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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maflower Jan 10. 2019

에르메스 에르메상스 미르 에글란틴

다루기 까다로운 미르와 향이 없는 에글란틴의 만남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에르메스는 향수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샤넬의 자끄 폴쥬(Jacques Polge)처럼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제대로 이해하고 향으로 표현해 줄 전속 조향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 심라이즈(Symrise) 소속 조향사였던 장 끌로드 엘레나를 영입하게 된다.


그 후 장 끌로드 엘레나는 에르메스 전속 조향사로 일하는 십 년 동안 30여 개의 향수를 시장에 선보였다. 떼르 데르메스(Terre d'Hermès), 보야지 데르메스(Voyage d'Hermès) 등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과 동시에 자르뎅(Jardin), 오 드 코롱(Eau de cologne), 에르메상스(Hermessence)와 같은 다채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며 에르메스의 입지를 바꿔놓았다.


그중 에르메상스 컬렉션은 '각을 위한 한 편의 '라고 불릴 만큼 예술성이 극대화된 프리미엄 라인으로, 장 끌로드 엘레나가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 수 없는 특별한 컬렉션으로 여겨져 왔다. 그의 조향 스타일은 흔히 일본 단편 시 종류인 하이쿠(haiku)에 비유되는데, 간결하고 아름다운 향에 하나의 주제함축적으로 담아내는 그의 능력 때문이다. 


에르메상스 컬렉션 (이미지 출처: olfactics.net)


2014년 장 끌로드 엘레나의 후임으로 크리스틴 나이젤이 합류하고, 처음의 우려와 달리 갈로(Galop), 트윌리(Twilly)를 통해 여성적인 분위기가 더해진 에르메스 향수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장 끌로드 엘레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드는 에르메상스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8년, 크리스틴 나이젤이 만든 다섯 개의 새로운 에르메상스 향이 공개되었다. 동양의 오래된 향 원료에 영감을 받은 이번 제품들은, 컬렉션의 차분하고 우아한 특색을 잘 반영하고 있지만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들이 눈에 띈다. 에르메스 최초로 오우드(Oud, Agarwood)가 사용되었고(아가 에벤/Agar Ébène), 최초로 오일 제형의 퍼퓸(뮤스크 팔리다/Musc Pallida, 까르다뮤스크/Cardamusc)이 출시됐다.


무엇보다 자스민과 세다우드의 과감한 대비가 돋보이는 세드르 삼박(Cèdre Sambac)을 통해, 장 끌로드 엘레나가 아닌 크리스틴 나이젤이 만드는 새로운 스타일의 에르메상스를 엿볼 수 있었다. 에르메스라는 틀 안에서 지금과는 또 다른 매력의 향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에르메스 향수가 몹시 기대되는 이유다.


크리스틴 나이젤이 만든 새로운 에르메상스 (순서대로 아가 에벤, 까르다뮤스크, 세드르 삼박, 뮤스크 팔리다, 미르 에글란틴)


미르 에글란틴(Myrrhe Églantine)은 다섯 개의 신제품 중 원래의 에르메상스 스타일에 가장 가까운 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개인적으로 세드르 삼박보다 미르 에글란틴이 더 마음에 들었다. 머리로는 긍정적인 변화를 반긴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아직 새로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미르(몰약)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향료 중 하나 예부터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신성한 원료로 여겨졌다. 입사 후 처음 미르에 대해 배울 때, 이집트 미라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는 부연 설명 탓에 향까지 음침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실제 미르는 흙과 버섯, 약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어둡고 탁한 뉘앙스가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부드럽고 따뜻한 이미지의 향이다. 반면 야생 장미의 종류(wild dog rose, rosa canina)인 에글란틴은 실제로는 향이 없는 꽃이라, 장미향을 기본으로 그 이미지를 재현해냈다고 한다.


다루기 까다로운 미르와 향이 없는 에글란틴, 분명 쉬운 주제는 아니었을 듯하다.


미르와 에글란틴 (이미지 출처: soappotions.com & futureforests.ie)


미르 에글란틴의 첫 향은 예상외로 시원하면서 과일의 달콤함을 지닌 장미향으로 기분 좋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위로는 금속의 느낌처럼 차갑고 날이 선 캐릭터가 더해지고 아래에서는 탁하고 텁텁한 미르의 향이 올라오면서 미르 에글란틴의 진짜 모습이 완성된다.


미르는 점차 더 존재감을 드러내며 특유의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을 끌어올려 향의 깊이를 더하는데,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에글란틴의 가볍고 메탈릭(metallic)한 장미 캐릭터가 끊임없이 반짝이는 빛을 부여한다. 마치 벽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위로, 금속 물체에 반사된 햇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풍부하고 무게감 있는 플로럴 노트가 두드러지지만, 전체적인 톤은 에르메상스 특유의 깨끗하고 밝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는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느린 속도로 조금씩 무게감을 더하며 차분하고 기품 있는 마무리를 향해 나아간다.


아주 쉬운 향은 아니지만, 색다른 장미향을 찾고 있다면 꼭 한번 시도해볼 만하다. 보틀 컬러처럼 차분한 테라코타 핑크색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향이다. 같은 컬렉션 중 류바브, 그레이프프룻 등이 더해진 로즈 이케바나(Rose Ikebana)와 비교하여 둘 중 취향에 맞는 장미향을 골라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에르메스 에르메상스 미르 에글란틴은 미르, 야생 장미 노트를 포함하고 있다. 100ml, 33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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