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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향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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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maflower Jan 27. 2019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 립스틱 로즈

립스틱을 바르는, 이 사소하지만 향기로운 순간


향수병의 화려한 외관에 한 번, 그 병 안에 든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또 한 번, 그렇게 '향수'라는 것에 두 번 반하게 됐다.


하지만 남들보다 조금 더 향수를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소비자에 머물렀어도 괜찮았을 텐데... 나는 왜 그렇게까지 화려한 무대 뒤, 실제 향이 만들어지는 현장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을까. 취미가 직업이 된 후, 향을 맡는 일이 더 이상 즐겁지 않던 때에 종종 그런 질문을 던져보곤 했다.


이제 막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그 이유를, 며칠 전 읽은 매거진 B 르 라보 호에서 분명한 문장으로 찾았다.


"그동안 화려한 마케팅과 요란한 패키지에 가려져 있었지만, 가장 섹시한 매력을 발산하는 부분은 바로 조향사들이 일하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전 세계 곳곳의 원산지에서 찾아내는 여러 가지 재료, 이를 채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비전을 향수라는 제품으로 만드는 이 모든 장인 정신과 전문가적 지식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죠."


르 라보의 공동 창립자 파브리스 페노의 말이다. 


그랬던 것 같다. 향 자체만큼이나, 향을 만드는 사람들에 얽힌 스토리가 나를 매료시켰다. 조향사라는, 아주 특별한 소수만이 알고 있는 조향의 비밀을 나도 알고 싶었다.


내가 상상했던 조향 연구실의 모습 (이미지 출처: chemistryworld.com)


여러 향료 물질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하나의 향을 완성하는 것은 얼핏 너무나 간단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조향이라는 것은, 수 백 가지 향 원료의 특성(향취, 휘발성, 지속성, 안정성, 안전성, 심지어 가격)과 원료 간 조합에 따른 갖가지 변수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한 매우 지적인 작업이다.


하지만 지식과 테크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없는 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창의성과 예술성, 그리고 헌신적인 노력이 아닐까. 자스민 계열의 향료 헤디온(Hedione)과 바이올렛 계열의 향료 이오논(Ionone)을 통해 예술적인 차의 향기(불가리 오 파퓨메 오 떼 베르)를 만들고, 수년의 노력 끝에 세상에 선보일 기회를 잡은 장 끌로드 엘레나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조향사들은 늘 스포트라이트 바깥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였다. 향수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향수는 예술 작품보다 대중의 기호에 맞는 상품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향수병, 패키지, 포스터 그 어디에도 향수를 만든 조향사의 자리는 없었다. 2000년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Editions de Parfums Frédéric Malle)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프레데릭 말 (이미지 출처: permanentstyle.com)


프레데릭 말은 향수 업계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하면서 조향사가 가진 재능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을 건 향수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9명의 조향사에게 오로지 그들의 창의성에 의존해 향을 만들게 했다. 그 어떤 가이드도, 제약도 없는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그 스스로는 향수 '편집자'로써 조향사들이 조언이 필요할 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자리에 만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의 향수 라벨에, 향수 이름과 함께 조향사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항상 브랜드와 제품 뒤에 가려져있던 조향사들이 처음으로 전면에 나서 그들이 만든 향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9개의 향수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걸작들이 탄생했고, 조향사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마케팅 소재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강력한 힘이 있음이 증명되었다. 조향사들은 드디어 그들의 업적에 걸맞은 인정과 찬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프레데릭 말 역시 그 공을 인정받아 2018년 The Fragrance Foundation으로부터 Game Changer 상을 수상하였다.


2018 게임체인저 수상자로 호명된 프레데릭 말 (이미지 출처: beautyinfluencers.com)


고민 끝에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을 소개할 첫 번째 향수로, 처음 출시된 9개 향수 중 랄프 슈와이거(Ralf Schwieger)가 만든 립스틱 로즈(Lipstick Rose)를 골랐다. 립스틱 냄새를 향수로 만들겠다는 조향사의 기발한 발상이 '철저히 조향사들의 창의적 자유에 의해 탄생한 향수'라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잘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립스틱의 냄새는 어떤 것일까. 누군가 내게, 각 화장품에 맞는 향을 고르는 데 있어 가장 까다로운 제품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립스틱을 고를 것 같다. 립스틱 베이스에는 파우더, 왁스, 오일 등이 다량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스킨케어 제품에 비해 특유의 냄새(베이스취)가 강한 편이다. 원료 상태가 좋지 않거나 고온 공정에 오래 노출되어 베이스취가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향을 고르는 데 있어 늘 고민이 많았던 제품이다.


하지만 품질이 좋은 립스틱은 부드러운 왁스 냄새, 깨끗한 파우더 냄새가 만나, 놀랍게도 베이스만으로 은은한 바이올렛 향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여기에 과거 많은 립스틱 브랜드들이 즐겨 사용하던 로즈향이 살짝 얹어지면, 그 자체로 클래식한 로즈-바이올렛 어코드가 완성되는 것이다. 마치 1980년대 출시된 향수, 이브 생 로랑의 파리처럼.


립스틱 로즈 역시 로즈와 바이올렛을 중심으로 립스틱의 냄새를 재현했다. 어린 시절 엄마 몰래 발라보던 립스틱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지만, 결코 올드하지는 않은 절묘한 경계에 있는 향이다.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 립스틱 로즈 (이미지 출처: fragrantica.com)


립스틱 로즈의 첫 향은 워터리한 바이올렛으로 시작해 로즈로 이어지는 다소 클래식한 느낌의 향이다. 하지만 곧바로 달콤한 라즈베리가 얹어지며 끈적하지만 좀 더 캐릭터 있는 장미향으로 변하게 되는데, 순간이지만 꽤 매력적인 향을 느낄 수 있다. 이후, 립스틱 베이스처럼 약간 비릿한 바이올렛과 달콤하고 풍성한 로즈, 파우더리하고 부드러운 아이리스의 삼각 구도를 중심으로, 바닐라의 크리미함, 베티버의 무게감까지 더해져 고상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향이 완성된다.


어린 시절 엄마가 썼을 법한 향이 강한 립스틱의 냄새가 분명 떠오른다. 향수를 자극하는 편안한 향이지만, 다양한 뉘앙스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처럼 친숙한 향을 새롭게 해석하, 립스틱과 연관된 다양한 기억(엄마가 쓰던 립스틱의 향, 처음 산 명품 립스틱, 짜릿한 첫 키스의 기억 등)불러일으킨다는 점만으 매우 특별한 향다.


한참 립스틱 로즈 향을 맡다 보니 문득 립스틱을 바르고 싶어 졌다. 거울을 꺼내 립스틱을 바르고 입술을 문질러 입 안에 퍼지는 향을 느껴본다. 여자로 태어나 이 사소하지만 향기로운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니... 오늘 하루, 감사할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 립스틱 로즈는 자몽, 라즈베리, 로즈, 바이올렛, 아이리스, 베티버, 바닐라, 머스크, 앰버 노트를 포함하고 있다. 50ml 2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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