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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15. 2024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12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열두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존경하는 학자인 서울대 김승섭 교수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읽었습니다.


자식 뻘 되는 나이이지만 김승섭 교수를 일컬을 때는 서슴 없이 <존경하는 학자>라고 부릅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이 그렇고, 그가 걸어온 길이 그럴 뿐 아니라, 그로 인해서 제 편견을 깨닫고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제 글도 읽어 보시고 시간 내서 김승섭 교수의 책도 한번 읽어 보시지요.


링크는 아래에 올립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클릭 한 번...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동아시아

2023년 11월 22일


저자는 의대에 진학해 임상의를 꿈꾸었지만 일하지 않으면 당장 생계가 막막한 일용직 노동자에게 “다친 허리를 치료하려면 며칠은 조심하며 누워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고 나서 보건학자로 진로를 바꾸어 지금까지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연구하는 일에 천착하고 있다. 그는 세월호 생존 학생과 천안함 생존 장병이 겪어야 하는 트라우마가 다르지 않으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삶을 통해 기업의 횡포가 인간을 그리고 가정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학술적으로 증명해냈다. 또한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의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성 정체성(gender identity)과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공론의 장에 등장하게 만드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는 2016년 한 시사잡지에 실린 저자의 ‘재소자 건강권’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그의 독자가 되었다. 중범죄자까지 인권을 존중하고 동일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저자가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답한 것을 읽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에서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한 시점이 바로 IMF 경제위기로 비정규직 고용이 확대된 시점이라면서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고용불안은 삶을 뿌리째 흔드는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고용에 주목하겠다”는 그의 계획을 읽고는 그의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나는 평생을 개신교인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살지는 못했지만 성서가 삶의 표준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그래서 게이나 트랜스젠더는 못 볼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 성소수자에 관한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몹시 혼란스러웠다. 저자가 학술적으로도 현대 임상의학에서도 동성애는 타고난 것이며, 그래서 질병이 아니고, 당연히 치료도 불가능하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 글만으로는 의심을 지울 수 없어서 저자가 글에 달아놓은 참고문헌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근거 없는 혐오에 사로잡혀 살았는지, 교회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2020년 여름에 차별금지법 반대의 광풍이 한국 교회를 휩쓸었다. 그때 이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몇 달 동안 자료를 찾아가며 차별금지법의 취지와 그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법적, 의학적, 성서적 관점에서 살펴본 일이 있다. 그 과정에서 차별금지법은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며,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므로 전환 치료가 불가능하고, 성서에서 죄로 여기는 것은 ‘18세기나 되어서 비로소 개념이 정립된 동성애’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성 착취’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여기에 저자인 김승섭 교수가 발표한 글이 큰 힘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도 여전히 그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소수자와 약자가 겪는 차별과 혐오에 집중하고 있다.

