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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서 Aug 15. 2021

취향이 다르다고

인어공주_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이쪽이 아닌가?’

아무리 스마트폰 맵을 들여다봐도 모르겠다. 오래된 주택가 골목이라 여간 찾기 어려운 게 아니다. 친구가 용하다고 알려준 곳인데, 가기도 전에 벌써 지친다. 

막내가 집을 나간 게 지난달 말이다. 

이른 새벽 뭔가 싸한 느낌에 깨어보니, 현관에 있는 막내 방문이 활짝 열려 있고, 

식탁 위에는 종이 한 장이 펄럭였다.      


사랑하는 아빠와 언니들,

제 진실한 사랑을 찾아 떠납니다지나친 걱정은 하지 마세요저 잘 지낼 거예요

간간이 소식 전해 드리겠습니다.        

      

급하게 냅킨에 휘갈긴 메모, 막내가 쓴 게 분명했다. 

막내의 가출은 아내를 잃은 후 혼자서 여섯 자매를 키워낸 아버지, 인어형 교수의 자존심에 엄청난 스크래치를 낸 초대박 사건이다. 

여섯 자매 중 가장 범생인 줄 알았던 막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젊은이를 위한 해양 축제’에 나타난 날건달 같은 기타리스트에게 첫눈에 반해, 넋이 나가 몇 날 며칠을 골골거려도 그냥 사춘기의 한때 증상이려니 하고 내버려 둔 게 잘못이었다. 

이렇게 집까지 뛰쳐나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간신히 점집을 찾았다. 

낡은 나무 간판에 궁서체로 <신내림 도령>이라고 거칠게 새겨져 있었다. 

뭐야, 완전 궁상이네.

두 평도 채 안 돼 보이는 방에는 낡은 책상 하나가 꽉 차게 놓여있고, 그 뒤로 개량 한복을 입은 노인의 희끗희끗한 정수리가 보였다.  

“신내림 도령이신가요? 아까 전화로 예약한……."

“맞아, 앉아.”

노인은 고개를 들더니 대뜸 말을 놓았다. 

이미 나는 땀범벅이고, 에어컨 대신 초라한 방구석에서 덜덜거리는 선풍기에 완전 실망한 데다, 아무리 연장자라도 반말이나 지껄이는 매너에 기분이 팍 상했다. 

‘그냥 돌아가? 저런 노인네가 뭘 알겠어.’ 

그런데 노인의 입에서 기가 막힌 말이 나온다.

“막둥이가 사고를 쳤구먼.”

“네? 네, 맞아요!”

나는 노인이 앉으라던 플라스틱 의자에 허겁지겁 앉았다. 노인의 다음 멘트가 궁금해 미칠 거 같았다. 

“걔는 안전하게 잘 있어. 걱정은 하지 마.”

휴, 안심이 되면서 동시에 격한 감정이 올라왔다.

“나쁜 기집애, 진짜 별일 없겠죠?”

“근데 동생이 공주고, 상대 남자가 왕자야?”

“헉!”

이 노인네, 진짜 보통이 아니다. 이래서 친구가 그렇게 용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 거구나. 

막내 이름은 인공주. 망할 기타리스트는 왕자 기획 소속이라니 왕자라고 보는 게 틀리지 않다. 그 놈에 대해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기획사 사장의 아들이란다. 그런 의미에서도 왕자 맞다. 

막내가 다섯째에게만 따로 톡으로 알린 바에 의하면, 그 왕자 기획에 막내도 연습생으로 대기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 마음이 놓이질 않으니 말이다. 

“동생이 끼는 엔간히 있는데, 목소리가 안 좋아.”

“목소리요? 우리 자매 중에 막내가 가장 노래를 잘했어요. 그런데 가수의 꿈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가족이라고, 제 꿈을 알아주지 못하니 속이 상해서 집을 나간 걸지도……."

“아니, 남자 때문에 나간 거고, 둘은 전생에 뭐가 있어서 여자가 남자를 보자마자 환장을 한 거야. 헌데 여자 목소리는 뭔가 잘못돼서, 가수로 성공하긴 힘들어.”

노인네 거침없다. 

“아, 그러면 그 기획사에서 클 가능성은 없는 거네요.”

“스스로 깨닫고 포기할 거야.”

“네, 사실 말씀하신 대로 막내가 그 남자한테 반해서 집을 나간 거예요. 저기, 혹시 말이에요, 그 남자와 우리 막내가 잘 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둘이 결혼이라도 하면 좋지 않을까? 여러모로 조건도 좋잖은가. 내가 안타깝게 물었지만, 노인은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둘 사이에 누가 있어.”

“네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건가요?”

가수 데뷔가 힘들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다. 

나쁜 시키. 여자가 있으면서 어린애를 꼬신 거야? 

아니, 스스로 나갔어도 놈이 꼬드김의 눈빛을 보냈으니 그런 범생이가 집을 박차고 나간 거지. 그러니 꼬신 거다. 그나저나, 여친이 있는 걸 막내는 모르는 거야?

“……근데 얼굴이 왜 이래?”

눈을 감은 노인이 중얼거린다. 와, 진짜 용하다. 지금 상대 여자 얼굴까지 보인다는 거잖아.  이래서 신내림, 신내림 하는 건가.

“왜요? 아주 미인인가요?”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미인이 아니라… 미남이야.”

“미남이요?”

“응. 둘 다 아주 잘 생겼네. 둘이 취향도 아주 잘 맞아. 상대 놈은 목소리까지 타고났어. 하나는 래퍼, 다른 하나는 기타리스트. 아주 그냥 천생연분이네. 동생은 헛물켜지 말고 그냥 여자 좋아하는 남자 만나라고 해. 애초에 취향이 아니라고.”

“…….”

다른 남자가 있는 남자에게 빠지다니. 운도 없는 계집애. 

힘이 쭉 빠진다. 

“쯧, 동생이 정신 차리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 나중에 아버지한테 잡혀서 게거품 물기 전에 빨리 사리 분별을 해야 할 텐데. 아버지, 그 양반 성격 보통 아니지? 답답한데, 굿이나 한판 할래?”

나는 매가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굿 하는데 얼마예요?”

아, 굿이고 잣이고 정말 뭐라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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