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가 한국인을 구한다
윌 스미스가 아카데미 시상식 중 크리스 락을 폭행했다. 크리스 락의 '지 아이 제인' 농담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펀치라인이 될 것이다. 한국 언론은 단순히 농담이 무례했다 아니다는 따지는 정도 그쳤다. 하지만 코미디는 우리의 내면과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무기이다. 코미디의 본질과 아카데미 폭행 사건이 보여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설명해본다.
"Comedy is the blues for people who can't sing"
"코미디는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들의 블루스에요.'
- Chris Rock
블루스는 과거 노예 생활을 하던 흑인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이다. 크리스 락이 블루스를 코미디에 비유한 이유는 코미디가 삶의 애환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다. 키가 작아서, 뚱뚱해서 혹은 흑인이어서. 약점을 대하는 방식엔 두 가지가 있다.
숨기거나, 드러내거나.
키가 작다는 콤플렉스를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항상 5cm 깔창을 끼고 키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해진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조심하고 위로도 해준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키 작은놈'이라는 생각은 없앨 수 없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약점이 보이면 은근히 무시하는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가 아니던가. PC주의는 교육과 사회적 압박을 통해 이런 '나쁜 생각'을 막는데 주력하는 사상이다.
하지만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다루듯 인간의 나쁜 생각은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인간은 기계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 끼워 넣으면 고장 나기 마련이다. 예수가 재림한 것처럼 강박적으로 도덕적 이미지를 내세우던 인권변호사 출신 정치인의 성범죄 사건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욕망을 적절히 해소할 때, 인간은 건강한 정신을 가진다.
반면 코미디언은 자신의 결점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뇌병변을 가진 코미디언 한기명 씨는 몸을 흐느적거리며 말한다.
"영화 부산행을 봤는데 저랑 비슷한 게 나오더라고요. 우아아아 하면서 막 뛰어다니고.
뭔지 아시겠죠? 셋을 세면 맞춰보세요. 하나. 둘. 셋!"
"좀비!!"
"공유...인데..."
관객들은 폭소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은 자신의 편견을 떠올릴 것이다. 코미디는 강제로 통제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편견을 재고할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꿔 나간다. 콤플렉스는 숨기려고 할 때 더 놀리고 싶어지는 법이다. 자신의 치부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사람에게 더 이상 콤플렉스란 없다. 피라미드 구조의 한국 사회에서 한기명 씨는 약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이용해 무대 위에서 좌중을 사로잡는 그는 더 이상 약자로 불리지 않는다. 한 명의 스타 코미디언만이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소재로 쓸 수도 있다. 주로 멍청하거나 어이없는 상황이 제시된다. 예를 들어 Francis Bacon이 철학자인지 모르고 '프랑스가 왜 베이컨이지?'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는 관객이 있다고 하자. 관객은 왜 웃을까?
사람들 저마다 말을 잘못 알아들어 부끄러웠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다. 자신과 이야기 속 인물의 멍청함에 공통점을 인지할 때 사람은 웃는다. 자신만 멍청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다는 안도감과 웃고 있는 다른 관객들과의 ‘일체감’이 웃음을 만드는 것이다. 정치가 코미디의 단골 소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MS 오피스를 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샀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정치인을 어찌 풍자하지 않을 수 있는가.
권력자들은 코미디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각종 사치품과 <서울대학교> 같은 간판으로 자신을 치장하는데, 코미디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미디는 민주주의적이다. 같은 이유로, 독재국가에는 코미디가 없다. 모란봉 악단처럼 독재자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기교만 넘쳐날 뿐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교수님, 선배, 상사에게 농담을 자유롭게 던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관계의 평등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척도이다. 즉, 코미디는 99%의 시민과 약자를 위한 강력한 무기다. 표현의 자유 아래에서 시민들은 웃음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의 평등한 위치를 확인한다.
Roast와 Law of Jante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카데미가 윌 스미스에게 참석 금지 10년 처분을 내린 것이 쉽게 이해가 간다. 폭행 사건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테러 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시상식 폭행 사건이 발생한 직후의 해외 여론은 윌 스미스 비난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한국은 크리스 락을 비난했다. 내 가족이 욕을 먹으면 당연히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였어도, 친구와 둘이 밥을 먹는데 아버지를 놀린다면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윌 스미스와 내 경우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크리스 락은 윌 스미스를 'Roast' 하던 중 폭행을 당했다. Roast 문화는 참석한 유명 연예인을 타깃으로 잡아 짓궂은 농담을 하는 것이다. 한국인에겐 불편하기만 한 문화가 왜 생겼는지를 생각해보자. 할리웃의 세계적 배우들은 일반인이 상상도 못 할 출연료를 받는다. 그중 윌 스미스는 단연 상위 1%다. 3000억 자산가의 삶이 상상이나 가는가? 말 그대로 왕처럼 살 것이다. 그런데 왕과 민주주의는 정반대에 있지 않은가. Roast는 그런 왕들이 1년에 하루, 시상식장에서만이라도 일반인들과 같은 위치로 돌아가자는 일종의 의식이다. 표현의 자유정신에 입각해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지극히 미국스러운 전통이라고 볼 수 있다.
