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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Dec 16. 2024

방법으로서의 차이나

이반 프란체스키니, 니콜라스 루베로

하남석 옮길

헌겨레엔

2024년 10월 31일


두 해쯤 전에 우리 사회에 불평등이 심화한 시점이 1997년 외환위기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 1992년 전후에 일어난 중국 개혁개방과 한중수교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진보 정책가의 책을 읽은 일이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WTO 가입으로 이어지고 수출 중심 공업화 정책의 결과로 세계의 공장이 되어 수출량이 급증했으며, 한중수교로 중국특수에 올라탄 한국 대기업의 고임금 종사자 소득이 급격히 늘어났고 동시에 저기술ㆍ제조업이 중국으로 이전함에 따라 중임금 일자리가 사라짐으로써 중간층이 얇아져 불평등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판단할 만큼 아는 것이 없는 내게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었지만 경제학자 몇몇이 저자가 논리를 세워놓고 거기에 맞는 데이터를 골라 사용했다고 비판했을 뿐, 그밖에 학계나 정책 관계자들이 딱히 그에 대해 언급한 걸 보지 못했다. 그렇기는 해도 경기를 분석한 경제 기사들에 따르면 저자가 주장한 만큼은 아닐지언정 중국 경제는 우리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갖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우리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중국인데도 두 번 출장 다녀온 것 말고는 특별히 업무로 연결된 일이 없다. 중국에 대한 내 시각이 지극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 내게 중국이란 전제주의 제국이니 권위주의 국가니 하는 평가에 앞서 매우 무례한 나라로 각인되어 있다. 역자 해제에 따르면 중국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 이와 그다지 다르지 않고, 한국 MZ세대 사이에서는 중국 혐오 정서까지 퍼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혐오할 만큼 싫은 상대는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을까? 저자는 중국을 보는 시각으로 1) 자유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전제주의 국가이므로 적대적 경쟁 상대로 여겨야 한다는 본질주의, 2) 교류와 협력을 늘려가다 보면 결국 자유화와 민주화를 이룰 것이라는 햇볕주의, 3) 서방 선진국들도 과거 제국으로서 저지른 과오를 생각하면 중국을 지적할 자격이 없다는 피장파장주의, 4) 인권탄압을 하든 말든 실속이나 차리자는 실용주의로 나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중국에 대해 보여온 시각은 이중 본질주의와 실용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7~80년대에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중국에 대해 내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한 호응을 얻은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재적 접근’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이는 중국 혁명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역사와 사상을 이해하고 혁명이 추구하는 바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데,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결국은 내가 짐작했던 것처럼 그들의 주장은 결국 중국의 주장을 수용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저 뭔가 있어 보이는 말로 포장한 것일 뿐.


중요한 건 주장이 아니라 그 주장이 어떻게 이행되고 있는가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중국을 내재적으로 접근하자는 주장과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는 체제라는 주장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내재적 접근이나 공산주의의 취지 자체는 잘못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실제로 공공 여론의 장에 등장하는 각종 주장 중 취지가 나쁜 주장이 어디 있겠나. 취지는 선하지만 주장 자체가 갖는 결함 때문에, 혹은 취지도 좋고 결함도 적은 주장이지만 그대로 실천하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지. 그래서인지 이제는 중국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호주 멜버른대학과 스웨덴 룬드대학에서 중국을 연구하며 ‘Made in China Journal’의 공동 편집자인 두 저자는 중국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처럼 내재적 접근(친중)이나 본질주의적 접근(반중), 또는 실익만이 중요하다는 실용주의적 접근만으로는 중국으로 인해 불거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주장이 아닌 엉뚱한 것에 시선이 붙들렸다. 중국 비난에 앞장선 나라 대부분이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인 중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직접 간접으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MIT를 비롯한 국제 유수 학술기관이 위구르족 탄압이 일어나는 신장 지역 안보 기관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인공지능기업과 연구 제휴를 맺었다. 미시간 주립대학 생체인식연구단장이 신장 우루무치 생체인식 학술회의에서 발표했을 뿐 아니라 회의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생체인식연구는 위구르족 탄압의 도구로 사용된다. 시드니대학은 중국 무장경찰이 위구르족 추적에 사용하는 앱을 개발한 국가방위산업체와 업무 제휴를 맺었다.”


