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실에 가로로 길게 내어진 창문이고 밖은 숲이다. 오래된 도서관 옆으로 나이 많은 나무들이 서있다.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 꼭 졸음이 온다. 아침의 노곤함이 몰려와서…
고등학생 때처럼 책상에 엎디어 잠을 잤으면 좋겠다. 집에서라면 잠시 자도 좋겠지만 막상 집에 가면 잠이 달아난다. 지천에 해야 할 것과 내 주의를 잡아끄는 것이 널렸기 때문에.
책 읽고 싶어 도서관에 오면 꼭 그때 피곤이 밀어닥친다는 게 문제다. 오늘 읽으려고 가져온 책 세 권을 쌓아놓고 머리를 얹고 자면 어떨까? 학생 때는 포갠 손위에 얼굴을 대면 순식간에 잠이 들어 단 10분을 자도 얼마나 달고 개운했던가. 지금은 안락한 침대에서도 잠을 쉽게 들지 못해 뒤척이고 알람 맞추어 일어나는 새벽에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이사 와서 집 가장 가까이 있는 교회로 새벽기도를 나가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찬송반주를 자청했다.
반주 없이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이 너무 이상했고 피아노를 칠 줄 알면서 같이 맨 입으로 노래를 한다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아서였다. 이제는 반주를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문제는 그냥 일찍 자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어렵다.
수면부족이 쌓여 이렇게 책을 읽거나 하는 정적인 활동을 할 때는 어김없이 잠이 온다.
<리흐테르> 전기집을 들고 나왔다. 이름만 들어봤지 실은 잘 모르는 피아니스트다.
무뚝뚝한 표정에 거구의 몸으로 압도적으로 연주했다는 피아니스트.
앞 글 <기억의 정리>에서 언급했던 그 친구가 선물한 책이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친구에게 가 닿을 수 있는 연락을 취했고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정말 궁금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세월에 어떻게 늙어있을까? 근 삼십여 년 만에 만나는 친구라니…
어릴 때 가느다란 선을 가진 섬세한 얼굴이었는데 나이 들면 그 얼굴은 어떻게 변하나. 굉장히 조숙해서 어린 나이에도 옷을 우아하고 품위 있게 입었었는데 스타일은 어떻게 변했을까? 많은 궁금증에 혼자 상상해 본 친구의 모습은 여전히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사모님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도 고위직 공무원이었던 터라...
만나기로 한 지하철 역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 쉼터 같은 곳에서 앉아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친구와는 지하철 역 밖에서 보기로 했는데 더워서 일찍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질 때 문득 휙 지나가는 사람의 윤곽이 친구 같았다. 얼굴이 친구 같은데 스타일이 너무 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고 있는 친구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마 친구는 지하철을 타고 오지 않고 그 동네에서 걸어 나와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걸어 나갔다.
밖에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아까 보았던 그 사람이 맞았다. 너무 놀라웠다.
여전히 깡마르고 여전히 짧은 머리이고 여전히 얼굴은 갸름하고 당연하게 눈가에 주름이 잡혀있었다.
아주 정직하게 늙은 얼굴이라고나 할까. 워커 같은 큰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 내게는 상당히 놀라울 일이었다.
갓 스무 살 때도 하이힐을 신었던 친구가 워커 같은 운동화라니...
우리는 서로 놀라워했고 서로의 변화를 바로 감지했다. 남이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귀족적이기까지 했던 친구는 아주 평범해 보였다. 특히 여자들은 직감적으로 파악하게 되는데, 전혀 피부관리랄지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산 모습이었다. 기어이 문학으로 석사 박사학위까지 마쳤다니 오랜 세월을 공부에 파묻혀서 살았다는 게 보였다. 내가 어쩌다 구글에서 검색했을 때 하나 잡히던 논문이 친구의 논문이 맞았다.
그 친구의 이름으로 뜨는 여러 가지 내용 중에 <막심 고리키>를 연구할 사람은 그 친구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박사논문은 <도스또예프스키>
큰 아이 고등학교 가면서부터 석사를 시작했다니 ᆢ
공부는 즐거웠다고 한다.
성수역 근처에 친구의 작은 아들이 운영하는 화랑엘 갔다.
돌맞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봤던 둘째 아들은 멋진 청년으로 자라 미술학도로 화랑을 운영하고 있었다.
미술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는 나는 늘 미술이 어렵지만 그 친구와 아들은 미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막 시작한 <신상원> 작가의 전시회를 둘러보고 같은 건물의 찻집으로 옮겨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삼십여 년의 세월이 두어 시간 안에 헤아려지고 있었다. 세월 앞에 얼추 비슷해지지 않겠는가 했던 내 생각대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리히쩨>라고 발음하며 리흐테르 전기집을 건네줬다. 내가 이미 읽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며….. 박사학위가 끝나며 그동안 공부에 매몰되어 즐기지 못했던 다른 것들을 누려보자 싶어 리흐테르를 들었다고 한다.
그 어떤 sns, 카카오 톡마저도 하지 않는 그녀의 삶은 본질적으로 예전과 같아 보였다.
잠을 자지 않고 책을 읽던 고등학교때와 별 다르지 않아 보였다.
왜 글을 쓰지 않느냐 물었더니 자신의 흔적을 어딘가에 남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네가 시인이 아니라 학자였을까…. 하고 내가 말꼬리를 흐렸다.
수없이 많은 책들 속에서 삶에 대해 생각하고 배우고 있지만 글로써 창작해 내야 한다는 기조는 없어진 것 같았다.
필요에 의한 학술적인 글들은 쓴다고 했다. 그녀의 아름다울 글들이 우수수 바람처럼 어딘가로 흩어져버리는 것 같다.
어쩌면 훌륭한 작가 친구가 있노라는 소리 하고 싶은 내 어린 꿈이었을까.
그녀는 책과 찻잔 세트를 선물로 가져왔다. 찻잔은 하나씩 나누어 갖자며 나보고 먼저 고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