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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18. 2024

[요약] 현대중동국가의 형성과 발전

홍미전

건대인문총서

2010년 12월 20일     


후세인-맥마흔 서한 Husain-McMahon Letters     


1915년 7월에서 1916년 1월 사이에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인 헨리 맥마흔과 헤자즈 국왕(Sharif) 후세인 빈 알리가 주고받은 서한으로, 이 서한에서 맥마흔은 전쟁이 끝나면 영국이 아랍 독립을 지지하겠으며 아랍인이 칼리파에 오르는 것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한다. 맥마흔은 아랍국가를 세울 지역으로 다마스쿠스, 홈즈, 하마, 알레포를 언급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어느 지역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당시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데 팔레스타인이 전략적 요충지가 될 것으로 판단한 상태여서 이 지역이 아랍 독립국에 포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 지역의 칼리파가 되기를 꿈꾸고 있던 후세인은 이 사실을 알고서도 맥마흔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터키를 상대로 항쟁을 시작한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The Sykes-Picot Agreement     


1916년 5월 영국 정치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정치가 프랑스와 조지 피코가 체결한 협약. 영국은 맥마흔을 통해 후세인에게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했으면서도 이면에서는 이 협정을 통해 프랑스와 그 지역을 분할 하기로 약속한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은 영국과 프랑스와 러시아가 공동으로 통치한다.    

 

벨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1917년 11월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가 영국의 시온주의자 지도자인 로스차일드에게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재건한다는 원칙을 승인하며, 영국 정부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펼치고, 이에 필요한 수단이나 방법은 시오니스트 기구와 합의한다”고 약속한다. 이는 1905년 제7차 시오니스트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국제적인 승인의 첫 번째 사례이다. 이 선언으로 인해 ‘후세인-맥마흔 서한’과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폐기된다.     


파이살-와이즈만 협정 Faisal-Weizmann Agreement     


1919년 1월 3일 헤자즈 후세인 국왕의 셋째 아들인 에미르(Emir) 파이살과 시오니스트 기구 의장인 영국인 하임 와이즈만이 체결한 협약. 아라비아반도를 아랍국가와 시오니스트국가로 분할할 계획이었던 영국이 이 협정을 통해 파이살의 1917년 벨푸어 선언 지지를 끌어내고 시오니스트 국가는 파이살의 아랍국가 건설을 후원하도록 만들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943     


<인남식 교수 시사IN 기사 중 해당 부분>


중동 현대사에 만연한 분쟁과 갈등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로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1차 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적국인 독일 편에 오스만이 가담하자 이 제국을 무너뜨려 광대한 영토를 얻고자 했다. 프랑스는 독일-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조금씩 승기를 잡아나갔다. 영국은 사막과 광야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만과 맞붙은 레반트(지금의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 전선에서는 어려움이 컸다. 이때 아라비아반도 서부 헤자즈 지역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알리가, 영국의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에게 중요한 제안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후세인은 아라비아반도 명문 가문인 하심의 대표 격이었다.


오스만 제국 휘하에서 살아왔던 아랍 부족들은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터키 민족주의를 우려했다. 급기야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인 메카의 태수 후세인을 제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하심 가문이 오스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켜 영국 편을 들겠다고 제안했다. 대신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 그 공을 인정해달라고 했다. 아랍 통일왕국을 세워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맥마흔의 보고를 받은 영국 정부는 아랍의 반란 계획을 받아들였다. 사실 후세인의 편지는 영국에게 가려운 곳을 먼저 나서서 긁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레반트 지방과 아라비아반도 전역을 달라는 후세인의 요구는 추후 논의하여 확정하기로 미뤄둔 채 아랍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카이로에서 군사고문관으로 유명한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파견되어 아랍 청년들과 함께 터키군을 상대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아랍은 늙은 제국 오스만을 해체하고 자신들이 중동을 대표하는 신흥 정치세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을 배신했다. 영국이 "프랑스와 레반트와 아라비아반도 일부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 통치"하는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을 맺은 것이다. 협상이었다. 협상 기간을 보면 후세인-맥마흔 서신 교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영국의 이중 플레이였다.


1917년 1월 밸푸어 선언이 있었다.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는 막대한 1차 대전 비용을 대준 유대 로스차일드 가문에 편지를 보내 시온주의자들의 오랜 염원을 이루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들의 고향으로 인정하는 선언이었다. 이 땅은 후세인이 간절히 원하던 성지이기도 했다. 그로서는 메카와 메디나 그리고 예루살렘 등 3대 이슬람 성지를 관할하는 상징성이 중요했다. 성지의 관리자로서 아랍과 이슬람권을 아우르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으나 좌절된 것이다. 이 선언을 기점으로 영국은 이스라엘 독립의 후원자 노릇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후세인과 하심 가문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1차 대전이 끝나자 1920년 산레모 회의 및 세브르 조약에 의해 사이크스-피코의 분할안은 결국 실현된다. 후세인이 통일 아랍 왕국의 영토로 삼고자 했던 레반트와 아라비아반도는 쪼개져 영국과 프랑스에 복속되었다. 성지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주민 사이의 분쟁에 휩싸였다. 오스만 제국 해체 후 중동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세인의 하심 가문은 더 수모를 당한다. 아라비아반도 중부 네지드(Nejd) 출신의 사우드 가문에게 패퇴하여 메카를 빼앗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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