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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후 Jan 27. 2021

20대 중반, 가장 잘한 선택과 가장 아쉬운 선택


유튜버 굿수진의 영상을 보고 나의 지난 인생을 돌아봤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과 아쉬운 선택은 무엇일까?









첫 번째, 일찍 여행을 떠난 것

여덟 살에 엄마와 은행에서 통장을 만든 기억이 생생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용돈이 생기면 수시로 은행에 들려 돈을 저금했다. 오십 원, 십원 동전을 저금통에 모으고, 학기가 끝나면 교과서를 폐품수거 업체에 잔뜩 들고 가고, 친구들과 한강 벼룩시장에서 안 쓰는 물건을 팔아가며 나는 6학년이 되던 해 백만 원을 모았다. 여덟 살의 는 백만 원이 모이면 노트북을 사겠다 다짐했지만, 막상 육 년이 지나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노트북 따위에 내 돈을 것은 너무 아까웠다. 이 돈으로 멋지게 세계여행을 해야지. 나는 목표를 다시 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됐다. 나는 육 년 전보다 돈을 더 모았고,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다. 대학교 1학년 첫 여름방학, 나는 몰타에 교환학생을 간 언니를 보러 유럽행을 결심했다. 하지만 고민이 시작됐다. 제대로 배낭여행을 가본 적이 없는데 처음부터 가장 꿈꿔왔던 유럽을 가서야 되겠어? 나는 아직 여행 경험이 없는 지금이 유럽을 가기에 완벽한 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항공권을 찾을수록 어찌나 비싸고 복잡하던지. 프랑스에서 영국 가는 기차를 찾고, 영국에서 스위스 가는 비행기를 찾고, 스위스 패스는 또 뭐람. 알아볼수록 두려움은 커졌고, 나는 주변 국가나 동남아시아를 먼저 여행하고 이십 대 중반쯤 유럽에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아빠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그냥 가. 완벽한 때는 없어."




육 개월 전만 해도 매일 플래너를 쓰며 공부량을 계획하던 내가, 어른의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학교 밖에 세상은 나의 작은 플래너처럼 탄탄대로 움직이지 않겠지? 돌아보니 그 예감은 무섭게도 적중했다.


그렇게 십여 년 간 모은 돈으로 나는 유럽행 비행기를 끊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에 고군분투 유럽을 여행한 경험은 나의 인생을 확장시켰다. 면목동이 전부였던 작은 세상은 유럽으로 넓어졌고, 계획되지 않은 삶에서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이 됐다. 보여주기 식의 삶, 무언가를 이뤄야 인정받는 삶에서 조금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스무 살 여름 방학, 유럽에서의 경험은 대학 생활 내내 나에게 다음 여행을 꿈꾸게 했고, 스페인 교환학생을 떠날 용기를 주었고,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일지 진지한 물음을 던져 주었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두 번째, 공무원 시험을 포기한 것

엄청난 돈과 시간을 바쳐야 하는 시험을 나는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없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나는 공무원 시험을 공부했고, 열심히 했다고 부끄럽지 않게 스스로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험을 삼사 개월 앞두고 내게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겼다. 나는 학원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장례식장에, 입원 병동에, 상담센터에 가는 이 늘었다. 그 시절 나는 웃은 기억이 없다. 가족 모두가 힘들었기에 그들에게 기댈 수 없었다. 되려 내가 그들을 버티게 해야 했다. 한 번은 친한 친구에게 말을 하고 싶어 그의 집 근처에 찾아갔다. 하지만 마냥 밝은 그를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누구에게서 답을 바랄 수도 없고, 결국은 내가 해결해야 할 선택이라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나는 수일을 힘들어하다 끝내 시험을 포기하고, 수일을 그보다 더 힘들어했다. 좋아 보이는 삶,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삶 말고 '내가 원하는' 삶에 용기를 가져보고자 했다.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한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나는 많이 두려웠고, 내가 힘들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할 만큼 아팠다. 하지만 나를 위해 포기를 선택했다.



이 글은 "포기해도 괜찮다"는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니다. 지금이 기나긴 슬럼프일 수도 있고, 지금의 고비만 넘기면 다시 괜찮은 시기가 충분히 올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너만큼 힘들어" 혹은 "이것도 그만 두면 너는 뭘 할 수 있겠어"라는 말에는 반기를 든다. 나 또한 시험을 그만 두면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무얼 할 수나 있을까 두려웠지만, 정말 뻔하고 당연하게도 희망은 생기고, 살아야 할 다른 이유가 생겼다. 어차피 선택은 내 책임. 아무도 정답을 모르고, 내 인생의 정답은 나만이 만들 수 있다.


