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야. 왜 자꾸 흰 우유를 사 와? 딸기우유 사 오라니까?”
“매점에 딸기우유 안 판다니까? 그냥 오늘은 그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구의 주먹이 날아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환과 진영의 옆에 착 붙어서 실세놀이를 하던 현구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소문을 들으니 깡패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한껏 심취한 주환과 진영은 마치 과거 종로를 주름잡던 주먹패를 결성하기라도 하는 듯 진짜 주먹질을 하는 아이들과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다른 녀석들에 비해 체격도 작고, 악다구니도 약한 이 불쌍한 현구는 사자의 축에 끼지 못했다는 분함에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짓밟는 데 총력을 가했다.
“야. 왜 이렇게 내 말에 꼬리를 달아? 나 황현구야. 현주환이랑 김진영 없으니까 뭐 내가 족밥이라도 된 거 같냐?”
솔직히 족밥같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얼룩말도 일대일로 싸우라고 하면 하이에나보다는 사자가 더 무섭지 않을까? 솔직히, 황현구 정도는 한 번 개겨 볼 만한 상대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평생 육식을 해보지 않은 초식동물들은 태생적으로 육식동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초식동물들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 학교에서 주먹을 꽤나 쓴다는 녀석들도 타고난 DNA의 수혜를 받은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급격하게 덩치가 커진 녀석들에게 쉽사리 행동을 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친근한 태도로 그들을 자신의 무리에 데려가려는 노력까지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와. 너 키 진짜 개 크다. 몇이냐?”
“나 얼마 전에 쟀을 때 187? 몰라. 그 정도 될걸?”
“야. 잘됐다. 오늘 7반이랑 농구 내기 했는데 같이 할래? 너 있으면 센터는 잡을 듯.”
“나 농구 잘 못하는데.”
“괜찮아. 골밑에서 그냥 공만 잘 받아.”
나도 2차 성징이라는 하늘의 축복을 받아, 어서 이런 거지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원체 키가 작으셨던 부모님의 키를 보며 나에게는 그런 꿈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이미 단념했다.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생이 되고 나서도 이들의 괴롭힘은 연좌제처럼 이어졌고, 나는 익숙하게 녀석들의 괴롭힘을 받아들였다. 황현구 이 자식은 언제나 자신의 분이 다 풀릴 때까지 주먹질을 했다. 제 풀에 지칠 때까지 주먹질을 하던 녀석은 항상 수업시간 종이 치고 나서야 가죽이 헐거워진 샌드백을 뒤로하듯 자연스럽게 교실로 돌아갔다. 바닥에 쓰러져 온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일어나려는 찰나 어디선가 작지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 살려주세요.”
“네? 뭐지? 누구세요?”
“살... 살려주세요.”
엄청나게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자, 다리가 부러진 개미 한 마리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힘겨워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개미를 손으로 집어 들어 올렸다. 미세한 진동을 내며 가느다란 몸뚱어리를 떨고 있던 녀석은 내게 계속해서 살려달라는 말을 호소했다. 죽어가는 곤충을 살리는 방법은 알지 못했으나, 우선 녀석을 살리기 위해 수돗가로 가 소량의 물을 담아 개미의 주둥이 앞에 놓아주었다. 빨래집개 같은 입을 하고 있는 녀석은 동그란 물의 결정이 잡힐 만큼 미세한 양의 물을 들어 올려 목을 축였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듯 한 녀석은 이전보다 조금은 더 선명해진 목소리로 내게 가족들을 살려달라며 애원했다.
“제발 저희 가족들을 살려주세요. 제 말을 들리신다면 제발요. 부탁드릴게요. 커다란 고양이가 저희 집을 부수고 있어요. 당신은 그 고양이보다 훨씬 더 크니 저희 가족을 살려주는 건 일도 아닐 거예요. 제발요.”
벌벌 떨면서 자기보다 거대한 존재에게 구원을 원하는 녀석의 모습에서 내 과거가 떠올랐다. 쉬는 시간이 끝난 종이 쳤음에도, 나는 교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족을 살려달라는 이 작은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녀석이 알려주는 대로 개미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녀석이 말한 자리는 이미 고양이가 난도질해 굴이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개미는 형제와 친구들을 잃었다는 사실에 끊이지 않는 통곡을 이어갔다. 서글프게 울고 있는 녀석을 외면하기도 힘들었고, 지금 학교에 돌아가도 엄청 혼날 것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나는 녀석을 소중한 물건 다루듯 조심스럽게 들고 집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집 앞에서 버려진 페트병에 놀이터 흙을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 흙을 반쯤 담은 페트병 위에 녀석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녀석은 내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정말 고마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듯 친구와 가족을 잃는 녀석을 구해줬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반대로 가방도 채 가져오지 않고 무단으로 학교를 나가버린 후폭풍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어차피 매일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시는 엄마, 아빠는 내게 관심이 없으니 크게 신경도 쓰지 않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다름 아님 황현구였다. 아마, 오늘 갑자기 자기 눈 밖에 사라졌으니 산산 조각난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학급 내 입지를 더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오늘보다 더 심하게 때릴 것이 분명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날 보며 개미가 내 안위를 물어보았다.
“괜찮아?”
“아... 어.”
“무슨 일이야? 표정이 어두워.”
“아니. 별일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내가 너한테 보답할 기회를 줘. 내가 어떻게라도 네게 도움을 줄게. 널 위해서 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
“풉. 고양이 한 마리에 멸족당한 네가 무슨 수로?”
“혹시 모르잖아. 내 말이 너에게 큰 힘이 될지. 말해봐. 네 고민을.”
어떻게 보면 난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굉장히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애들이 있는 데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선생님들. 이미 소위 일진이라는 놈들한테 두들겨 맞는 것이 당연한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학급 동기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 엄마, 아빠. 지금껏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개미에게 풀어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한참을 울면서 지난날의 서러움과 분노를 녀석에게 털어내자 개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전했다.
“고생했겠다. 외로웠겠어.”
페트병에서 더듬이를 째깍거리던 이 조그만 생명체가 내뱉은 짧은 두 마디는 내 심장을 시큰거리게 했다. 학창 시절의 절반 이상을 괴롭힘과 폭력으로 시달리던 내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다리 한쪽을 쩔둑거리던 개미였다. 그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개미와 하루 종일 떠들다 잠에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갈 걱정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자, 개미는 큰일 없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혹여라도 두려워했던 일들이 현실로 일어난다면 가슴속에 일렁이는 감정보다 머리로 계산된 판단에 더 집중해 보라고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개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선생님은 평상시 조용했던 내게 무슨 일 있냐고만 말씀하셨지, 중간에 집에 간 것에 대해 질책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얕은 파도 하나가 지나간 뒤 가장 걱정스러웠던 황현구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파도가 되어 날 몰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