저자는 2020년 2월에 숙명여대 법학과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반대에 부딪혀 입학을 포기한 사례를 언급하며 그 반대를 주도한 이들이 다름 아닌 약자를 자처하는 여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미 성전환수술도 하고 법적으로도 성별을 정정한 여성을 숙명여대를 포함한 여자대학 20여 개 단체가 ‘트랜스젠더 입학 반대 TF팀’을 만들어 입학을 저지한 것이다. 그들은 그 여성을 ‘본인을 여자라고 생각하는 남자’로 규정하고 여자들의 공간과 기회를 빼앗고 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차별은 강자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로 볼 때 한국은 코로나19 대응에 성공한 나라이지만 저자는 그 성공의 경험이 오히려 두렵다고 말한다.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했던 방역 과정의 사회적 비용을 실은 가장 약한 사람들이 치렀기 때문이다. “고용허가제 탓에 직장을 옮길 수 없었던 이주노동자들은 확진 통보를 받은 동료들을 모아 야간노동을 시키는 고용주에게 저항하지 못했고, 선제적 코흐트 격리된 보육시설의 아이들은 석 달 넘게 앞에 있는 편의점조차 갈 수 없었고,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은 층간 이동도 제한받았다. 혼자 방에서 지내는 자폐아를 돌보기 위해 부모는 함께 방에 들어가 지내야 했고, 그 일이 자주 발생하자 부모들은 직장을 잃었다.” 변명을 하자면, 그때는 모두 자기 한 몸 건사하기에도 바빠 이런 이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면 지금은 좀 나아졌는가? 그동안 저자의 글을 읽으며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나 역시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장애인 단체의 지하철 시위로 발이 묶이자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짜증을 냈었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저자는 장애인 이동권을 연구할 때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려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대중교통은 어딘가 가기 위한 수단인데 그들에게 그 어디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극장과 카페의 문턱과 계단뿐 아니라 사회적 낙인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신체가 손상되어 행동에 제약을 받는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장애인 처우 면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장애 인구를 국제기구에 제출하지 않는다. 그들은 장애가 ‘신체 손상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절대적인 상태’가 아니라 ‘물리적 사회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유동적인 상태’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체가 손상되었더라도 이들이 행동하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을 만큼 시설과 제도가 갖춰졌다면 장애인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고정적인 장애 인구를 산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고 고용부담금으로 그 의무를 피해 가는 것이 기업의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고용부담금은 1990년 법이 제정될 당시 정한 최저임금의 60~100퍼센트에서 24년째 변하지 않고 있으니 그런 판단을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기업을 탓할 일인 것만도 아니다.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멀어도 너무 멀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가 소수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수인 약자가 있으니 바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그렇고, 그 여성의 열악한 인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화장실이 아닐까 한다. 오래전에 교회 수련원 리모델링을 맡았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여성 화장실을 남성의 두 배로 만들었다. 사실 화장실 면적이 같아도 변기 수는 여성 화장실이 훨씬 적고 여성의 평균 사용 시간은 남성의 두 배가 넘는다. 이런 특징 때문에 남녀 화장실을 같은 면적으로 만들어놔도 늘 여성 화장실이 붐비게 마련이다. 나는 그런 현실을 바로잡으려고 여성 화장실을 대폭 늘렸는데, 그런 사회적 차별을 바로잡는 데 앞장서야 할 교회 안에서 내게 돌아온 것은 지나치다는 비난뿐이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2006년 공중화장실법을 “여성 화장실의 대변기 수가 남성 화장실 대ㆍ소변기 수의 1.5배 이상이 되도록 설치”하는 것으로 개정했다. 하지만 저자는 2013년 한국화장실협회가 전국 공중화장실 120개소를 선정해 조사한 결과를 보면 남성용 변기 한 개당 여성용 변기는 0.82개로 여전히 여성용 변기 수가 적었다고 전하고 있다.

차별이 이렇게 쌓이다 보면 그것을 견디다 못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이 이의 시정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나서게 마련이다.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인데, 그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우선 나 자신부터 그런 집단행동을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작은 불편을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들을 향해 생떼를 쓴다거나 억지를 부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을 고발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는 직업병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성소수자와 관련한 소송에서 전문가 소견을 쓰거나 증언하면서 그때마다 상대측에서 고용한 변호사들이 논리적인 문장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생존자의 약점을 찾아 비난하고, 권위자들과 협업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아하고 합리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이들이 종종 승소하는 것 또한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 왜 피해자들은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만드는 일에는 시간과 자본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은 대체로 그럴만한 시간과 자본이 없는 것이 현실이며, 그들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처럼 “공동체가 오랫동안 누적된 차별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미룰 때 차별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당사자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와 기회를 빼앗긴다”고 강조한다. 사회의 책임을 지적한 것이다.

저자는 그간 펴낸 일련의 저서에서 일관되게 그런 차별을 지적하고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심리적 충격은 물론 물리적, 육체적 충격을 가한다고 강조한다. 전작에 이어 이 책에서도 저자는 인종 차별, 성 차별, 성소수자 차별을 비롯해 정신질환자, 에이즈 환자, 미투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각종 혐오와 차별이 얼마나 비합리적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누누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주장과 아울러 관련 연구자, 활동가, 피해 당사자, 그리고 이것을 사회문제로 끌어내려는 예술가들과 대담을 통해 문제를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올해부터 지체장애인과 발달장애인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까지 포함한 1000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을 20년간 추적 관찰하는 장기 프로젝트 ‘사회적 환경과 조기노화: 지체장애인, 발달장애인, 발달장애인의 부모 연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저자의 대중서 쓰기는 이것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의사를 피력한 일이 있다. 그가 발표한 글의 독자로, 또 그 글의 영향으로 삶의 방식을 바꾼 당사자로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아무쪼록 그의 연구가 좋은 결실을 맺어 많은 이들의 삶이 직접 간접으로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 결과를 지금처럼 책으로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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