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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어푸 Aug 28. 2022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경력이 아닌 경험이었다

20대 후반, 커리어를 시작해야 할 나이에 제주살이를 택한 건 그저 나의 감에 따른 행동이었다.


회사생활과 제주살이의 장단점을 정리해봐도, 경력이 짧은 사회초년생에게 제주살이는 득보다 실이 많은 결정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 경력에 공백이 생길 거고, 서울에 돌아와서 험난한 취업 준비를 다시 시작해야 테니. 막연한 두려움이 따랐지만, 이성보다 직감이 결국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때의 나는 제주에 살아보고 싶었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삼 년 전 비슷한 을 한 적 있다. 일 년 간 준비한 시험을 그만두고 스페인행을 택했던 것이다. 마드리드에서 지내는 한 달이란 시간 동안 나는 별다른 여행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걸었고, 공원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올해의 제주도 비슷했다. 여행을 하기보다 내가 사는 동네를 하염없이 걷고, 바닷가에 앉아 일몰을 바라보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날들이었다. 이런 시간이 무의미하진 않을까 하는 우려에 유튜브라도 시작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초조함에 평화로운 삶을 깨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어 떠난 제주행이 아니었으니 그 시간을 나의 몸에 새기고 글로 남기는 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제주에서 돌아온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본격적인 백수가 되었다.






제주에 있는 동안 확실한 꿈을 갖고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달리, 여전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획했던 바와 달리 바로 취업을 하지도 않았다. 취업은 느슨하게 준비하되, 지금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고민을 시작했다.


그중 첫 번째가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나의 브랜드를 만들어 상품을 팔아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브런치에서 연이 닿은 작가님과 뉴스레터 <비하인드 룸>을 만들어 매주 한 편씩 원고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쉽지만은 않았던 20주의 여정을 마치고, 나는 한 번의 지각없이 걸어온 발자취에 작은 감동을 느꼈다. 마지막 스무 번째 메일을 발송하고 '우리에게 내적 친밀감을 쌓게 되었다'는 독자님의 답장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다시금 새겼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 나와 비슷한 고통을 지나고 있을 사람과 연결되고 싶다는 소망이 현재도, 과거에도 글을 쓰게 하는 나의 원동력이었다는 걸.


두 번째 도전이었던 상품을 팔아보는 경험은, 펀딩 목표금액 달성에 실패하면서 후원자들에게 닿지 못했다. 그전에 어떤 가치를 소비자에게 전하고 싶은지, 이 상품을 만들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나는 몇 달 동안 발로 뛰고 눈으로 보며 배웠다. 원단과 부자재, 생산공장이 있는 동대문과 군자동을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고민한 날들과, 직접 상품을 촬영하고 상세페이지를 만든 모든 과정은 참 고됐지만, 이보다 더 큰 도전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 경험들은 회사 밖에서 내 일을 꾸려볼 수 있겠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신입으로서는 운 좋게 포지션 제안을 받아 취업을 했고 적응과 휴식을 겸한 하루들을 보내고 있다.




경력에 빠질 수 없는 건 숫자다.

사회는 우리가 몇 년을 일했는지, 얼마만큼의 성과를 냈는지 수치화된 결말을 원한다. 취업을 하기 전까지의 시간 속에 나는 경력을 잃었다.


하지만 삶에선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 있다.

나를 하루하루 지치지 않고 살게 한 건 숫자가 아닌 글자였고, 결과가 아닌 과정이었다. 경험에는 성공적인 수치나 결과가 필요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경험과 실패 속에서 나는 '평생 나처럼 살아도 괜찮겠다'는 막연한 용기가 생겼다. 그만큼 나 자신이 마음에 들고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처럼 살아도 굶어 죽진 않더라'는 다소 가벼운 이치를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비치는 모습보다 자주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무너지는 만큼 거뜬히 일어나기도 한다는 걸,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후회하면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걸. 경험 속에서 나를 알게 됐다는 건 경력과 바꿀 수 없는 자산이었다. 그러니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앞으로도 나답게 살아보자는 웃음 섞인 바람으로 나의 지난 계절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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