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평가는 BA입니다, 매출 성장률도 좋지만 영업이익 상승을 위해 좀 더 노력해주세요.”
평가는 9단계로 나뉘었다. ABC를 2개씩 조합하면 된다.
본사에 있을 때 나의 평가수치는 주로 BA였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BA’ 정도’는 당연했다. 처음 C평가를 받은 것은 ‘휴직’을 선언한 이후다. 1년이 넘는 시간을 계속 해외출장을 다녔고, 그 끝에 나는 불면증을 얻고 퇴사를 선언했다. 함께 출장을 다니던 부장님이 먼저 퇴사한 후였다. 상무님은 나에게 퇴사대신 휴직을 권했고, 그렇게 3개월을 쉬고 돌아온 나의 평가는 C였다. 그전까지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들, 그리고 그 일의 힘듦에 의해 휴직을 했다고 한들, 남들이 일하는 3개월간 휴직을 한 나에게 평가를 잘 줄 수는 없겠지라고 힘써 이해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본사를 떠나 점포로 이동을 했다.
‘일단은, 10개 브랜드 교체가 목표다.’
점포에서의 업무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본사 글로벌소싱이란 부서에서 여러 가지 직무를 거치며 5년을 넘게 일하긴 했어도, 입사 후 처음 직무는 경기도에 있는 B백화점에서 현장관리직이었다. 신입이었을 때는 각 매니저, 직원 한 명과 실랑이를 하는 것도 힘들어서 동기와 술을 마시며 울었었는데, 새로 점포에 오니 그간의 시간만큼 내공이 쌓인 모양이다. 다행히 사수가 좋았다. 팀장님은 유통에서 근무한 지 오래되신 차장님이었고, 실무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정통의 백화점 영업을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때는 3월, 마침 전체 리뉴얼이 있어서 브랜드 교체는 빠르게 소통되고 있었고, 나의 일은 조금도 한가할 틈이 없이 돌아갔다. 이 점포를 떠나기 전에 10개 정도 브랜드를 교체하면 전반적인 층의 실적을 20~30% 정도 성장시키는 것은 문제없어 보였다.
* 현장관리직: 유통점(백화점/아웃렛 등)의 층을 관리한다는 것은 해당 층의 매출, 매니저, 영업이익 등을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행사를 주로 어떻게 구성하지? 영업이익 상승을 위한 계획이 있나?”
지점장님은 까다롭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어르신이었다. 새벽을 꼬박 지킨 아침에도 왜 바닥청소가 안되었는지를 따지고, 실적브리핑을 받았다. 영업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는 날이면, 층을 3~4바퀴씩 돌며 전등 위치, 방향 하나까지 따지고 들었다. 매 회의 때마다 각 브랜드의 매출뿐 아니라, 수수료 등을 외우고 있는지 물었고, 매출뿐 아니라 영업이익 상승을 평가지표로 삼았다. 하반기 매출 성장을 위해 세웠던 전반적인 행사 계획은 수정이 필요했다.
A브랜드: 월 매출 1억, 수수료 10% = 1000만 원 < B브랜드: 월 매출 0.6억, 수수료 17% = 1020만 원
수수료를 더 많이 지불하는 브랜드를 확인하여, 해당 브랜드의 매출을 우선적으로 성장시켜야 했다. 그리고 사실, 8천만 원 나오는 브랜드가 1억 하는 것보단 4천만 원 하는 브랜드를 6천만 원 매출 만드는 게 쉽다. 기획이나 Buyer로 일했을 때와는 달리, 영업은 숫자가 빠르게 변화했다. A브랜드를 빼고 B브랜드 행사를 진행하면 B 브랜드 매출이 나왔고, 수수료에 따라 브랜드를 바꿔서 행사를 주면 영업이익이 바뀌었다. 계속 고민하고 수입해서 1년, 2년 뒤에 숫자를 고민하던 내게, 영업은 조금 더 게임 같은 느낌이었다. 한 해가 바쁘게 돌아가는 사이, 어느덧 가을이 찾아왔다.
유통의 가을은 유독 바빴다. 9월이 되면 사람들은 이미 가을을 넘어 겨울 준비를 시작했고, 많은 백화점은 대규모 세일을 준비해야 했다. 추석 전을 잘 준비하지 못하면 3분기뿐 아니라, 연간의 매출이 무너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내년의 성장동력도 같이 챙겨야 했다. 전체 브랜드에 3개년치 실적을 뽑아주었다. 전전년, 전년 비교한 성장률과 매출, 전년과 당해 성장률과 매출 주요 행사를 뽑아주었다. 한 층에는 40여 개의 브랜드가 있었는데, 하루에 5개씩 매니저를 만나 상담을 해도 한 주일이 넘게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너무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급하지 않은 과정이다 보니 다른 일상업무에 치여 미루기도 잘 미뤄졌다. 각 매니저, 본사 영업담당/팀장을 만나며 진행된 대장정과 같은 상담은 2주가 넘게 소요되었고, 뿌듯하게 내년의 성장을 기대할 때 즈음 성과평가가 시작되었다.
“최종 평가는 BC입니다.”
“네? 어떻게 중간평가보다 떨어질 수가 있죠? 평가 관련 수치가 다 중간평가 때 보다 좋아졌는데요?”
휴직을 하고 점포로 보직을 이동하며 일에 대한 욕심이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많이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건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내 일. 내가 한 일. 내가 성장시켜 놓은 그 일. 바쁜 일상의 업무 틈에서 굳이 내년까지 챙겨서 했던 내 일.
“지점장님께서 영업이익으로 평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수수료가 더 높은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것으로 수정하였고, 중간평가 때보다 지표가 좋아졌어요!”
항변을 하듯 한마디를 더 내뱉었지만, 대답이 기억나지 않는다. 멍하니 그 자리를 우두커니 지키다가 돌아왔다. 나의 분노는 힘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
나는 그렇게 아등바등 내가 짜놨던 연간의 매출목표와 계획을 뒤로하고, 다른 점으로 발령이 났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그때 무엇을 해야 했을까? 무엇을 했으면 결과가 바뀌었을까?
사실, 본인이 열심히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혹여 만난다고 해도 각자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열심히 해도 연봉이 오르거나 성과급이 있지 않아요’
‘공채 출신이 아니면 아무리 해도 승진시켜주지 않아요’
내가 어린 시절에 혀를 쯧쯧 차며 한심하게 바라본 그 어른들도, 한 때는 다 패기 넘치고 열정 가득한 신입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열정은 왜 사그라들었을까? 열심히 한 날의 그들은, 그 시간과 열정을 주고 무엇을 받았는가?
계속 중상위권의 평가를 맴돌던 때, 나는 더 높은 평가를 요구할 뿐 낮은 평가를 받은 직원의 마음을 헤아려볼 이유가 없었다. 밤을 새우며 열심히 일했고, 떳떳하게 평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지새던 그 수많은 밤, 나 혼자 사무실을 지킨 것은 분명 아니었다. 나와 함께 눈물로 밤을 새우던 그 선배들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고, 회사를 지키고 있었을까? 평가는 과연 실적만으로 이뤄지는가.
회사의 논리 앞에서, 나는 언제나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