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의 역사> 욥의 이야기를 통해
모든 종교는 정통 교리를 갖고 있다.
정통에 반하는 생각은 이단으로 불린다.
하지만 유대교는 이단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최초의 이단자인 욥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욥은 정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많은 곡식과 가축, 자식을 가진 부자였다.
사탄의 저주를 받은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가족을 잃고 피부병에 걸려 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는 처지가 된다.
욥의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그에게 찾아와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정통 교리에 따라 욥을 추궁한다.
하나님은 한 치의 실수도 없는 분이라며 악행을 자백하고 뉘우치길 강요한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떠한 부정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의 결백이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다면, 사후에라도 하나님이 자신의 결백을 인정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성경에선 하나님이 모든 고통을 견뎌낸 욥의 가족을 되살려주고 더 큰 재물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 이야기의 의미는 단순히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권선징악이 책 속의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비극적 사고의 피해자가 주변을 돌보며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인 경우도 흔하고,
권모술수를 사용하는 나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경우도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집트, 바빌론과 같은 강대국의 노예로 고통받았던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대하는 방법을 찾아내려 했다.
이는 유대인만의 독특한 사고체계가 완성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의 종교는 논쟁을 한다.
여기엔 한 가지 암묵적 규칙이 있다.
논쟁이 너무 길어질 것 같으면, 그냥 정통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집단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는 심심찮게 이러한 방식의 병폐를 접한다.
목사의 세습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광신도들,
히잡 착용을 강요하며 테러를 일삼는 근본주의자들의 모습은 더 이상 생경하지 않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타인에게 정통 교리를 설득하지 않는다.
신과 논쟁하며 스스로 진리를 탐구한다.
이는 비단 종교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의 학습법인 하브루타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브루타는 나이와 성별, 계급에 차이를 두지 않고 두 명씩 짝을 지어 공부하며 논쟁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이다.
한 가지 틀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관점을 찾길 멈추지 않는다.
십계명 제2 계명은 이를 잘 보여준다.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
Idol, 즉 우상은 신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종교 비즈니스에서 우상은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만약 전자레인지 판매원으로 일하게 된다면, 첫 번째로 제품 카탈로그를 만들려 할 것이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품을 선뜻 구매할 소비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교는 우상 만들기를 단호히 금지했다.
종교의 세를 확산시키는 것보다 한 가지 틀에 사고가 갇히는 것을 더욱 경계한 것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한 가지 절대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빌립은 예수에게 신의 형상을 보여달라고 부탁한다.
도마는 예수에게 나아갈 길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고 답한다.
길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진리를 향해 걷는 모든 과정이 ‘길’이고, 이것이 곧 ‘진리’ 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이 정한 규칙에 맞춰 살아가는 노예가 아니다.
시대에 맞게 신이 기뻐하는 일을 스스로 찾아가는 주체적 존재다.
신의 뜻을 구하고 그를 따라가는 길은 분명 평탄치 않다.
미움받는 자라는 뜻을 가진 욥의 이름처럼 이유 없이 세상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틀린 것은 아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것.
그것을 나는 믿음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