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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30. 2024

야구의 나라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8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여덟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이종성 교수의 <야구의 나라>를 읽었습니다. 링크는 댓글에 올립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클릭 한 번...


♣♣♣


이종성

틈새책방

2024년 2월 29일


야구라고 하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어디 나 뿐일까. 중년 남성에게 야구에 관한 기억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럴 정도로 야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중 스포츠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중 스포츠로는 축구가 앞선다는 반박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조기축구회 없는 동네를 찾기도 어려운 정도가 아닌가. 사회인 야구단이 여럿 있다고는 하지만 조기축구회에는 비할 것이 아니니 그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일반인의 관심이나 시장 규모로 보던지,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 보는 스포츠의 관점에서 봐도 단연 야구가 앞서는 게 사실이다.


지금이야 스포츠를 즐기는 것으로 여기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를 국가 위상이나 국력과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스포츠는 오래전부터 국가가 주도하는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승리를 거두어 국민을 기쁘게 만들겠다는 각오를 밝히는 게 당연했다. 야구도 그중 하나이기는 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하고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여러 번 우승해서 많은 국민이 기뻐했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대회에 처음 출전한 게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였고,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었다. 이러니 다른 종목은 몰라도 야구가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은 건 국가적 프로젝트와는 무관하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야구가 대중 스포츠로는 단연 우위를 차지하면서도 동호인은 축구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경기를 위해 마련해야 할 용품이 많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그러니 야구가 우리에게 소개된 일제강점기에는 더 말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저자는 야구가 엘리트 스포츠로 출발했다고 소개한다. 공 하나만 있으면 몇 사람이 되었든 모두 뛰어들어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축구와 출발점이 달랐던 것이다.


저자는 1915년 창설된 고시엔 대회의 한국 예선전에 1916년 치러졌고 거기에 경성중학(서울고)을 비롯한 5개 팀이 참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이 1905년 설립된 YMCA 야구단이니 중학교 야구팀이 창단된 것은 아마 그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야구를 소개한 건 한국에 와있던 일본 엘리트들이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근대교육으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때 영어 교사였던 미국인들이 영어를 가르치면서 대표적인 미국 문화인 야구를 소개했는데, 이들에게 배운 엘리트들이 조선총독부의 요직을 차지한 것이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공부했던 유학생들이 돌아오면서 야구가 전파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 때문에 1920년 조선체육회가 설립되고 나서 열린 최초의 대회가 야구 대회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공립보통학교에 야구를 도입해 이 땅의 엘리트들을 흡수함으로써 일본 동화정책을 펼치기도 했는데, 그런 동화정책은 당시 또 다른 엘리트의 요람이었던 상업학교에도 적용되었다. 이런 이유가 야구가 우리 땅에서 엘리트 스포츠로 출발한 동력이 되었다.


