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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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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l 18. 2024

2024.07.18 (목)

사우디에서는 3월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온이 40도를 넘나든다. 한여름에는 50도가 넘기도 한다. 그래서 여름 석 달 동안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법으로 야외작업을 금지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길거리에 인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 곳이 드물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긴 걷는 사람도 없다. 걷는 사람이 없어서 인도가 그 모양인지 인도가 없어서 걷는 사람이 없는 건지, 아무튼 그렇다.


사우디에서 지내던 처음 한두 해 사이에 몸무게가 훌쩍 늘었다. 걸을 수도 걸을 곳도 없고 운동이라고 해 봐야 단지 안에 있는 짐에서 꼼지락대는 게 전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쯤 한국 곳곳에 둘레길 개천길이 생겼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잠깐 사이에 온라인이 그런 길을 걷는 사진으로 도배가 됐다. 그럴 때마다 서울에 돌아가면 질리도록 그 길을 걸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하루가 멀다고 그 길을 걸었다. 홍제천 따라 걷고 안산자락길 따라 걷고, 집 뒤에 있는 사우디 국립공원보다 낫다 싶은 백련산도 여러 번 오르내렸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지난 겨울 끝자락 쯤에 안산자락길 걸은 게 마지막이었으니 이미 반 년 가까이 흘렀다. 그러고 경주로 내려와 이젠 한동안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게 생겼다.


나는 금 하나 긋는 걸로 하늘과 바다를 나눌 수 있는 곳이라야 바다라고 여기고 살았다. 거제도 현장에서 두 해 근무하면서도 거제도 앞바다를 바다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다. 지심도 안섬 밖섬에 매물도까지 가로막고 있는 곳이 무슨 바다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금 하나로 하늘과 바다가 나뉘는 동해만 바다일 뿐이다.


큰 창으로 가득 바다가 들어오는 곳, 큰맘이나 먹어야 볼 수 있는 일출이 얼굴로 쏟아져 들어와 늦잠 자는 건 엄두도 나지 않는 곳에 숙소를 잡으면서 원 없이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체코 가는 생각도 접었다. (그러다가 체코 원전 수주 소식을 들으니 맘이 왔다 갔다 한다) 숙소 창을 가득 채우는 바다도 볼만하지만 잠깐이면 걸어갈 수 있는 가곡항이며 나정항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런데 현장에 내려온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나정항은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바라본 것이 전부이다. 가곡항은 한번 출근길에 일부러 둘러서 온 것뿐이고. 여섯 시에 퇴근하면 해 떨어질 때까지 두어 시간이나 남는데, 막상 숙소에 들어와 밥 차려 먹고 우물우물하다 보면 밖은 캄캄하고, 한 것도 없이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 되곤 한다. 게다가 월요일은 새벽에 내려오니 퇴근하면 밥 먹고 잠자기 바쁘고, 금요일은 집에 와야 하니 이곳에서 지내는 건 사흘 저녁뿐이다.


저녁을 알차게 보내겠다는 야무진 포부는 이미 꿈이 되었다. 올해 쓰기로 한 책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글감 찾느라 꾸역꾸역 책은 읽고 있다만 그것도 진도가 영 나가지 않는다. 책 읽는 것도 리뷰 쓰는 것도 계획했던 것에 반도 미치지 못하고.


오늘은 큰맘 먹고 퇴근하면서 나정항을 둘러보았다. 걸어가면 이십 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마음만 바빠 차를 가지고 가서 십여 분 남짓 돌아보고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왔다. 그러고 다녀왔다는 거지.


어제 아침 내려온 것 같은데 내일 다시 집에 가는 날이다. 십 분 쉴 틈도 없이 일하다 보니 하루도 금방, 옛날 같으면 하룻길을 매주 오르내리다 보니 한 주도 금방. 이러다가 일흔다섯 되고 여든 되는 것도 잠깐이겠다. 억울하다는 건 아니고. 바쁘면 좋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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