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혁
해냄출판사
2024년 9월 23일
독서 방송을 통해 문지혁이라는 작가를 알았다. 그가 쓴 장편소설 <초급한국어>도 읽고 소설집 <고잉 홈>도 읽었다. 소설에 관심이 없는 나도 알만한 소설가이니 꽤 유명한 사람일 텐데, 그는 책에서 자신이 쓴 글도 초판을 소화한 게 얼마 없다고 고백했다. 작년까지 그는 소설집 세 권, 장편소설 다섯 권을 발표했다. 번역한 것도 몇 권 있지만 그건 창작품이 아니니 제외하고. 아무튼 그런 사람이 글을 써서 생계를 잇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쓴 걸 보니 이러다가 우리 소설이 사라지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싶은 걱정도 든다.
그가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는 도발적인 책을 냈다.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이라는데, 그렇지 않아도 글 쓰는 법도 배우지 않고 글을 써재끼면서 켕기는 부분이 있었던 지라 이참에 글 쓰는 방법을 공부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중에 나 같은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몇 곳 정리했다.
저자는 우선 많이 쓰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어떤 장점이,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질은 양에서 나오고, 여러 편을 써봐야만 그중에 더 나은 것을 가려낼 수 있다.”
하긴 양적 성장이 누적되면 어느 순간 질적 성장으로 전환한다는 경험칙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첫 관문은 잘 넘은 셈이다. 글 쓰는 양으로만 보면 나 또한 전문 작가 못지않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처음부터, 단번에, 쉬지 않고 좋은 글을 쓴다는 뜻이 아니다. 처음에는 쓰레기와 다르지 않았던 우리 글을 얼마나 어떻게 고쳐서 좋은 글로 만들 수 있느냐에 관한 일이다.”
글을 고치는 일. 즉, 퇴고에 관한 글이다. 저자는 헤밍웨이의 입을 빌려 “뭐든 처음 쓰는 건 다 쓰레기”라고 질타하며 “아마추어는 초고에서 멈추지만 프로페셔널은 초고에서 시작한다”는 윌리엄 노트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작가만이 고칠 수 있다. 바로 여기가 뭔가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누구도 이 일을 대신해 줄 수 없다”고 못박는다.
여기까지는 나 또한 걸리는 게 없다. 나는 아주 짧은 글이 아니면 즉흥적으로 온라인에 글을 올리는 경우가 없다. 어딘가에 글을 완성해 놓고 그 글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 후에야 온라인에 글을 올린다. 그러고 나서도 수시로 읽고 수시로 고친다. 눈치 빠른 사람은 온라인에 올려놓은 내 글이 수시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퇴고는 고치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많은 이들이 퇴고를 원고를 손보는 것쯤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당나라 시인이 시를 짓던 중에 마지막 구절을 달빛 아래 “문을 민다(밀 퇴, 推)”고 할지 “문을 두드린다(두드릴 고, 敲)”고 할지 망설였다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퇴고는 선택’이라고 못 박는다.
중요한 것은 퇴고를 시작할 때 이미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퇴고는 단순히 비문이나 오타를 잡아내는 일도 아니고, 근사한 해결책이 떠오르기만 기다리며 막연히 원고를 읽고 또 읽는 일도 아니며,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지금껏 글 하나를 써놓고 수십 번 수백 번 읽고 또 읽으며 글을 고쳤고, 그 정도면 되었다고 스스로 만족해했다. 선택지 없이 그저 고치다 보면 좋아지겠거니 생각한 것인데, 이 글에 비춰보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선택을 위해 제안하는 방식 중 하나가 나 역시 즐겨 사용하는 소리 내어 읽는 일(음독)이어서 위안이 된다. 경험에 따르면 비문을 찾아내는 건 생각보다 단순하다. 소리 내어 읽어 보면 된다. 어딘가 자꾸 걸리면 비문이고, 자연스럽게 읽히면 문장으로서 기본은 갖춘 정도가 된다. 글 쓸 때만 아니라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연습한다. 여러 번 연습한다고 외워지는 건 아니지만, 할 말이 입에 붙으면 연습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내 글은 창작품인 소설과는 무관하다. 그렇지만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쓴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저자는 독자에게 읽힐 글이라면 독자의 의견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독자의 반응을 보기 위해 굳이 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나 수준에 맞는 사람에게 보일 생각을 말고 당장 옆에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라고 권한다, 그리고 어떤 평가이든 그것을 귀담아들으라고 말한다. 그러고 이때 기억할 원칙은 “남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 의견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결국 남의 의견을 귀담아 듣되, 내 맘대로 고치자는 것이다. 귀담아 듣되 내 맘대로 고치자니, 엉뚱해 보이기는 하지만 행간이 읽어지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독자를 상정하고 쓴 글이라면 독자 의견이 매우 중요하다는데, 독자 의견을 듣는 데는 소셜미디어만 한 게 없다. 나는 글을 페이스북과 브런치에 올린다. 조회 수는 브런치가 더 많은데 반응은 가물에 콩 나듯 하다. 그렇다고 페이스북 반응이 좋은 것도 아니다. 일단 내 글은 길어서 글을 올리면서도 끝까지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그래서 글 내용과 관련한 댓글이 달리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차라리 시비라도 걸면 내가 의도한 바를 설명이라도 하겠는데, 모두 점잖은 양반들만 계시는지 댓글도 점잖기 짝이 없다. 저자 말대로 남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고치는 건 내 맘대로 하고 싶으나, 반응이 없으니 별무소용이다.
