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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re Sep 23. 2023

가을이라 가을바람ᆢ

비발디 바순협주곡

요즘 무수히 걷는다.

막연히 무릎이 좋지 않아 하면서 남들처럼 운동으로 걷는 것은 피했는데 요즘은 다소 무리하면서까지 걷고 있다.

이른 아침 가까운 천변을 따라 걷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해 질 녘에 걷기도 한다.

어제부터 갑자기 가을이 작정하고 시작되었다는 듯 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면 또 나가서 걸어야지.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배낭에 들은 책들의 무게를 지고 해지는 천변을 걸었다. 


얼마 전 드디어 구입한 무선 이어폰의 기능은 놀라웠다. 주변 소음을 차단하고 소리를 들려준다. 그런데 그 주변 소음을 차단하는 놀라운 기능이 내게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안겨준다. 주변에서 나고 있을 그 당연한 소음들을 차단한 상태가 마치 어떤 진공의 세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어폰으로 듣다가 껐을 때 갑자기 들려오는 세상의 소음은 놀랄 정도로 크다. 갑자기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불려 떨어진 느낌, 타임슬립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시간의 진입틈에 끼어 딴 세상에 툭 떨어지는 장면 같다.


가을이라 느껴지는 아침, 너무나 오랜만에 음악을 들어보고 싶어 오디오 앞에 갔다가 문득 카세트 플레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오디오 구성품이긴 하지만 만져 본 지 오래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모았던 카세트 테이프와 엘피판을 다 버렸던 터라 더욱 카세트 플레이어를 쓸 일이 없었다. 턴테이블은 버렸는데 웬 일로 카세트플레이어는 안 버리고 있었는지 그것이 신기할 뿐.

젊어서 월급탈 때마다 시내 나가서 한두 장씩 사던 엘피판을 다 버린 무지막지한 만행을 저지른 내가, 대학 때 용돈을 받을 때마다 나가서 사던 그 테이프들을 버린 것이 어쩌면 놀랄 일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런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 카세트 플레이어에 끼워져 있던 테이프를 보니 비발디 바순협주곡이었다. 가을이면 늘 듣던 곡.

틀어보니 뭉근하게 소리가 흘러나온다. 바순처럼 뭉근하고 저 창밖 바람처럼 부드러운 가을의 소리.

가을날 무던히도 듣고 다니던 음악이었다. 저 협주곡의 첫소리가 울리면 나는 바로 내가 가을의 한가운데 서있음을 느끼곤 했었다.


나의 무지함은, CD의 시대가 왔다고 테이프와 엘피판을 버린 것, 블루투스의 시대가 왔다고 CD를 많이 버린 것이다.

아마 양이 많아서 이사하거나 할 때 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다시 엘피판을 듣곤 하는 레트로 시대가 오니 내 가슴은 쓰리다. 버린 엘피판 중 유난히 아까운 것은 조용필판들이다. <창밖의 여자>부터 시작해서 그가 내는 모든 판들을 사 모았었는데. 그리고 수없이 많은 판들, 가요ㆍ 팝에서 클래식까지.

어쩌면 그렇게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을까.

첫 발령을 받고 섬마을 선생할 때 할부로 (그때는 매 달 돈을 은행에 가서 보내는 식의 할부였다) 산 CD전집을 버리다니….

전집이라는 것이 원래 하나하나 손길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스탠더드 하게 있을 것은 다 있어서 든든한 자료실이었는데…

아마 아이들 키우느라 허겁지겁 살 때  여유가 없어서 음반들이 생활의 가장자리로 밀려났기 때문일 것이다. 많아서 집을 차지하기도 했고….

이제 시간의 여백이 많아지니 차라리 다른 것들을 다 버리고 그것들이 있었야 했다는 통한이 밀려온다.

오디오도 30년 전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어디다 중고로 판 것도 아니고 그대로 아파트 쓰레기장에 갖다 버렸던 그 음반들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듣다가 그대로 껴있어서 살아남은 비발디의 바순 협주곡을 발견한 아침, 마침 첫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며칠 전 친구네 화랑에 가서 친구가 엘피판으로 들려주던 음악도 바순협주곡이었다. 아마 내가 대학 때 그 음악이야기를 많이 해서 친구도 샀을 것이다.

내가 가는 날 그 오래된 엘피판을 찾아서 들고 나온 것이다.

이 사소한 우연들이 가을 속으로 모인다.


나는 중고음반가게 가서 어쩌면 또 테이프들을 사모으게 될지 모르겠다.

e-book보다는 서면으로 보는 글이 더 깊고 오래 남듯, 형체로 만져지는 이 음반들이 무형의 파일들로 날아다니는 음악보다 더 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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