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버스 안,
키가 훤칠한 청년이 어르신의 묵직한 핸드카트를 번쩍 들어다 올려주고 부랴부랴 버스에서 사라졌다.
"고마워유" 하는 어르신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사는 인정사정없이 버스를 출발시킨다.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한 어르신은 다음 정류장까지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가득 다발무를 실은 핸드카트를 손에 꼭 쥔 채로.
지갑이 들어있는 듯한 후줄근한 에코백과 대파가 담긴 비닐봉지가 어르신 발치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잠시 뒤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자마자 어르신은 부랴부랴 널린 짐들을 챙겨서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카트가 쓰러질세라 단단히 움켜쥔 어르신의 보이지 않는 힘이 멀찌감치 앉은 나에게까지 전해왔다. 흐트러짐 없이 꽁꽁 싸맨 다발무 어딘가에 어르신의 억척스러움이 묻어있다.
김장철이군.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안부인사처럼 들려오는 소리.
"김장 언제 해?"
김장을 하지 않는 인간은 언제부터인지 그 질문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장 안 하냐는 시어머니에게
"엄마.. 지금 김장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며 다소 뻔뻔스러울 정도로 나의 힘듦을 강조하던 인간이 말이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한가하게 김장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건 맞다.
시장장사를 견뎌내느라 매일같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마당에 명절, 김장, 휴가 이런 일상의 단어들은 내게 사치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시장장사라는 극한직업도 벗어났으니 김장할 마음이 생겼냐?
그럴 리가...
내게 김치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마는, 그러다 정 생각나면 사 먹으면 되는 그런 존재? 인 것 같다.
집에서 담근 김치의 맛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냥 김장에 목매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뭔가를 바리바리 저장해 놓고 쟁여놓는 걸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성향 탓이랄까.
먹는 것에 두 팔을 걷어붙이는 그런 열정 따위는 없는 인간 인 셈이지.
며칠 전 시어머니가 퇴근길에 카톡을 보내왔다.
- 알타리 싸면 김치 좀 담을까?
네가 좋으면 담고 아니면 말고..
가게일만으로도 힘든 마당에 시어머니한테 일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서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담지 마요 엄마.. 힘들잖아요.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 김장 안 할 거야.
괴산절임배추가 맛있다 하던데..
너 남편 볶음 김치 좋아하는데.
-........??
알타리김치 담을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 카톡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끊겼다.
두 팔을 걷어붙일 때가 온 걸까?
김장철에 김장을 하지 않는 인간은 스스로를 괴롭히다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엄니~ 괴산절임배추 사다가 김장 조금만 할까유?
#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