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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완짹슨 Feb 13. 2022

30대 끝자락에 있는 나, 삶의 끝을 향해가는 아버지.

나이를 채워갈수록 알게 되는 것들

우리는 공평한 세상을 갈구하고 꿈꾸지만 세상은 본디 불공평하다. 그나마 유일하게 공평한 것은 바로 시간이라는 존재인 듯하다. 그럼에도 '한 살 한 살' 나이에 숫자 하나를 더할 때마다 이 공평 하디 공평한 시간에 조금은 야속함을 느낀다.


 "나에게만 조금은 느리게 찾아오면 안 될까?" 하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물론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후회 없도록 말이다.



아버지의 서른아홉

언제부턴가 내 나이에 아버지 시절을 상상해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예전에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궁금증보다는 그냥 그때의 아버지와 지금의 나를 같은 선상에 두는 것이다. 그럼 조금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아버지가 서른두 살이 되던 해 세상에 태어났다. 아버지 출생 연도와 내 출생 연도를 계산해 보니 한국 나이로 32살이다. 그리고 32살의 나는 대만에 있었다.


당시의 나는 대만 여자 친구가 있었고, 나 또한 결혼을 해도 될까?라는 고민도 많던 시기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것만 많은 철없던 30대 초반 청년은 이제는 세상과 합리적인 타협을 할 줄 아는 불혹을 향해가고 있다.


2022년이 되고 문득 아버지의 서른아홉을 떠 올렸다. 그 시절의 나는 집단 사회의 첫 번째 단추라고 할 수 있는 국민학교(1991년)에 입학을 했을 때였다. 이제 유치원 가서 나 여덟 살이야! ("여기서 내가 왕고야! 까불지 마")라고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놀이터라는 좁은 세상을 떠나 처음 발을 디딘 넓디넓은 운동장이 있는 학교라는 공간은 손이 스치기만 해도 피가 날 것만 같은 울퉁불퉁한 선인장으로 가득한 미로 같은 곳이었다.


같은 반에는 덩치가 꽤 큰 친구가 있었는데, 두 손으로 나를 들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나는 힘이 센 그 녀석이 처음부터 싫었다. 겨우 여덟 살이었지만 수컷의 본능은 그때부터 꿈틀거렸다.



<입학하던 날>

희미한 국민학교 시절 뚜렷한 기억 중 하나는 등교 첫날이었다. 등교 첫날은 당연하게도 수많은 학부형들로 학교가 붐비는 날이다. 그리고 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 듯 교실 밖에서 안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참지 못 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수많은 학부형 눈에는 내가 아닌 자기 자녀를 보러 온 것이겠지만 나는 그 상황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선생님 말에 집중하지 못하는 바람에 지적을 받았고 이후로 나는 '산만한 학생'으로 찍혀 버렸다. 그런데 천성이 안 바뀐다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 선생님 말이 옳았다.


<곧이어 찾아온 전학>

딱히 재미는 없었던 국민학교 입학 한 학기 만에 전학을 가게 되었다. 해군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인천 군인 아파트에 머물렀는데 부산으로 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덩치 큰 아이를 안 볼 수 있다.라는 생각에 기쁨도 잠시)

문제는 나 혼자만 가게 된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숙모와 삼촌이 있는 부산으로.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외할머니는 여전히 인천이었다.



그렇게 보낸 2년

그렇게 2년 정도를 떨어진 채로 살았다. 그 사이에 숙모와 삼촌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나에게는 절친과도 같은 사촌동생이었다. 생각해 보면 요즘은 상상하기 힘든 대가족 축에 속하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내 방은 없었고, 담배를 즐겨하시는 할머니와 한 방에서 생활을 했는데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싫었다.


사실 진짜 싫은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할머니는 삼촌의 아들 그러니까 내 사촌 동생을 훨씬 아꼈다. 갓난아이가 더 많은 관심과 사랑 보호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제일 근본적인 문제는 할머니는 정확히 친할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에게도 친엄마가 아니라 나와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삼촌의 친엄마였다. 그러니 할머니에게 삼촌의 아들이 진짜 손주였던 것이다.



가끔 아빠가 오던 날에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빠는 가끔이지만 부산에 들렸다. KTX도 없고 국내선 비행기도 사치였던 시절. 단 하룻밤을 위해서 긴 시간 '무궁화' 기차로 오고 간 것이었다. 하루 동안 아빠와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빠는 내가 자고 있는 늦은 시간에 도착을 했고, 다음날 아침에 내가 눈을 뜨면 잠깐 얼굴을 본 후에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아침 아빠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서럽게 울었던 기억 정도이다.


그때 서른아홉 아버지 마음이 어땠을지 한 번씩 생각을 해보고는 한다. 그 후에 시간이 흘러 그 시절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 아버지의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어린 아들에게 많이 미안하고 속상했겠지?라는 생각 정도이다. 노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으레 짐작만 하는 정도이다.



할머니에게 대들던 날

아빠가 다시 떠난 후에 나는 할머니에게 한 번씩 대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할머니의 태도가 부당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위 어른에게 대드는 것이 나쁜 건 줄 알면서도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여덟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어쩌면 혼자 떨어져 있는 속상함과 그 시절 아빠에 대한 섭섭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나를 두고 이곳에 두고 갔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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