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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주은 Jan 05. 2019

우리 동네 책방

  송언 작가의 『우리 동네 만화방』을 읽으면 이 작가의 유년시절이 미루어 짐작된다. 이 책을 읽으며 웃음이 나는 건 내 어린 시절들과 군데군데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던 곳에도 콧구멍만한 만화방이 있었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 그곳엔 좀 불량해 보이는 오빠들의 아지터였다. 그래서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면 책이 있으니 궁금해 하면서도 못 본척 휘리릭 지나가곤했다.

 나의 유일한 책방은 피아노학원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한  달 정도 다른 사람과 말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때 내 귀에 들린 피아노소리. 나는 피아노학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짓말을 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엄마가 그러라고 했다고. 3일을 배웠다. 3일이 지나도 엄마가 오지 않자 선생님의 이상한 눈길이 느껴졌다. 나는 엄마에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실컷 야단을 치신 엄마는 집안의 돈을 탈탈 털어서는 내 팔목을 잡고 피아노 학원으로 가셨다.

 난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참 좋았다. 피아노 소리가 좋았고, 건반을 누를 때의 묵직히 내려지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더 좋았던 건 피아노 학원 한 구석에 있는 책장이었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 그 시간동안 인어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헨젤과 그레텔, 콩주팥쥐, 시골쥐 서울쥐, 피터팬……. 동화 속을 마음껏 누비는 그 시간이 꿈결 같았다. 피아노 소리를 배경 삼아 동화 속으로 빠져드는 그 시간은 마치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날마다 찾아오는 빚쟁이 아저씨도 없었고, 엄마의 음울한 표정도 없었다. 그 속에서는 끝도 한도 없는 가능성이 있었다. 처음으로 맛보는 평온한 자유였다. 

 집에는 책이 없었다. 책이 있었다 해도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난 피아노를 다 치고도 밤이 될 때까지 책을 보다가 집으로 오곤 했다. 내 생애 첫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피아노학원이었다는 건 참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수업료를 제 때 내지 않는다고 그토록 나의 머리를 볼펜으로 때려대던 선생님이 책을 읽느라 집엘 가지 않는 나를 가만히 둔 건 참 의아한 일이다.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도서실 청소담당이 되었다. 도서실이라곤 하지만 가끔씩 과학실이 되기도 하는 그런 교실인데 거의 학생들이 사용하지 않았다. 책이 한쪽 벽면에 가득 있었는데  빌려주지도, 도서실로 개방하지도 않는 그런 공간이었다. 단지 명패만 도서실인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별로 청소할 것도 없었다. 난 청소 시간마다 대충 하는 척만 하고 그곳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또 책을 읽었다. 『들꽃아이』란 책이 있었다.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울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교를 오고가는 그 시간동안 나는 한동안 줄곧 그 아이와 함께 걸어가고, 걸어오고 했던 것 같다. 그 책이 너무 욕심이 나서 선생님 몰래 집에 가져가서 읽은 적도 있다. 집에서 여러 번 그 책을 읽고 몰래 다시 꽂아둘 때는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지금은 이 책이 교과서에 수록되어있다. 그러고 보면, 난 어린 시절 거짓말도, 도둑질도 꽤 잘한 모양이다.

 그렇게 책에 취미를 붙이다 중학교를 가게 되었다. 중학교는 내게 있어 완전히 신세계였다. 한 교실이 통째로 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마음대로 도서실의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었다. 이전에 도서실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은 그곳을 제 집 드나들 듯 하였다. 점심시간마다 북적이는 도서실. 누가누가 더 많이 읽나 경쟁하듯 책을 읽어댔다. 책에 있어선 질 수 없는 나였다. 하루에 세 권, 대출 권수가 성에 차지 않아 나는 도서실 담당을 또 자원했다. 도서실 담당은 청소 뿐만 아니라 책 관리, 책 수거, 책 대출, 대출증 관리 등등 할 일이 참도 많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좋은 점은 하루에 권 수 제한 없이 대출이 가능한 것이었다. 셜록 홈즈에 빠져 있을 때는 하루에 열 권, 스무 권 닥치는대로 빌렸다. 처음 이광수의 『무정』을 읽었을 때는 ‘무슨 이런 재미난 연애사가 다 있나?’ 했었다. 동화에서 빠져나와 연애소설을 읽으니 이건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었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저녁에 읽기 시작하면 새벽에야 책을 덮기가 일수였다. 레미제라블, 제인에어, 테스, 대지……. 내 사춘기를 지켜준 책들이다. 가난하고, 슬프고, 힘겹고, 낮디 낮은 그들의 삶 속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희극은 비극보다 인간에게 더 위로를 준다는 것은 실로 사실이다. 그들의 삶에 나를 투영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치료되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책방들은 나를 지켜주었고, 나를 키워주었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슬픔이란 건, 없앨 수는 없어도, 변화시킬 순 있다. 내 기저에 자리한 그 깊은 슬픔을 나는 책을 통해 나아가는 동력으로 변화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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