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보다 더 긴 여운을 남기는 휴식
불가리 오 파퓨메(Bvlgari Eau Parfumée) 향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3년 신혼여행 때의 일이다.
운 좋게 업그레이드 된 아랍에미레이트 항공 비즈니스석 기프트로 불가리 오 파퓨메 오 떼 루즈(au thé rouge)의 향수를 처음 만났다. 달큰하고 묵직한 피그(Fig, 무화과) 향이 꽤 매력 있고 중독적이어서, 지금까지도 신혼여행의 설렘과 추억이 담긴 예쁜 향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몇 년 후, 회사에서 차(Tea)를 컨셉으로 한 제품 향을 개발하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다시 불가리 오 파퓨메 향수를 만났다. 불가리 오 파퓨메 라인은 Green tea(vert), Red tea(rouge), Oolong tea(bleu), White tea(blanc), Black tea(noir)에 영감을 받은 하이 퍼퓨머리 컬렉션(High Perfumery Collection)이다.
향 개발에 참고할만한 녹차향을 찾고 있던 당시, 나에게 녹차향은 두 가지로 정의될 수 있었다. 진짜 녹차의 씁쓸하고 구수한 향, 그리고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의 그린티(Green Tea) 향수 향.
엘리자베스 아덴의 그린티는 충분히 기분 좋은 향이지만, 너무도 흔해진 탓에 진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새로운 느낌의 녹차향은 없을까 고민하던 중, 불가리 오 파퓨메 컬렉션의 첫 향수였던 오 떼 베르 향수를 시향하러 백화점 불가리 매장을 방문했다.
그때 느낀 놀라움이란!
녹차라는 흔한 소재를, 이렇게 섬세하고 고급스럽게 풀어낼 수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향 일을 하면서 정작 나를 위해 향수를 뿌릴 기회가 없어 몇 년간이나 향수를 사지 않았는데, 작년에 향을 다시 취미로 시작하기로 결심한 후 가장 먼저 구입한 향수가 오 떼 베르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상당히 생소했던 이 향수가 사실은 1992년 장 끌로드 엘레나(Jean-Claude Ellena)에게, 우연을 가장한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준 향수였음을 말이다.
뉴욕 타임스 전 향수 비평가 챈들러 버(Chandler Burr)가 에르메스 엉 자르뎅 수 르 닐(Un jardin sur le Nil)과 사라 제시카 파커 러블리(Lovely)의 개발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책 The Perfect Scent에, 장 끌로드 엘레나와 바로 이 불가리 오 파퓨메 오 떼 베르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소개되어 있다.
평소 차(tea)를 즐겨마시던 장 끌로드 엘레나는 몇 가지 아이디어에 기반하여 전에 없던 차(tea) 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당시 그에게 매우 중요했던 디올의 파렌하이트(Fahrenheit) 향수 프로젝트에 이 향을 제안하게 된다.
디올은 장시간의 검토 끝에 장 끌로드 엘레나의 향을 채택하기로 하지만 곧바로 그 결정을 번복한 후 다른 조향사들의 향을 최종 선정하게 되고, 실의에 빠진 그는 이 향을 다른 여러 브랜드에 제안해보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그러다 결국 부띠끄 전시 겸 이따금 매장에 뿌릴 용도로 향수를 처음 개발하고자 했던 불가리가 이 향의 주인이 되는데, 애초 매출을 기대하고 만든 제품이 아니었던 이 향수가 고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단 기간에 엄청난 매출을 올리게 된 것이다.
오 떼 베르는 그 후 엘리자베스 아덴의 그린티를 포함하여 씨케이 원(CK One), 라티잔 파퓨메 떼 뿌르 엉 에떼(L’Artisan Parfumeur Thé pour un Été) 등에 지대한 영향을 준 트렌드세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다른 향수 리뷰에서 장 끌로드 엘레나에 대해 더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오 떼 베르는 장 끌로드 엘레나가, 특유의 미니멀하지만 조금의 여백도 없는 지금의 조향 스타일을 완성함에 있어 상당히 의미가 있는 향수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향수의 조향사가 그 유명한 장 끌로드 엘레나라는 것도, 이처럼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있다는 것도, 이 향수에 끌리는 진짜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 떼 베르는 여러 아류작을 거느릴 만큼 독창적이지만 결코 향이 어렵거나 과하지 않다. 편안하게 즐길 수 있지만 묘하게 사람을 끄는 새로운 매력이 있다.
올해 28살이 된 향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세련된 이 향은 사실 녹차 향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데, '차가운 안개가 내린 새벽 공기를 머금은 녹찻잎'의 이미지를 너무도 완벽하게 재현하였음으로, 우리는 조향사가 의도한 대로 녹차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향이 스프레이 되는 순간, 가장 먼저 버가못 껍질의 그린 시트러스 향과 가벼운 스파이시 노트가 어우러져 차(tea)의 싱그럽고 씁쓸한 느낌을 재현한다. 갑자기 눈 앞에 새벽 공기가 펼쳐졌다고 착각될 만큼 서늘한 분위기의 향이다.
하지만 향이 피부에 닿는 순간, 차갑고 반짝거리던 향에 부드러운 질감이 입혀지기 시작한다. 이 향을 뿌릴 때마다 그 부드러움이 얼마나 섬세한지 놀라게 되는데, 머스크나 파우더리 노트의 직관적인 부드러움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햇빛을 받아 물기가 걷힌 녹찻잎의 매끈한 표면 같은 부드러움이다.
부드럽고 섬세한 플로럴 노트가 점차 두드러지며 향의 포근한 이미지도 함께 강조된다. 분명 더없이 차가웠던 향이 서서히 따듯해지는데, 그 변화가 어찌나 매끄러운지 이음선이 없는 하나의 옷처럼 자연스럽다. 동시에 첫 향에서 느껴진 찻잎의 씁쓸한 느낌이 계속 남아 아름다운 대비를 이룬다.
차가움과 따듯함, 부드러움과 씁쓸함의 절묘한 조화 혹은 대비가 오 떼 베르의 가장 큰 매력이다.
개인적으로 오 떼 베르를 옷에도 듬뿍 스프레이 하는 걸 좋아하는데, 옷에 남은 싱그럽고 포근한 잔향이 하루 종일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신 후, 다시 포근한 이불속으로 돌아가 얼굴 위로 드리운 따듯한 햇살을 만끽하는 기분이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 따듯한 차 한잔을 마시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오 떼 베르와 함께 긴 여운이 남는 휴식을 즐겨보길 권한다. 분명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불가리 오 파퓨메 오 떼 베르는 버가못, 오렌지 블라썸, 카다멈, 코리앤더, 페퍼, 자스민, 로즈, 그린티, 우디 노트를 포함하고 있다. 75ml 12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