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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온기

낯선 곳에서 전해지는 溫氣

by 타이완짹슨

유럽과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여행 중 계획에 없던 문제가 생겨버렸다. 이번 여행에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유일한 원칙 하나.

육로로 여행하기

이번 여행은 3면이 바다이고 북쪽으로는 38선이 있는 한국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여행을 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시작된 여행은 튀니지와 이탈리아를 25시간씩 25시간씩 총 50시간을 배에서 보낸 끝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지만 정작 모로코로 가는 배를 탑승하기 위해서는 바르셀로나가 아닌 다른 지역(남부 지역 세비야로 가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 탕헤르라는 지역을 1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다)으로 가야만 했다. 바르셀로나에도 배편이 있기는 했지만 값비싼 뱃삯과 또다시 25시간이라는 항해는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원칙을 한번 어기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쉬움은 남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큰 오점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카사블랑카, 새벽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에 도착하여 저렴해 보이는 숙소를 찾아 짐을 풀고는 항공편부터 검색을 해 보니 당장 내일 출발하는 카사블랑카행이 가장 저렴했다. 카사블랑카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영화 제목뿐이었지만 일단 모로코를 가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했기에 서둘러 결제를 마쳤다. 그리고 낯선 카레맛이 느껴지는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다시 티켓을 살펴보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당연히 낮 비행기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다시 보니 아무래도, 밤 12시 01분인 것 같았다. 애매한 이 상황을 숙소 직원에게도 보여준 후에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어쩐지, 가격이 싸더라) 하지만 이미 환불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저 이 상황 또한 받아들이기로 했다. 딱히, 대안도 그렇다고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다음날 아침, 부지런히 바르셀로나 중심가를 활보하며 이곳 분위기를 즐겼지만 살인적인 물가에 다시 한번 놀라며 길거리 음식 하나로 하루를 버티며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자 왁자지껄 했던 바르셀로나의 밤은 낮과 다르게 한산해졌고 이따금 스산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거리 곳곳엔 주황빛 조명들이 오랜 역사가 스며둔 건축물들을 비추고 있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고 배도 고팠던 나는 조금 빨리 공항으로 들어섰다.

<카탈루냐 광장 내 시장에서 사 먹었던 10유로짜리 타코. 따로 좌석도 없어서 길거리에 앉아서 먹었다>


마이 네임 이즈 모하메드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곳곳에 공항 노숙을 준비하는 배낭 여행객들이 곳곳에 보였다. 아마도 아침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서 미리 온 듯했다. 그리고 몇몇은 이곳이 안방인 것처럼 바닥에 철퍼덕 눕기도 했는데, 몇 시간 후 내 모습일 수 있었기에 그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은 나름의 '위로와 용기'가 되었다. 늦은 밤 발권은 빠르게 끝나버렸고 그저 내 머릿속에는 "빨리 도착해서 노숙하기 좋은 자리를 찾을 생각"만 가득하던 그때 저 멀리 루이뷔통 가방을 멘 젊은 여성과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남성이 다정하게 스킨십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스페인의 문화가 이 정도로 개방적인가? 그리고 저 가방은 중년의 남성이 준 선물일까?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탑승을 준비하는데 중년의 남자는 하필 내 뒤에 줄을 서 버렸다. 그런데, 웬걸?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들은 부녀 관계였고 프랑스에 거주하면서 모로코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루이비통을...) 게다가 비행기에 오른 후에는 기내에서 음료까지 사주면서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모로코는 처음이냐? 계획은 있냐? 숙소는 예약했냐?" 등 나는 누가 봐도 별 계획 없어 보이는 여행객으로 보였나 보다. 참다 못 한 나는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데 비스킷도 하나 사주세요"라고 말할 뻔했지만 너무 염치가 없어 보여서 음료 하나로 감사해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는 점점 그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 했던 못난 상상?.. 에 미안함이 밀려들었다.


그를 소개하자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름은 모하메드(혹은 무함마드)이며, 프랑스계 모로칸이었다. (모하메드는 이슬람교 창시자의 이름이며 전 세계 가장 많은 이름이라고 한다) 대화를 하다 보니 2시간의 비행은 금방 우리를 카사블랑카에 내려주었고 나는 결국 모하메드를 따라가기로 했다. 막상 도착한 공항은 사람이 없어 적막했고 실내는 마치 영업을 안 하는 편의점처럼 대부분의 불을 꺼 둔 상태였다. 작은 소음도 크게 들리는 이 어둡고 습한 곳에서 노숙할 생각을 했다는 것에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오히려 그를 따라가는 것이 더 안전할 것만 같았다.



새벽, 3시

공항 밖 또한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 대부분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해 보였고 지인 혹은 가족들이 데리러 오는 모양이었다. 나 또한 모하메드의 친구가 몰고 온 봉고에 탑승을 했고 어두 컴컴한 길을 한참이나 달린 후에 가로등이 밝혀주는 큰 도로가 나타났다. 참았던 큰 숨을 애써 들키지 않으려 조용히 내 쉬며 속으로 생각을 했다.

"만일 공항에서 모하메드를 만나지 못했다면?"이라고 말이다. 문득 원칙을 어기고 한 비행기에 탑승을 한 것은 무언가 운명이라고만 느껴졌다.

친구는 우리를 내려준 후에 모하메드와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나 또한 그에게 감사함을 표한 후에 그들을 따라 어느 건물로 향했다. 깊은 고요함 속에서 발자국 소리만이 이곳이 새벽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3층 정도 올라갔을까? 모하메드 가족이 있는 집의 대문이 열렸고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빛 사이로 10명 가까운 대가족들이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않고 기다려 주는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낯선 이방인에게도 이렇게 환대를 해주는 걸로 보아서는 모하메드가 미리 이야기를 해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 집을 방문한 첫 번째 손님도 아닌 듯해 보였다.


늦은 시간, 가족들은 모하메드와 그의 딸 클라라 그리고 나를 위한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모로코 전통 수프를 한입 삼키는 순간 입 안으로 곡물의 구수함이 느껴졌고 목구멍을 넘어가니 수프의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허기졌던 나는 금세 한 그릇을 비워냈고 그것을 모하메드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은 말없이 국자로 한 그릇 더 퍼 주었다.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드는데 문득, 나를 유독 이뻐해 주셨던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잔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그릇에서 두 번째 온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그릇까지도 금세 비운 후에 세 번째는 직접 떠먹었다. 체면은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씻지도 못해서 온몸이 꼬질 꼬질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온기로 가득해지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그들은 식사를 마친 내게 말없이 이불을 건네주었다. 이불 또한 마음의 온기를 지켜주기에 충분히 묵직했다.

누워서 이불을 덮고 눈을 뜨고 있어도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다, 이곳에 누워있게 된 거지?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 어떤 계획도 잘 곳도 없던 나였는데.. 어쨌든, 이 여행 참 재미있네? 그렇지? "라고 스스로에게 말한 후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도마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어느덧 카사블랑카의 아침은 밝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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