론식 수업방식이 내게 잘 맞았다. 무사히 5학기를 마쳤지만 도저히 논문을 쓸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 기관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세계간호사 대회를 막 유치했을 때였다. 간호사들의 올림픽 같은 건데 거의 20년 만에 재유치한 것이라 다들 기대가 컸다. 사무국이 구성되었고 국장으로 실무를 총괄하게 되면서 자연히 논문은 뒤로 밀리게 된 것이다.


2015년, 6월, 메르스 감염사태의 한 복판에서 세계간호사 대회를 무사히 치러냈지만 결국 몸에 무리가 왔다. 덕분에 3개월간 휴직을 냈지만  내 사전에 그냥 쉬는 법은 없었다. 이 휴지기를 활용해 미뤄뒀던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주제는 경력단절 간호사의 재취업에 대한 질적 연구였다.  휴직하기 직전까지 했던 업무가 바로 경력단절 간호사 재취업을 지원하는 국고지원사업이었기 때문에 가장 적절한 주제였다. 워낙 여성의 자기 계발에 관심이 컸고, 업무를 하면서 간호사의 경력단절을 해소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나는 경력단절 후 막 재취업한 11명의 간호사를 대상으로 심층면담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녀와의 면담 이후, 8명의 간호사를 더 만났다.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배 간호사들의 삶을 보며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때가 되면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요.  
엄마로 살아갈 것인가?  간호사로 일할 것인가?
둘 다 해내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것을요


간호사들은 3년 차가 되면 보통 두 단계의 고비를 넘긴다. 첫 번째는 졸업 후 신규 간호사로 병원에 막 입사했을 때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실제 임상에서 적용할 때의 그 막막함! 이 시련을 극복하지 못한 신규 간호사는 4년간의 대학공부와 어렵게 따낸 간호사 면허증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택한다. 연간 15%가 넘는 간호사가 이 길을 택한다. 두 번째는 결혼과 출산의 시기를 거치면서 일과 아이 중 양단간의 선택을 해야 할 때이다. 이런저런 사유로 간호사라는 직업을 버리는 간호사가 절반에 달한다.


다행히 나는 이 두 단계를 무사히 통과하여 11년을 임상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경력단절의 터널을 피해 오르막길을 타 넘어 그 시기를 통과했다. 터널의 어둡고 답답하고 숨 막히는 고통에 버금가는 매서운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았다. 남편을 포함하여 아이까지 가족의 이해와 지원이 많은 힘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 나를 지탱하게 해 주었던 것은 바로 이 한 문장이 주는 힘이었다.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마치 작업을 완수하는 것 같이 시련을 완수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나는 그 시절,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자주 읽었다. 물론 그 시간을 아우슈비츠의 무지막지한 시련과 맞비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의미 없는 시련은 없으며, 시련 속에 기회가 숨어있다는 것, 그래서 오히려 시련으로부터 등 돌리기를 원치 않았던 그들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배우려고 애썼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고통과 실의에 빠져있는 수용소 동료들을 위로하기 위해 릴케의 시를 인용하였다. 마치 작업을 완수하는 것 같이 시련을 완수한다니. 우리의 모든 시간은 다 의미가 있다. 그것이 시련으로 점철된 시간들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경험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지금, 그때의 나와 같은 시간을 걸어가고 있을 28세, 33세의 모든 간호사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피하지 말고 고스란히 겪어나가길. 그 경험은 우리의 삶 속에 가장 귀한 성과로 남을 것이기에. 마치 작업을 완수하는 것 같이 시련을 완수하길 바란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제4화 다시, 길 위에 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