돈이 많고 유명한 배우라고 해서 모든 코미디에 웃음을 지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반대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국가도 있으니 말이다. 바로 스웨덴이다. 에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한 스웨덴 배우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미국 Late night show에 출연해 이런 말을 듣는다.
"상을 받아서 가족들에게 왕 대접을 받았겠네요. 목걸이도 차고."
스카스가드는 당황하여 아니라고 답하며 스웨덴에는 Law of Jante가 있다고 말한다. Law of Jante란 모두가 평등하고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의 성취를 자랑하거나 잘난 척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공동체적 사회 풍조이다. 그래서 스웨덴인은 상을 받으면 오히려 당황하고 미안해한다고 말한다.
Law of Jante와 Roast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한다. 스웨덴은 사회민주주의 방식으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방식으로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알린다. 여기서 윌 스미스의 사례를 다시 가져와보자. 만약 윌 스미스가 스웨덴인이어서 스톡홀름 영화제에 참석했다면 크리스 락의 Roast를 들을 일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처럼 전 세계적 인지도를 갖지도 못했을 것이고, 수 천억을 세금으로 납부하거나 훨씬 적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윌 스미스는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의 최대 수혜자이다. 때문에 Roast라는 미국식 민주주의 정신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돈과 인기는 Roast 방식으로, 시상식은 Law of Jante로 하는 걸 동의할 사람은 없다.
코미디가 한국인을 구한다
그렇다면 왜 유독 한국에서 크리스 락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을까?
그 이유는 '눈치 문화'에 있다.
크리스 락의 농담이 불편한 이유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깔봤던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서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놀림을 당하는 '불쌍한 제이다 스미스'에 자신을 이입한 것이다. 그래서 윌 스미스라는 슈퍼맨이 나타나 악당을 처치하는 영웅 서사에 감동한다. 불쌍한 제이다 스미스는 한국인과 닮아있다. 만성적으로 평가를 받고 눈치를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부터 우리는 결함이 있는 사람을 떨궈내고 올라가려 발버둥 쳐왔다.
'평범한 게 제일 어렵다'는 말은 이러한 풍조를 잘 보여준다. 평범은 상위 40~60% 정도를 칭하는 말이어야 한다. 작년 한국의 중위 소득은 1인 가구 기준 182만 원, 4인 가구 기준 487만 원이다. 노동자의 30%는 월 소득 200만 원도 받지 못한다. 즉, 월 230만 원 언저리만 벌어도 경제적으로 평범은 한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말하는 평범한 남자는 키 176 정도에 표준 체중, 나쁘지 않은 얼굴에 서울권 4년제 대학 졸업 후 중견 기업 이상에서 연봉 5천만 원을 받으며 부모님에게 적절한 지원을 받아 적어도 경기도권 신도시에 신혼집 정도는 마련할 수 있고 대인관계가 원만하며 성격은 덤덤하지만 그렇다고 센스가 없지도 않은 등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저 조건을 만족한다고 해도 정치 성향부터 취미 생활까지 비교할 거리를 찾자면 끝도 없다. 99%의 사람이 평범 미달 상태에 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을 찾기 힘든 게 당연하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각자의 결함을 다루는 방식이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으쌰 으쌰 해서 살 법도 한데, 그렇게들 선을 긋기 좋아한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그렇다. 강자에겐 빌붙고, 약자에겐 얄짤없는 종특(?)을 너무나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나도 갑질 비스무리 한거라도 한번 해보기 위해 박가분을 얼굴에 펴 바르지만 여전히 모두가 불안감을 갖고 산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정신병 유병률은 이를 뒷받침한다.
내가 조빱이면 뭐 어때?
코미디는 한국인의 불안을 퇴치할 해독제다. 각자의 결함을 숨기는 방법은 더 큰 정신병을 낳는다. '힐링'처럼 문제를 덮어두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도 틀렸다. 유쾌하게 약점을 보여주어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코미디는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당당한 삶의 태도이다. 내가 조빱이면 쟤도 조빱이고, 검사고 뷰티 인플루언서고 간에 다 어느 정도 부족하게 산다. 우울증 유병률 36%인 나라에서 제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웃는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다. 좀 더 밝고 평등한 한국이 되길 바라며.
긴 글 읽어준 분들 모두 뽜이팅 넘치는 하루 되십시오! (대충 정상수 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