이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남들이 좋다는 거 말고 내가 좋아하는 건 어떤 건지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공무원 시험을 포기한 그날의 선택은 정해진 틀을 깨고 내 세상에 책임을 지겠다는 나의 첫 번째 결심이자 사건이 됐다.






후회는 하지 않으니, 아쉬운 선택이라 하겠다. 사실 잘한 선택보다 아쉬운 선택로 인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쉬운 선택 속 나에게 부족한 점을 배우고 더 괜찮은 내가 되고 싶을 뿐이다.




첫 번째, 공무원의 꿈을 꾼 것.

나는 계획형 사람이고,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 꿈은 한 학기 동안 내가 법원직 공무원이 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글을 쓰고, 직업의 장단점 분류하고, 선배와 어른들의 조언을 구해간 끝에 심사숙고한 결정이었다. 법조계의 일을 하고 싶다는 나의 뜻과 잘 맞았다. 무엇보다 공무원이 '좋은' 직업이라 생각했다. 법원이라는 직장, 공무원이라는 안정성, 재판에 대한 업무, 꼼꼼한 성격, 급여와 연금, 사회에서 받는 인정. 지금 돌아봐도 공무원은 좋은 직업임에 틀림없다. 여전히 멋지고 많은 장점을 가진 직업이다. 하지만 '좋은' 직업과 별개로,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의 방향성과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자유성도 중요한 가치였지만, 그만큼 일의 보람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불공정한 사회를 바라볼 때 그래도 법은 아직 시민의 편이라 생각했다. 법은 무고한 사람을 구해줄 가장 공정한 수단일 거라고. 사람이 참 신기하게도, 그 가치 또한 바뀌게 된다. 많은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나의 삶도 변화하면서 과연 법이 모두에게 공정한지 확신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조두순 사건에 분노하면서 수많은 피해자보다 한 명의 가해자 보호가 우선인 것이, N번방 사건에 분노하면서 관심이 사라지면 전과 같은 사회가 반복되는 것이, 양천구 아동학대 사건에 분노하면서 법이 진정 최소한의 약자를 보호하고 있는지,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직도 싸우는 혹은 숨어버린, 죽어버린 피해자를 앞에 두고 무고한 희생양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법학에 대한 애정을 여기까지 남겨두고, 다른 길을 가보고 싶었다. 스무 살 이전의 내가 가진 가치와 성향을 버리고, 달라진 나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혼자 여행을 하며, 문화 예술을 접하며, 책을 읽고 동경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은 용감해진 나를 지지하기 위해 다른 꿈을 찾아갔다. 이제야 사회가 정한 성공과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목표, 나의 방향, 나의 속도를 받아들였다.

 




두 번째, 좋아하는 일을 "적당히" 한 것

영화, 글쓰기, 여행, 좋아하는 일은 수없이 많았지만 나는 그 이상 깊숙하게 파지 않았다. 영화와 공연을 좋아하지만 '그건 돈벌이가 될 수 없다'라고, 글쓰기와 미술을 좋아하지만 '그건 타고난 사람들의 영역'이라고, 스페인을 사랑하지만 '일을 하며 사는 것과 여행은 다르다'라고. 취미 정도로만 남겨 두고 끝을 보지 않았다. 그중 하나라도 끝을 봤으면 지금 가는 길이 조금 더 명확하지 않았을까? 경험은 하되, 가능성은 항상 닫아뒀다. 이것 역시 나의 또다른 겁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나의 한계는 나를 그 정도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논리를 깨버려야 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말하든, 내가 스스로를 타고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든 상관없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어떤 일을 시작했다면 좋아하는 감정의 끝을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항상 그 끝의 실패를 염두하며 끝까지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추어적인 경험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준전문가가 될 정도의 노력과 용기가 있었으면 나는 더 풍성한 사람이 됐을 거란 아쉬움이 있다. 한번 해본다는 '경험'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좋아하는' 감정에 초점을 맞춰야 다.



좋아하는 감정은 결코 하찮은 게 아니다. 이는 아주 고결하고 귀한 마음이며, 본능이기도 하다. 중요한 결정은 결국 이성이 아닌 본능을 따르는 것이 맞다.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끝까지 가봐도 괜찮다. 그 끝이 마냥 찬란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태양은 있을 것이다.


사회가 말하는 '좋은'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다. 좋은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주체성의 유무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체성을 가진 삶을 살고 싶다. 내 삶은 끝까지 나의 것이 아닌가!





이 글은 정답이 아니다. 나의 경험 또한 정답이 아니다.

단지 당신에게 나 같은 삶도 있다고, 이런 삶의 변화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할 따름이다.


꿈과 미래는 중요하다. 하지만 앞만 보면 알 수 없다. 돌아봐야만 인생을 볼 수 있다. 자, 이제 나를 조금 알았으니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가 볼까. 힘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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