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
'내가 모르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라고도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이 백화점이었다.
공장 노동자를 비하하는 표현이 '공돌이''공순이'였던가?
백화점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쩜돌이'라고 불렀다.
쩜돌이 생활이 고되고 지겨워서 해외 브랜드 기업으로 전직했다.
25년 가까이 소매업 (영어로, Retail Business)에 있다 보니, 내가 잘 아는 세계는 이곳이었다
내가 아는 세계이니 이 쪽 언어의 세계도 확장되어 있을까?
과연 그러한 가?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가게'나 '상점'이라 한다.
나의 백화점 신입사원 입사 면접은 다섯 명이 들어가서 질문에 답하는 그룹 면접이었다.
“만약 입사한다면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고 싶은가?”라고 면접관이 질문했다.
내 옆 지원자는 “매장에서 근무하고 싶다” 고 대답했다. 그러자 면접관은 '매장'이라는 말은 이쪽 용어인데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물었다.
매장이라는 말은 나에게는 익숙지 않았던 단어였다. 아마도 그 당시의 나는 '매장'이라는 말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세계였다.
백화점은 사무실과 매장뿐이다. 군인이 복무하는 곳이 전방과 후방뿐이듯이 말이다. 백화점 업계에서 말하는 매장은 판매Floor를 의미한다. 사무실은 관리부서를 뜻한다. 나는 매장에서도 근무해보고 사무실에서도 근무해보았다
2008년도에 난 영국 남성 패션 브랜드 Alfred Dunhill로 전직했다. 백화점에 신규 매장을 오픈하기 위해서는 영국 본사에 승인서를 제출하고 승인(Approval)을 받아야 했다. 이 승인서를 영어로 BIR (Boutique Investment Request)라고 했다. 매장 위치, 면적, 예상 매출, 오픈 목적, 경쟁 브랜드 매출 등에 대한 정보를 작성해서 HK Region Office에 있는 APA ( Asia Pacific) head의 승인을 거쳐 런던 Headquarter의 최종 승인을 얻는 프로세스다.
유럽 패션 명품 브랜드에서는 매장을 부티크라고 부르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70-80년대에, 고급 양장점을 부티크라고 불렀던 것 같았는데, 영국 남성 패션 브랜드에 입사하고 나서 Boutique라는 단어를 정식으로 만난 느낌이었다.
내 영국 Boss는 매장을 Outlet이라고도 했다. 미국식 영어에 익숙했던 나는 아웃렛은 할인상품매장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영국에서 Outlet은 그냥 상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국인이 "Where is Shoes Outlet?"이라고 물어본다면, 파주나 여주, 하남에 있는 아웃렛을 상상하지 마시라. 그냥 신발가게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GAP 브랜드와 일할 때 미국 본사는 Store라는 표현을 썼다. 한 번도 Boutique나 Shop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Gap은 성인복(Adults)과 아동복(Baby)으로 이루어졌다. 성인복과 아동복을 전부 판매하는 매장을 Combo Store(복합매장)라고 표현한다. 성인 복만 판매하거나 아동복만 판매하는 매장은 Mono Store(단일 매장)라고 했다. 영화관에서 팝콘과 콜라를 묶어 파는 콤보세트는 알았지만, 두 가지 복종을 함께 파는 매장의 영어 표현이 Combo Store라는 것은 GAP 미국 본사와 일하고 나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플래그십 스토어 (Flag ship Store, 기함점)는 패션 브랜드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이다. 말 그대로 대장 깃발을 달고 있는 매장이다. 수십여 척의 함선중 대장깃발을 단 함선을 Flag ship이라 부르듯이. 브랜드의 매장들 가운데 대장선 매장이란 의미다. 서울에서는 강남역, 명동, 가로수길 등 유동인구가 많은 상권에 있는 대형 매장을 플래그십 스토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명품 브랜드는 Maison(집)이라는 표현을 우아하게 사용한다. 브랜드의 고향이자 집이라는 의미이다. 그 브랜드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대표 매장이다. Masion은 프랑스어이다. 영국 브랜드 던힐은 런던 Davies Street에 과거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자택이기도 하고 문화유산이기도 한 대저택을 임차하여 브랜드의 대표 매장으로 만들었다. 이 매장을 Home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어 Maison, 영어 Home은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보여주는 매장을 뜻한다.
Shop In Shop은 Stand-alone store와 대비되는 용어이다. 백화점 안에 있거나 편집매장 안에 있는 브랜드 매장을 Shop in Shop이라 통상 부른다. 주요 패션스트리트에 해당 브랜드의 이름으로 오픈한 단독 매장은 Stand-alone Store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홀로 서 있다는 의미이다. 백화점안에 세들어 있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패션업계에 있다가 화장품 업계로 전직했다. 이곳에서는 매장을 Counter라 불렀다. 계산대가 있는 곳이 카운터라는 이미지가 있던 나로서는 역시 생소한 용어였다.
매장 매니저를 Shop매니저나 Store매니저라고 불렀던 나에게 CM(Counter Manager)이라는 말이 입에 붙기에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다.
참고로 화장품 판매사원은 BC(Beauty Consultant)라 통상 지칭한다.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세일스 맨이 아니고 아름다움을 컨설팅해주는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가져 달라는 주문이다. 카운터는 사이즈가 작은 느낌이 든다. 사이즈가 작은 화장품 카운터의 제작비가 몇 배 넓은 의류매장 공사비보다 비싸다는 것도 깨알 상식이다.
당신이 일반 고객이다. 백화점 관리자에 컴플레인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해당 매장을 지칭하면서 무슨 카운터라고 지칭한다면, 백화점 직원은 아마도 당신을 화장품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일본 소매회사에서는 매장 매출을 뜻하는 일본어가 店頭消化(점두 소화)이다. 売場이라는 용어도 자주 쓰이지만 店頭(점두)라는 말도 보편적으로 쓴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조부모 세대는 친숙한 용어일 수도 있겠다.
이처럼 가게를 뜻하는 표현만 해도 무척 다양하다.
국가별로 업종별로 조금씩 다르다.
글로벌 브랜드와 일하게 되면 다양한 어휘를 접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아는 세계의 한계이다.
언어가 확장되면 세계도 확장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