나도 나름 야구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일제강점기의 야구계 상황은 대부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휘문중학이 고시엔 대회 본선에 진출에 8강까지 올랐고 인천고의 전신인 인천상고가 고시엔 대회 본선에 3회나 출전했다고 한다. 여기서 상고가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었다는 저자의 설명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기도 할 것이다. 지금이야 상고의 위상이 상당히 내려갔지만 우리 또래가 사회 진출할 무렵만 해도 금융기관은 모두 상고 출신 인사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중 몇몇 학교는 가난한 수재들이 가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소개되었던 야구는 해방을 맞으면서 날개를 달았다. 미군정 인사들의 적극적인 관심에 힘입어 1946년 <자유신문>에서 청룡기 중학 야구 대회를 개최했다. 청룡기 대회에 참가한 팀을 보면 야구가 엘리트 스포츠라는 말이 실감 난다. 1회 대회에는 경기, 경복, 경성(서울고), 휘문, 배재, 양정, 경남, 광주서중(광주일고), 전주북중(전주고), 선린, 인천상고(인천고), 부산상고를 비롯해 모두 24개 팀이 참가했다. 이때부터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까지 야구는 단연 고교야구가 으뜸이었고, 국민에게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어린 선수들이 혹사당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고교야구가 주말리그로 바뀌었고 프로야구의 그늘에 가려 고교야구 기사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70년대에는 고교야구 전국대회가 시작되면 신문이 온통 그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4대 중앙일간지가 모두 전국대회를 개최했는데, 1946년 <자유신문>이 창설한 청룡기 대회는 1953년부터 조선일보가 이어서 개최하고 있고, <동아일보>가 1947년 황금사자기를, <중앙일보>가 1967년부터 대통령배를, <한국일보>가 1971년부터 봉황대기를 개최해오고 있다. 저자는 이처럼 중앙일간지가 고교야구에 발 벗고 나선 것은 대회 수익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전국을 들썩일 정도이기는 해도 사실 입장 수입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신문사들이 겨냥한 건 구독자로서 당시만 해도 구독 경쟁이 신문사 위상의 절대 지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다닌 신일고등학교는 농구로 유명했다. 2학년 때는 전국대회 6개 중 5개를 우승하기도 했다. 그래봐야 신문에 실리는 것은 1단짜리 단신에 불과했다. 고교야구는 8강에만 진출해도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리는데. 그래서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구팀을 만들었다.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두어 이 책에서 언급하는 야구 명문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고등학교 때는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야구팀이 없기도 했고 딱히 야구에 흥미가 있을 유인도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인 1975년 민간기업 최초로 생긴 롯데 야구단 때문에 야구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라는 김동엽 감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때문에 평균 천 명에 불과하던 실업야구 관중이 하루아침에 5천 명으로 늘어났다. 저자는 당시 치어리더도 한몫했다고는 하는데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야구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고교야구는 보지 않았는데,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실업야구를 보면서 높아진 눈으로 고교야구를 볼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는 실업야구 한 시즌 55경기 중에서 48경기를 본 일도 있었다. 그때는 동대문운동장에서 하루에 세 경기를 열었다. 그래서 아침에 도시락 싸들고 들어가 해질녘에 나왔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롯데 야구단이 인기를 끌었다고는 하지만 실업야구 주축은 단연 은행팀이었다. 해태타이거즈를 아홉 번, 삼성라이온즈를 한 번 우승시킨 김응룡 감독은 당시 한일은행 야구팀 홈런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은행팀이 실업야구의 주축을 이룬 배경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62년에 국민체육진흥법이 생겼는데, 이는 1964년 동경올림픽에서 일어날 남북대결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스포츠팀 운영 방침이 공기업에 떨어졌고, 당시 공기업 중에서 자금 여유가 있었던 은행에서 (당시는 모든 은행이 국가 소유) 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화이트칼라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은행은 야구팀이 있던 상고 출신들이 고위직에 포진하고 있어서 자연히 그들이 익숙했던 야구팀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올림픽에서 일어날 남북대결을 위해 국민체육진흥법을 만들었지만 정작 창단된 것은 올림픽 종목도 아닌 야구단이라는 아이러니가 일어난 것이다.


1982년에 출범한 프로야구는 바로 이러한 실업야구 출신의 선수로 출범했다. 나는 프로야구가 출범한 때부터 OB베어스의 팬으로 있다. 연고지도 상관없고 더욱이 OB와는 아무 인연도 없던 내가 그 팀을 응원하게 된 것은 실업야구 홈런타자로 이름 높던 제일은행의 김우열 선수가 그 팀 선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마이너리그이기는 했지만 미국 프로야구의 물을 먹은 박철순 투수가 22연승의 대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비록 프로야구가 실업야구 출신 선수로 시작은 했지만 분위기는 고교야구가 바탕이 되었고 이제는 프로야구단이 지역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롯데가 자타 공인의 극성팬을 거느리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저자는 그 기원을 1964년 동경올림픽으로 본다. 당시 부산에서는 일본 방송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방송을 통해 야구 중계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동경올림픽에서 야구 TV 중계를 한 것이 기름을 부은 셈이 되었다. 1980년대에는 부산에서는 KBS, MBC와 함께 NTV(니혼TV)를 3대 TV방송으로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부산의 고교야구팀이 전국대회를 휩쓴 것도 부산이 ‘야구의 구도(球都)’로 자리 잡게 만든 큰 요인이 되었다. 1946년에서 1950년 사이에 전국대회로는 청룡기 5회, 황금사자기 3회가 열렸는데 이 여덟 번의 대회에서 부산상업과 경남중이 6회를 휩쓴 것이다. 그리고 지방 최초로 대학 야구팀이 창단됐고(동아대), 지방 최초로 전국대회(화랑대기)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것을 보면 이 책은 야구 이야기라기보다는 야구를 키워드로 하는 역사요 사회사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저자 이종성은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이며 영국에서 스포츠 문화사로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해방 이전에 야구가 처음 우리에게 소개된 때로부터 해방 이후에도 야구의 위상이 꺾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날개를 달게 된 시대 배경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건 야구라면 할 말이 있다던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고교야구가 황금시대를 이루던 1970년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나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교야구 황금시대도 기억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처럼 기록으로 남으면 역사가 되는 것이니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낱 이야깃거리로 소비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사서이다. 알라딘에서 찾아보니 실제로도 역사서로 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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