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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후 Jan 21. 2021

달라진 세상, 평범한 하루

꿈이라면 깨지 않을래요


상쾌한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울에 있던 내가 낯선 마드리드에 홀로 와있다. 실감도 잠시, 나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 집을 채우기 위해 마트로 향한다.


서울의 나는 장을 볼 때 기본적인 재료만 사거나, 맛있는 것보다는 싼 것을 사곤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무조건 싼 것보다는 새롭게 먹어보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고른다. 후식까지 든든히 담는다.

집에 돌아온 나는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한다. 채소와 소시지를 듬뿍 넣은 볶음밥을 먹는다. 이 쉬운 요리를 두고, 나는 채소 손질이 귀찮아서 왜 라면만 먹었을까? 나는 당연한 삶에서 멀어져야 비로소 나를 돌보는 사람인가.




살랑이는 바람이 부는 오후, 나는 집을 나선다.

새하얀 마드리드 왕궁 옆을 지난다. 손을 뻗으니 오래된 건물의 질감이 닿는다. 희미한 하프 선율이 들린다. 광장에 모여 누군가 버스킹을 하고 있다. 내가 마시고 있는 이곳의 공기와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 두 발, 손만 뻗으면 닿는 이곳의 촉감. 지금이 혹시 꿈은 아닐까. 꿈이라면, 차라리 깨지 않는 편이 좋겠다.





조그만 동네 빵집에서 빵 하나와 커피를 사고 사바티니 정원으로 향한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책을 꺼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알아듣지 못할 스페인어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책을 읽는다. 700원밖에 하지 않는 에그타르트는 놀라울만치 맛있다. 가끔 고개를 들면 푸른 공원과 너머의 왕궁이 내 앞에 있다. 간절했던 행복이다.





바쁘게 걷고 있는 사람들을 눈에 담으며 나는 오페라 골목을 걷는다.

작은 책방이 있다. 주인은 책 표지마다 그 책의 분위기를 하나하나 손수 적어 두었다.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책방을 둘러본다.

아, 마침 내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한 책이 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 한국에서와 다른 표지와 새로운 느낌에 살까 말까 고민에 빠진다. '스페인어로 된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현실적인 답변이 나온다. 하지만 이내 '스페인어로 된 책이라니. 이보다 더 멋진 기념품이 어딨어!' 나는 생각을 바꾼다. 평소에 나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서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이곳의 공기를 한껏 폐에 담아본다. 비로소 마드리드는 나의 현실이 된다.



인생에 버거운 순간마다 나는 지구의 다른 도시를 떠올린다.

나에겐 이상한 확신이 있다. '힘든 일이 있어도 괜찮아, 그럴 때마다 나는 이곳으로 떠나올 테니까.'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할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지만, 신기하게도 아는 이 하나 없는 마드리드는 나에게 고향의 위로를 주었다.





떠나오는 비행기 안에서 걱정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마드리드가 많이 변했으면 어떡하지?"

나는 현실의 실패를 뒤로 하고, 단순히 몇 년 전 좋았던 기억을 찾아 마드리드로 떠났다. 하지만 이곳마저 변해있다면 내가 마드리드에 온 이유는 사라지는 걸까.

사소한 걱정과 달리 마드리드는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이곳의 하늘과 햇살과 거리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눈이 부신 아름다움이었다.


마드리드는 내가 가장 힘든 순간 떠올렸던 꿈이다.

지구에 내 몸을 숨길 도피처였다. 그곳에 있는 나를 상상하게 하는 내일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곳에 가겠지, 그렇게 견디며 오늘을 살았다. 그리고 나는.



그리고 2021년 1월, 나는 또다시 이곳을 떠올린다.

아, 내가 조금 힘에 부치는구나. 이제야 나는 나를 외면하지 않는다.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인다.


혹시 지금이 꿈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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