앞서 쓰다 보면 건질 게 생기기도 하니 많이 쓰라는 저자의 말을 전했다. 그런데 글을 쓰려면 글감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전문 작가들인 영감을 받아 쓴다지만, 일반인은 그저 글감이라도 있어야 써 볼 엄두를 내지 않을까. 저자는 영감이 있기는 하지만 글을 쓸 때 그걸 찾아서는 안 되고 쓰기 이전에 미리 찾아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일반인은 영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글감 정도는 미리 챙겨놔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메모만큼 좋은 요령이 없다. 영수증 뒷면, 심지어 냅킨에 메모를 남긴 작가들도 있었다더라만, 난 모바일 메모장을 잘 써먹고 있다. 손에서 떨어질 일이 없다는 점에서 그보다 제격인 도구도 없다. 저자처럼 블루투스 키보드까지는 아니더라도 녹음도 괜찮기는 하겠다.
이런저런 요령 중에 가장 공감했고, 한편으로는 위로받은 게 하나 있다. 시작하면 어떻게든 마무리가 되기는 하는데, 시작하기가 영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엊그제 쓰기 시작한 이 글도 중간에 멈춰서 이틀을 꼬박 까먹었다. 계속 키보드 앞에 앉아 있었으면서 말이다.
우선 저자는 글이 막히면 과감하게 건너뛰기를 권한다. 하긴, 주저하다 보면 오래 멈춰야 하지만 뭐라고 끄적이다 보면 그래도 끝이 나기는 하더라. 하지만 뭐라도 끄적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주저하다 보면 딴짓하고, 그러는 사이에 며칠이 지나기 예사이니 말이다.
저자는 자리에 앉으면 딴짓을 하게 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단계라고 말한다. ‘물리적 작업실에서 내면의 작업실로 들어가는 문지방이자 연결 통로’이며, ‘어쨌든 이 시간을 통과해야 진짜 작업 시간이 시작되니 이 시간은 거룩한 낭비’라는 것이다. 저자는 하루 글 쓰는 시간을 네 시간으로 정해놨는데, 그중 한두 시간을 이처럼 ‘거룩한 낭비’로 보내는 일이 다반사이고, 네 시간을 몽땅 그렇게 ‘거룩한 낭비’로 보내는 일도 심심치 않다고 한다. 전문 작가가 이러니 나 같은 일반인이야 뭘.
각설하고,
작년 3월 초에 책을 내고 지금까지 초판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압도적 다수가 그렇다는 이야기에 익숙하면서도 설마 내 책이 그럴까 생각했다. 출간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땐가 편집자를 만났는데, 그때 2쇄가 들어갔느냐고 물으니 대답을 얼버무렸다. 솔직히 실망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한 달이나 지났는데 2쇄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실망할 일이 아니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 걸 물은 나 자신을 민망하게 여겨야 할 일이었다. 저자처럼 온전히 자신을 갈아 넣어 글을 쓰는 작가도 2쇄 찍기가 어렵다니 말이다.
여러분, 책 좀 사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