생체인식이건 인공지능이건 사람에게 적용되는 기술인데, 그러자면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게 필수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정보나 더 나아가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위협하다 보니 제대로 실험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기술의 완성을 눈앞에 둔 연구자로서 욕심이 날 법한 일이다. 물론 그들은 선의에서 출발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뒷받침하는 집단은 뒷받침하는데 드는 만큼의 대가를 원할 것이고, 선의는 필연적으로 악용으로 치닫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선의의 연구자들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들의 선의가 위구르족 탄압에 사용되는 것을 모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권과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서구 국가들이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저자에 따르면 1919년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중국을 향해 노동법 제정을 요구했는데, 이는 중국 노동자의 인권과는 무관하게 중국의 저임금 노동에서 서구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 가까이 흐른 2007년 중국 정부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사관계에 정부 통제나 개입을 허용하는 노동계약법 초안을 발표했을 때 중국에 주재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경제단체들은 하나같이 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전달했다. 이와 같은 상해 주재 미국상공회의소, 미-중 기업협의회, 중국 주재 유럽연합 상공회의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 중국 정부는 결국 노동계약법을 대폭 후퇴시켰다. 그들은 노동계약법 제정으로 저임금으로 대표되는 중국 시장의 매력이 감소해 자국의 비용이 상승할 것이며, 이는 외국기업이 중국에 대한 신규 투자나 기업활동을 재고하게 만들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위협한 것이다.


저자가 이밖에 든 사례를 보면 인권 국가라고 해서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나은 게 없다. 물론 저자가 든 사례가 전체 경향과 일치하는지 아니면 부분적인 일탈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결론은 자칫 섣부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당장 생각나는 사안 몇 가지만 떠올려 봐도 이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좋게 말하면 자신이 손해 입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인권 국가이고 느낀 대로 이야기하면 애초부터 남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그런 결론을 만나니 허탈하기는 하다.


나는 나쁜 짓 하는 사람보다 좋은 말은 골라서 하면서 하는 짓은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을 더 싫어한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한다. 드러내놓고 나쁜 짓 하는 사람은 차라리 솔직하기나 하지, 하는 짓은 다르지 않으면서 가식까지 떠는 건 더 나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차라리 가식 없이 본심을 모두 드러내놓고 사는 세상이 너 나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탄소 감축 계획과 같은 ‘선진국 사다리 걷어차기’를 지켜보며 내내 불편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피장파장주의를 지지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기엔 중국이 세계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것이 공자학원이다. 공자학원은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곳곳에서 자국을 비판하는 이들의 입에 재갈을 채운다. 달라이 라마의 강연을 취소하고, 대만 중앙도서관 정보가 담긴 학술대회의 프로그램 페이지를 삭제하고, 민감한 중국 이슈에 관한 연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자금 지원을 제안하고, 더 나아가 공자학원이 중국 관련 담론을 주도하려 든다. 이런 활동에 반발해 유럽과 북미의 많은 대학이 공자학원과 협약을 폐기하거나 중국과 관계가 경색된 국가에서는 공자학원을 폐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규모가 작거나 자금이 부족한 기관에서는 공자학원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 차원에서도 광범위한 압박을 가해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가 중국 연구 분야의 저명 학술지인 <계간 중국, The China Quarterly> 논문 315편에 대한 접근을 차단한 일도 있고, 세계 최대 학술 출판사인 Springer Nature가 중국 웹사이트에서 1천 개 이상의 논문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기도 했다.


어느 나라라 자국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중국이 비난받는 건 그 정도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혹시 중국이 선진국만큼 우아하게, 세련되게 자신들의 행동을 포장하지 못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닌가? 최근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한 책을 연속적으로 읽으면서 이 분쟁의 뿌리는 결국 선진국의 탐욕에 있다는 걸 거듭 깨닫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과거는 감춰지고 유독 중국의 문제만 불거지고 있으니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다시 피장파장주의의 자리로 돌아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몇 가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


“중국 경제 성장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사이에 있었던 토지개혁의 결과로 발생한 잉여 노동력을 착취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잉여 노동력은 도심지역으로 이주해 민간 부문의 호황을 뒷받침했다. 모택동 시기의 중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철저하게 평생고용을 보장했다. 일터를 거버넌스의 장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 국유자본은 급여는 낮지만 고용을 보장함으로써 안정적 착취를 이루었다. 반면에 국제 민간자본은 높은 급여를 보장하는 대신 고용을 보장하지 않았다.”


평생고용이 이상적(理想的)이기는 하지만 이상(異狀)한 일이고 달성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인구 대국이기는 하지만 중국이라고 해도 잉여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국의 기록적인 경제 성장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인가? 써놓고 보니 어리석은 질문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는 게 자연의 섭리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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