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 바다 위,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폭풍은 어느새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끔 잠잠한 파도만이 일렁였다. 이따금 파동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나를 또다시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버티고 있으면 조용히 사라질 뿐이었다.
그렇게 내 일상은 잔잔한 푸른 바다를 벗 삼아 살아가는 섬마을 사람들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며 다가 올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번 겪어보니 드는 생각은 언제 올지 모르는 폭풍은 맞설 필요도 없고 피하기 위해서 발버둥 칠 필요도 없었다. 피하려들면 더 위험해 질뿐. 그냥 지나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 해 겨울 나는 온전히 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여행
그리고 이듬해 여름. 나는 두 번째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고 했던가? 첫 여행을 위해 발급받은 여권의 유효기간은 넉넉했고, 8월 첫 주에는 회사 전체가 쉰다는 것을 지난해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두 번째 여행은 조금 더 철저하게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00ml 넘어가는 고가의 화장품을 기내에 들고 타는 실수'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여행은 순조롭게 딱히 큰 고민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친구가 챙겨 준 선물 덕분에 다음 행선지는 자연스레 일본 오사카로 결정이 되었다. 물론 혼자서 말이다.
홀로, 떠나는 이유
혼자서 여행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하게도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렇지만 두 번째 여행지로 떠날 수 있게 해 준 계기 또한 친구의 선물 때문이었다. 친구는 내 생일을 축하한다며 본인이 일하는 곳에서 상여금 대신 받았다는 '부산 - 오사카를 크루즈 왕복권 2장'을 내게 주었다. 먹는 것도 아닌 것이 유효기간이 짧았기에 나의 다음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오사카로 결정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첫 번째 여행지도 지인이 도쿄에 있어서 간 셈이니, 이번 여행 또한 여행지에 대해서 선택권은 없었다.
오후 3시, 탑승 완료
드디어 고대하던 8월이 왔다. 부산 국제 여객선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크루즈선은 오후 3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9시에 도착하는 즉 배에서 1박을 하는 일정이었는데 나름 배 안에서 식사도 나오고 선상 파티와 바다를 보며 즐길 수 있는 대중목욕탕까지 있는 18시간이 크게 심심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당시 디럭스 룸이 2인실 기준 80만 원이었는데, 친구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에서 먹고 자는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이다.
목욕까지 마친 후 늦은 밤. 홀로 침대에 앉아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멋진 야경을 기대했건만 낮과 다르게 칠흑같이 깜깜한 탓에 바다와 하늘의 경계조차도 구분할 수 없었고, 그 어떤 움직임이나 작은 빛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내 오싹함과 지루함을 느낀 나는 조용히 이불을 덮었다. 애써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며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이대로 잠든 후에, 눈을 뜨면 오사카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아침 9시, 도착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칠흑 같은 어둠은 사라지고, 투명한 유리잔처럼 빛나는 아침 햇살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나는 졸린 눈이 제대로 떠지기도 전에 창문 밖 바다부터 바라보았다. 밤과 다르게 아침의 바다는 다이아몬드를 뿌려놓은 것 마냥 반짝거렸는데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화석 연료를 잔뜩 넣은 기관차 마냥 뛰기 시작했다.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잽싸게 하늘을 볼 수 있는 데크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 위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아카시 대교가 보였다. 아카시 대교는 점점 확대되어 내 앞에 나타났고, 그 아래로 배가 지나갈 때 기분은 커다란 빙하가 내 옆으로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곧이어 휴대폰에 로밍 신호까지 잡혔다. 슬슬 하선할 시간이 된 것이다.
<2008년 8월에 찍은 '아카시 대교' 길이가 무려 4k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길이의 현수교이다> 하선 후에는 단체 여행객들은 미리 준비된 Pick Up 차량에 탑승을 했지만 나의 경우는 무작정 사람이 보이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지하철역이 있었다. 실수로 티켓을 3장이나 사는 실수를 하고 말았지만 '온몸으로 해결?'을 한 후에 지하철에 탑승을 했다. 이제 내 운명은 손에 쥔 종이 한 장에 달려 있었다.
숙소 찾기 대장정
지하철은 어찌어찌 탔지만 숙소를 찾는 것부터 난관의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고 전단지 지도처럼 그려진 작은 지도와 한글 몇 마디가 전부였다. 문제는 내 눈앞에는 알 수 없는 일본어와 엇 비슷해 보이는 골목뿐이었다. 게다가 한인 숙소들의 경우는 간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숙소 찾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같은 골목을 몇 번이나 누비면서 2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겨우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습한 기후에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그럼에도 숙소 사장님이 반가운 정겨운 한국말과 함께 내어주는 시원한 보리차 한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낯선 땅에서 나는 첫 번째 미션을 해낸 것이다! 혼자이기에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시작했지만 그것은 점점 '묘한 설렘'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홀로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낯선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