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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orba Mar 15. 2024

영국에서 축구 직관을 하고

사람은 누구나가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있다. 내게 버킷리스트 1위는 언제나 영국에서 축구를 직관하는 것이었다. 올해 1월 즈음 사촌형이랑 축구 이야기를 하다가 '이번 아니면 언제 가보겠어.' 하고 충동적으로 영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그때의 감정은 아마 긴 세월 동안 해결하지 못한 숙제를 마무리한 느낌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항상 여행을 갈망했다. 오죽했으면 꿈이 늙기 전에 세계여행을 하는 것이었으랴. 어느 정도 삶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나는 거침없이 여행을 다녔다. 작년 여름에는 뉴욕과 캘리포니아를 각 2주씩 다녀왔고, 가을에는 발리에서 한 달 살이를 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축구'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열흘간 영국을 다녀왔다. 일련의 여행에서 뜻하지 않게도 내 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값진 경험이었다.


영국의 날씨는 언제나 자기 멋대로였다. 그러나 그곳의 사람들은 변덕스러운 하늘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언제나 거리에는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소나기가 찾아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날씨 따위는 영국인들의 루틴을 방해하기엔 생각보다 사소한 요소였다. '오늘은 비가 와서 운동가지 말아야지.' '오늘은 화창하니 카페에 나가서 광합성을 해야지.' 순간 날씨에 따라 행동패턴이 바뀌는 본인의 모습이 아쉽게 느껴졌다. 


처음 직관한 경기는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토트넘의 홈경기였다. 경기는 손흥민 선수의 쐐기골에 힘입어 3:1로 토트넘이 이겼고, 눈앞에서 골망이 흔들리는 장면을 직관했다. 경기가 끝나고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가까이에서 봤는데,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한 사람이 얼마나 멋있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근처 펍으로 향했는데 현지 영국인들이 우리들을 환대해 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손흥민 선수의 이름을 외치고 같이 응원가를 부르며 맥주를 마셨다. 타지에서 주장으로써 그 팀을 대표하며 뛰는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 때문에 나의 하루는 행복으로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직관한 경기는 내가 10년 넘게 좋아했던 아스날의 홈경기였다. 지구 반대편에 방구석에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경기를 매주 스크린으로만 보던 나에게 직관은 정말 꿈만 같은 순간이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지하철에는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한가득이었고, 웅장한 경기장에 들어서자 모든 좌석이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경기 시작 전, 필드 앞쪽으로 가서 선수들이 몸 푸는 장면을 눈으로 담았다.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연예인. 이어서 아스날을 대표하는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경기장에 있는 모든 팬들과 함께 그 노래를 불렀을 때 감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경기가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첫 직관이 무승부로 끝날까 봐 마음이 초조했던 찰나, 경기가 끝나기 5분 전에 결승골이 터졌다. 주변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환호했다. 그렇게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그때의 감정은 복잡 미묘했다. 드디어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몰려옴과 동시에, '아 이게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것의 전부인가?' 하는 아쉬움이 공존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깨달았다. 막연한 동경과 환상을 실제로 경험하고 보니, 그것이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것을. 아마 작년 뉴욕을 갔을 때와 동일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 영국을 가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방구석에서 모니터 앞에 앉아 언제가 직관을 하고 말 것이라는 상상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니, 이제는 정말 여행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다. 그동안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다는 말에 마침표를 찍은 영국이었다. 이제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는 현실에 부딪힐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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