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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Dec 03. 2024

페르미 추정 두뇌 활용법

도쿄대학 케이스스터디연구소

강혜정 옮김

AG21

2011년 7월 18일


젊은이들의 문해력이 걱정스럽다는 글이 보이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나는 여러 이유 중 한자를 배우지 않은 세대라는 걸 첫 번째로 꼽는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자가 문해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한자가 뜻을 나타내는 표의문자이고, 그래서 뜻을 모르는 단어를 만났을 때도 각 글자의 뜻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한다는 게 사지선다형 시험에서 요행을 바라고 찍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냐는 농담조의 댓글을 읽으면서 문득 ‘페르미 추정(Fermi Estimate)’이 생각났다. 도서관 장서를 검색하니 ‘페르미 추정’을 설명한 책은 보이지 않고 그것을 적용해 직접 문제를 풀도록 만든 책만 눈에 띄었다.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는 1945년 7월 16일 실시한 인류 최초 핵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 당시 폭발 지점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베이스캠프에서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그 위력을 추정했다. 페르미는 그 위력을 10킬로톤으로 추산했는데 실제 위력은 20~22킬로톤으로 2배가량 차이 나지만 현장에서 짧은 시간에 간단한 계산으로 그 정도 가까운 값을 추산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폭발 후 약 40초가 지나자 폭풍이 내게 닿았다. 나는 충격파가 지나가기 이전, 도중, 나중에 각각 작은 종잇조각을 6피트 높이에서 떨어뜨려 그 폭발력을 추정했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서 나는 폭풍이 지나가는 도중에 떨어진 종잇조각의 변위를 명확하고 사실적으로 측정할 수 있었다. 변위는 약 2.5미터 정도였고, 그때 나는 이 정도 폭풍이면 폭발 위력이 10킬로톤쯤 된다고 추정했다.”


이처럼 페르미 추정은 어떠한 문제를 기초적인 지식과 논리적 추론만으로 짧은 시간 안에 대략적인 근사치를 구하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글을 읽은 게 아마 학생 때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 후로 이 방법은 온전히 내 나름의 문제해결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뭔가 숫자를 짐작해야 할 일이 생기면 먼저 이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곤 한다.


페르미 추정을 설명한 책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예제로 낸 문제를 아직도 기억한다. 서울에서 유럽 어느 도시까지 거리를 추정하는 문제였다. 로마였는지 파리였는지 싶은데, 아무튼 아무런 자료도 찾아보지 않고 추정해보라고 했다. 물론 답을 찾지는 못했다.


“지구 둘레는 적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4만 킬로미터. 서울과 로마 시차는 8시간이니 사이 각은 지구 전체의 1/3에 해당하는 120도. 로마와 서울 위도를 대략 40도로 치면 그 위치에서 둘레는 약 3만 킬로미터. 그렇다면 두 도시의 거리는 3만 킬로미터 나누기 3이니 대략 1만 킬로미터. 실제 두 도시 간의 거리는 9천 킬로미터.”


이 정도면 추정한 결과치고는 준수하지 않은가?


하지만 ‘페르미 추정’을 알았다고 해서 이처럼 금방 그 방식으로 문제가 풀어지지는 않는다. 생각을 쥐어짠다고 해서 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지금도 답을 찾기 막막한 문제를 만나면 언제나 이 방식으로 답을 추정하고 있고, 이제는 그렇게 추정한 결과와 실제 값이 그다지 크게 차이 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상당한 연습과 훈련이 필요했다. 수십 년 끊임없이 연마해왔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의도적으로 그런 문제를 찾아 추정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사실 ‘페르미 추정’은 이 이상 설명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이 책에서는 ‘페르미 추정’을 적용하기 위해 ‘전제 인식-접근법 설정-모델화-계산-검증’과 같이 5단계를 거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페르미 추정’이 너무 단순해 설명할 게 없어서 굳이 끼워 넣은 사족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을 이용해 직접 문제를 풀어보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용도로 쓰기에 아주 적절하다. 도쿄대학교 케이스스터디 연구회라는 곳에서 펴낸 책인 만큼 모두 일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문제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문제를 그대로 우리 상황으로 바꿔도 아무런 차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첫 번째 예제를 통해 일본 전국에 가방이 몇 개나 되는지 묻는다. 이를 해결하려면 개인이 평균 몇 개의 가방을 보유하고 있는지 가정을 세운 후 그 숫자에 인구를 곱하면 된다. 좀 더 정확히 추정하자면 인구를 성별과 연령대로 나누고 각 그룹의 보유 가방 수를 가정해 각 그룹 인원만큼 곱해 합산하면 된다. 이처럼 처음부터 완성도 높은 추정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일단 추정하고 각 추정의 정확도를 한 단계씩 높여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내자면 끝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팔리는 치킨은 몇 마리인지, 시카고에 있는 피아노 조율사는 모두 몇 명인지, 서울에 있는 미용실은 몇 곳인지 추정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앞서 설명한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페르미 추정’은 터무니없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 대해 논리적 효율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미루어 짐작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인 셈이다. 관련 자료를 찾다 보니 이 방식이 입사 시험에 많이 도입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것 말고도 검색엔진이나 인공지능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해서 이런 방식은 거의 퇴출당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아직도 ‘페르미 추정’이 일상생활이나 업무 수행에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의 제목처럼 두뇌 활용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식일 뿐 아니라 검색이나 인공지능의 도움이 언제든 가능한 것만은 아니니 말이다.


책값은 만 원 남짓하고 전체 200쪽에도 미치지 못해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만하다. 거기서 ‘페르미 추정’의 의미를 체화했다면 후로는 업무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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